빈곤이 세습되는 계급 사회 도래한다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9.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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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양극화→교육 기회 양극화→계급 양극화 가능성
여신금융협회에서 일하던 최성수 과장(35)은 얼마 전 사직서를 내고 시골로 내려갔다. 갈수록 근무 환경이 열악해지자, ‘서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전남 광양에 있는 고등학교로 직장을 옮긴 것이다.

IMF 사태가 닥치기 전 그의 연봉은 4천5백만원 정도였다. 여기에 각종 수당까지 따라 나왔기 때문에 남 부러울 것 없이 지냈다. 그런데 98년 초 3천5백만원으로 깎였고, 올해 초에는 다시 2천 9백만원으로 줄었다. 각종 수당과 퇴직금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 때문에 카드 회사로 옮길 생각도 해보았지만, 부장 연봉이 2천9백만원이라는 소리를 듣고 아예 마음을 고쳐 먹었다. 다행히 대학 졸업 때 따둔 교사 자격증이 있어서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외도’한 죄로 호봉은 형편없었다. 이제 그의 연봉은 2천만원 남짓. 그런데도 그는 “미련 없다. 좋은 경험했다”라고 말했다.

그와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던 30대 초반 후배 둘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상관으로 모셨던 부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에 인맥이 있어서 이사로 승진해 갔다. 어제까지 고액 연봉을 제공했던 일터가 순식간에 풍비박산 난 셈이 되고 말았다.

‘이긴 자가 전부 가지는 사회’ 개봉 박두

이같은 분위기는 IMF 한파를 맞은 여타 사업장도 마찬가지이다. 다니는 직장에서 자신의 미래를 건설하겠다는 사람을 찾기 힘들고, 언제 잘릴지 몰라 모두들 대안 찾기에 바쁘다.

그런데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연일 신문 지면에는 IMF 시대의 신흥 귀족들이 등장한다. ‘36억원 연봉설’로 화제가 되었던 서울증권 강찬수 사장, 미국에서 창업한 지 6년 만에 20억 달러를 거머쥐게 된 김윤종 사장. 그밖에도 숱한 억대 연봉자들이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슈퍼 스타 시대’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미국에서 슈퍼 스타 모델이 등장한 것은 3∼4년 전. 세계화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연예인·운동선수뿐 아니라 최고 경영자·벤처 창업가·투자 전문가 등 각 분야의 세계 최고들이 부와 명예를 독식한다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로버트 프랭크와 필립 쿡이 지은 <이긴 자가 전부 가지는 사회>가 전망한 미래가 바로 이것이었다.

문제는 이런 영웅이 극소수에 그치고, 나머지 다수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취급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미국의 실업률이 4%밖에 안될 정도로 경기가 호황을 누리는데도, 한 켠에서는 파산자 수가 3년 연속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부가 극소수에게 편중되고 있고, 나머지 사람들의 생활은 하향 평준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스 페터 마르틴과 하럴드 슈만이 <세계화의 덫>에서 경고한 ‘20 대 80 사회’, 즉 상위 20%가 대부분의 부를 향유하고, 나머지 80%는 불완전한 고용 상태에서 간신히 생계만 유지하는 불평등 사회로 변모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도 그곳을 향해 줄달음질치고 있다.

최근 전문가들 사이에서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다’는 걱정이 터져 나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IMF 한파가 닥치기 전 65∼70%를 차지하던 중산층이 지금은 40%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나머지는 하류층으로 전락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이를 두고 중산층 ‘몰락’ 또는 ‘붕괴’를 얘기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전문가도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상진 원장(사회학)은 “중산층 비중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몰락이라는 표현은 지나치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회가 양극화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IMF 시대에 사회 양극화는 예견된 일이었다. 소득 구조상 자산 소득은 대부분 상류층 몫이고, 중류층과 하류층은 자기들의 노동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IMF 사태 초기에 정부가 고금리·긴축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상류층에게는 고금리 특수를, 중·하류층에게는 실직 또는 감봉이라는 ‘형벌’을 안겨주었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98년 계층별 소득 변화’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상류층의 소득 감소 폭이 미미한 데 비해, 하류층으로 갈수록 소득이 푹 줄어든 것이다.

소득이 줄고 직장의 안정성마저 위협받자 중산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에는 ‘앞으로 좋아질 것’이라는 꿈을 믿고 살았지만, 이제는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산층이 자부심을 가지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동안 중산층은 사회의 안전판으로 인식되어 왔다. 현상황에 만족하기 때문에 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반대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하류층으로 내려앉아 불만 세력화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버팀목이 되어줄 사회 체제가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니다. 실직하면 스스로 일어설 수밖에 없다. IMF 사태가 닥친 후, 정부가 서둘러 여러 가지 실직자 지원 정책을 마련했지만, 급조한 것이여서 실효를 거두기 힘든 상황이다.

올해 초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한국노동연구원이 전국의 실업자 가정 3천2백 가구를 표본 조사한 결과도 이를 증명해 준다. 실직 가정이 생계비를 조달하는 주요 수단으로 삼는 것은 △다른 가족 구성원의 소득 △저축 △퇴직금 순이었고, △실업 급여 △정부 보조금은 비중이 아주 낮았다. 정부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지만, 재원이 한정되어 확실하게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

실직자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67만2천원. 이것은 최저 생계비(4인 가족 기준 월 76만원)에도 못 미치고, 이들의 월평균 지출(77만7천원)에는 10만5천원이나 부족하다. 매달 적자 살림을 꾸려 가니, 머지 않아 돈이 고갈될 수밖에 없다.

최근 경실련·참여연대 등 28개 시민단체가 ‘국민 기초생활 보장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문진영 교수(서강대·사회복지학)는 “이 법은 최저 생계비 이하인 절대 빈곤층을 돕자는 것으로, 1조 2천억원 정도만 추가 투자하면 이들을 보호할 수 있다. 현재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공공근로사업 예산이 1조5천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정부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문형표 연구위원도 절대 빈곤층이 급증하고 있다며 해결책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대부분 일용직·계약직·임시직으로 근무하고 있어서 실업률 통계에도 잘 잡히지 않고, 명예 퇴직·퇴직 위로금·실업 급여와도 인연이 없어 목돈을 만질 기회조차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중산층·대졸자에게는 각별히 신경쓰면서, 이들보다 사정이 심각한 하류층·저학력층에 대한 관심은 적은 편이다. 문연구위원은 “정부가 절대 빈곤층을 제대로 파악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상류층과 중·하류층 간의 양극화 현상은 언제쯤 해소될까. 정부측 대답은 언제나 낙관적이다. 경기가 회복되면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양극화 문제도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견해는 다르다. 경기가 빨리 회복되기도 힘들고, 설사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고용 구조가 그대로 유지될 것이기 때문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심각해지리라는 것이다.

우선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국내 노동 시장의 성격 변화이다. 한국은 이미 저성장 궤도에 진입했고, 기업들도 감량 경영 체제로 전략을 바꾸었기 때문에, 과거처럼 쉽게 노동 시장에 진입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근 삼성그룹이 발표한 인사 방침을 보면 명쾌하게 알 수 있다.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의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그물을 던져서 명문 대학 졸업생을 싹쓸이하는 방식이었지만, 이제는 능력을 갖춘 인재를 낚시질하듯이 엄선할 것이다. 공채를 없애고, 수시 채용 방식으로 바꿀 것이다.” 한마디로, 두루 쓰일 모범적인 인재가 아니라, 특별한 재능을 갖춘 ‘준비된 인재’를 뽑겠다는 것이다.경기 회복되면 빈부 격차 더 벌어질 듯

이것은 다른 기업체들도 마찬가지이다. 필요할 때 최소한의 인원만 선발하고, 인턴 과정에서 또다시 걸러 내겠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한국조세연구원 전영준 연구위원은 “30대 미만 연령층이 오랫동안 취직하지 못할 경우, 이들이 장기적으로 새로운 빈민층으로 전락할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이것은 실직한 30∼50대 연령층도 마찬가지이다. 나이로 보아 이들은 자녀 양육과 교육, 주택 마련에 필요한 돈을 벌어야 할 계층이다. 그런데 이들이 실직하면 재기를 기약하기 힘든 현실이므로, 자녀들에게 가난을 물려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빈부 격차가 좁혀지기는커녕 오히려 확대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렇다면 형평성을 포기한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것은 경쟁력 제고이다. LG경제연구원은 ‘핵심 노동력’과 ‘주변 노동력’이라는 말로 이를 설명한다. 특정 기술이나 전문 지식을 갖춘 핵심 기술자에게는 높은 보수와 고용 안정이 뒤따르겠지만, 단순 사무직·노무직 노동자인 주변 노동자는 끊임없이 고용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심현암 수석연구원은 이를 ‘프로페셔널 시대 도래’로 설명한다. 지금까지는 회사에 대한 애정만 갖고도 적당히 버틸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철저히 전문 지식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명문 대학을 졸업했거나 고시에 붙었다는 사실만으로 평생을 보장받는 일은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를 단련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점에서 미래 사회는 과거보다 훨씬 더 열린 세상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명문 대학에 낙방해도, 고시에 떨어져도,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낼 길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낙관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소득 양극화가 계층 양극화로 굳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곽태원 교수(서강대·경제학)는 그 핵심 이유로 교육 기회 불평등을 든다. 과거에는 국내에서 교육받는 것으로 충분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기 때문에 교육 투자비가 많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삼일회계법인 김의형 국제담당 상무도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다. “독특한 재주를 가진 경우가 아니라면,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어야 하고, 전문 지식으로 무장한 엘리트여야 한다. 국내에서 교육받아서는 그렇게 되기 힘들다.”

중·하류층은 자식 대에 이르러서도 신분 상승을 꿈꾸기가 어려우리라는 것이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거나, 잦은 부부 싸움으로 인해 그릇된 길로 들어설 위험이 오히려 크다.

이를 보완할 대안으로 곽교수는 미국식 학자금 대부 방식을 제시한다. “공부든 사업이든 종자돈이 없어서는 안된다. 지금은 돈 있는 집 자식들만 유학 가는 것이 현실인데, 미국처럼 가난한 학생도 대출받아서 공부하고, 취직한 후에 갚도록 하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런 장치를 마련하지 않은 채 노동 시장의 유연성만 강조한다면, 결과는 중·하류층 몰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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