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안기부 로 회귀하는가
  • 李叔伊 기자 ()
  • 승인 1999.07.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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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정보 수집 조직 강화… “정치 사찰·공작용” 의혹 증폭… 국정원 “정상화 과정” 주장
천용택 원장이 취임하면서 국가정보원(국정원)은 한동안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지난 5·24 개각 때 청와대는 국정원이 불필요한 정치적 오해를 사지 않도록 하겠다며 이종찬·나종일·신 건·문희상 등 정치권 출신 간부를 일제히 철수시켰고, 이 자리를 정통 정보맨들로 채웠다. 전임 이종찬 원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치색이 약하다고 평가받는 천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나는 정치권에서 영원히 사라질 뿐 아니라 심연의 늪에 빠질 것이다”라며 정치와의 절교를 선언했다. 이후 그는 언론과의 접촉도 일절 피하고 있다.

그런 천용택 체제의 국정원이 한 달 만에 정치권의 핵심 공방거리로 떠올랐다. 그것도 언론계 탄압 음모를 꾸민다느니, 정치 사찰을 계획한다느니 하는 오명을 뒤집어쓰고서다. 한나라당은 6월17일 ‘국정원이 대공정책실 산하에 언론단을 신설하고 이사관급(2급)을 책임자로 임명할 방침인 것으로 안다. 이는 언론계 사찰과 통제에 역점을 둔 조직 개편 아니냐’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호남 출신 요원 30명으로 정치 정보팀 구성”

1주일 뒤에는 한나라당 한 고위 간부가 고위 당직자 회의에 ‘국정원이 그동안 정치 정보 수집 요원을 절반으로 줄였으나, 천원장 취임 후 조직 개편 과정에서 거의 원상 회복됐다. 국정원이 앞으로 정치 사찰을 강화하려는 조짐이다’라는 내용의 극비 보고서를 제출했다. ‘국정원 정치과 부활 쟁점화 필요’라는 제목을 단 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관여한 한 의원은 “최근 호남 출신 요원 30명으로 따로 정치 정보 수집팀이 구성되었으며, 요원 1명당 한나라당 의원 5명씩 전담케 한 것으로 안다”라고 주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나 할까. 국정원에 대한 야당의 감시 눈길이 점차 날카로워지는 시점에 이른바 ‘서울대생 프락치 포섭 사건’이 터졌다. 지난 6월22일 서울대 체육교육과 4학년인 강성석군이 “국정원 요원 이 아무개씨로부터 프락치 활동을 강요당했다”라고 폭로한 것이다. 강군의 양심 선언을 주선한 서울대 총학생회와 인권운동사랑방·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는 국정원이 군사 독재 시절의 학원 사찰을 또다시 시도하려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악재가 겹치면서 국정원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이 급속도로 싸늘해지고 있다. 국정원이 과거 안기부로 돌아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강하게 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사실과 다르다며 강력히 부인했다. 천원장이 주도하는 2차 구조 조정과 상반기 정기 인사가 맞물리다 보니 그런 오해가 생겼다는 것이다. 공보실의 한 관계자는 “인사를 하다 보면 정치과에 있다가 나가는 사람도 있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사람도 있는데, 야당이 정치과로 새로 발령된 극소수만 놓고 확대 해석하고 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항변에는 새 원장이 취임한 뒤 조직 정비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무조건 비판부터 하려 든다는 반발심이 깔려 있다. 그는 또 서울대생 사건도 정상적인 수사 차원의 접근이었을 뿐 프락치 활동을 강요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국정원은 최근 이같은 논란이 잇따르자 6월25일 이례적으로 논평을 내고 ‘국정원은 정치 사찰이나 공작을 할 수도 없고, 할 의사도 없다’고 밝혔다.
천용택, 철저히‘닫힌 국정원’표방

그러나 국정원이 적극 해명했는데도 야당과 시민단체의 의구심은 쉽사리 가시지 않을 전망이다. 천용택 체제의 2기 국정원이 여러 측면에서 과거 안기부의 모습을 닮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천원장은 철저히 ‘닫힌 국정원’을 표방한다. 취임 이후 그는 ‘정보기관이 대외에 지나치게 노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보 요원들의 공개적 활동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에 따라 그는 전임 원장이 확대해 놓은 공보 기능을 대폭 축소하고, 공보 담당자들에게 언론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라고 주문했다. 직원들에게 보안 강화 지시가 떨어졌으며, 명함 소지도 전면 금지되었다. 인터넷에 국정원 홈 페이지를 만드는 등 최대한 정보 투명화·공개화에 치중했던 이종찬 원장 때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천원장은 또 전임 원장 시절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던 국내 정보 파트를 오히려 강화하는 쪽으로 조직을 재편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대공정책실 기능 확대. 대공정책실은 대공 업무에다 과거 안기부의 101실(국내 정보 종합)과 102실(국내 정보 수집)까지 통합한 조직으로, 이원장 시절에는 대공정책실의 일부 업무를 다른 부서로 분산했으나, 천원장이 이를 모두 환원하고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언론단’도 공보보좌관실로 떨어져 나갔던 언론 대책 기능을 대공정책실 산하로 다시 편입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것이다. 국내 정보 관련 분야를 이렇듯 대공정책실로 집중하는 데에는 정보 가공 능력을 높여 질을 향상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와 함께 국내 업무에서 잔뼈가 굵은 엄익준씨를 국내 담당 차장에 기용한 것도 국내 정보 강화라는 분석이다. 그 결과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국정원 보고 내용에는 최근 상당한 변화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여권의 한 소식통은 “이원장 때는 해외·대북 정보와 국내 정보 비율이 8 대 2 정도였으나, 지금은 국내 정보 비율이 훨씬 높아진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DJ는 강력한 국정원 원한다”

그렇다면 천원장은 왜 세간의 의심을 감수하면서까지 국정원의 모습을 바꾸는 것일까? 이에 대해 여권 한 핵심 인사는 대통령의 뜻과 천원장의 스타일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강력한 국정원’을 원하고, 이를 천원장이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그는 개각을 목전에 둔 시점에 대통령이 한 핵심 측근에게 한 말을 전했다. 김대통령이 “(나라가 바로 서려면) 누군가 매를 들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심경을 토로했는데, 이 ‘매 들 사람’이 바로 국정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김대통령은 왜 매를 들 기관이 필요하다고 인식했고, 그 기관으로 국정원을 택했다는 것인가. 그 배경을 이해하려면 최근 김대통령이 처했던 정국 상황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김대통령은 새로운 개혁 집행 기관이 필요했다. 당초 김대통령은 검찰을 통한 개혁을 구상하고 추진해 왔다. 검찰을 개혁 집행의 칼로 상정한 것은 바로 ‘법’을 통해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자연히 국정원은 뒷전으로 밀렸다. 과거 정권에서도 검찰이 사정 전면에 나서면 안기부는 상대적으로 뒤로 물러서 있었다. 검찰이 통치권 활용에 주무기로 동원된 문민 정부의 예가 대표적이다. 게다가 김대통령은 야당 생활을 오래 하는 동안 안기부에 대해 줄곧 부정적인 인식을 키워 왔다. 국민의 정부 출범 초기에 내막이 공개된 안기부의 북풍 조작 기도는 안기부에 대한 김대통령의 부정적인 인식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 때문에 DJ에게 안기부는 개혁 도구라기보다 개혁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국민의 정부 1기를 거치는 동안 상황이 급변했다. 당장 검찰권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대전 법조 비리 파동을 거치면서 검찰 내부의 위계 질서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옷 로비 사건이 터지면서 검찰에 대한 국민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 야권과 시민단체가 사사건건 검찰의 수사 결과를 물고늘어져, 마침내 검찰에게 최대 치욕이라고 할 수 있는 ‘특별 검사제’ 도입이 임박했다. 이제는 대통령이 검찰을 개혁 수단으로 더 활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청와대의 사정 기능은 유명무실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정수석실이 부활하기는 했지만 사정 기능은 빠져 있고, 법무비서관이 관장하던 경찰청 사직동팀은 옷 로비 사건을 거치면서 완전히 외부에 노출되었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설상가상으로 법 집행의 양대 산맥인 검찰과 경찰은 노골적으로 싸우고 있다. 헌정 사상 초유의 검·경 전쟁이 통치권자 앞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DJ의 한 핵심 참모는 “대통령이 국정원에 회초리를 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정치의 계절을 앞두고 김대통령이 점점 더 많은 국내 정보를 필요로 한다는 점도 국정원의 변신을 강요하고 있다. 집권 1기 때만 해도 김대통령의 최대 관심사는 IMF 탈출과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었다. 이에 따라 국정원 안테나도 주로 해외 경제 정보와 북한 동향, 그리고 대북 햇볕 정책에 대한 주변 강국의 입장을 수집하는 쪽으로 쏠렸다.

하지만 집권 2기에 들어서면서 김대통령의 주요 관심사는 국내 정치 쪽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참모들은 그 이유를 경제 위기의 급한 불을 어느 정도 껐고, 햇볕 정책도 우여곡절을 겪고 있지만 일정 부분 궤도에 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국내 정치가 안정되지 않는 한 경제 회생이나 대북 관계 개선,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4강 외교 성공 같은 굵직굵직한 업적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을 절감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그도 그럴 것이 김대통령이 지난 1년간 쌓은 경제·외교 분야의 업적은 ‘옷 사건’ 하나로 완전히 무너졌다.

게다가 올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정치의 계절이 시작된다. 8월말 내각제 개헌 함구령이 해제되는 것을 기점으로 내각제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고, 선거구제를 포함한 정치 개혁 협상, 국민회의와 자민련 전당대회가 기다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정치권의 동요와 이합집산이 불가피한 정황이다. 따라서 집권 중반기에 정국 주도권을 장악해야 하는 김대통령으로서는 정치판을 정확히 꿰뚫을 고급 정보가 필요했고,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기구는 결국 국정원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실제로 김대통령은 올해 들어 부쩍 소소한 정보까지 챙겨주기를 국정원에 요구했으며, 이를 꺼려한 이종찬 원장과의 사이에 한때 불편한 기류가 형성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김대통령이 2기 국정원장으로 천용택 국방부장관을 임명한 배경에는 바로 그런 불만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5·24 개각 직전까지만 해도 이종찬 원장 유임이 유력하게 점쳐졌다. 본인이 유임을 희망했고, 대통령도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원장은 ‘정치인 전원 복귀’ 항목에 걸려 교체되었다. 결국 이원장의 정치 행보가 조기 교체 사유가 되었다는 의미다. 아닌 게 아니라 이원장은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고려해 국정원장으로서의 행보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 정치적으로 오해를 살 만한 일은 가능한 한 피하려 애썼고, 공개·투명을 강조했다. 그는 김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비교적 냉정한 자세를 취했고, 정부가 현대그룹과 유착했다는 의혹을 무릅쓰면서까지 밀어붙인 금강산 관광에 대해서도 마뜩치 않다는 시각을 견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천원장은 같은 육사 출신 정치인이면서도 이원장에 비해 정치색이 훨씬 약한 대신 군 출신 특유의 충성심은 훨씬 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대목은 그가 지난 대선에서 김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점에서도 여실히 입증된다(24쪽 상자 기사 참조). 게다가 평소 그는 국정원이 최고 통치권자가 국정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도록 뒷받침하는 기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가 대통령직인수위원 시절 김대통령에게 제출한 ‘국가안전기획부 조직 개편 방안’이라는 보고서에는 ‘국민의 정부의 안기부 정책은 순수 정보기관으로 개혁하는 것과 최고 통치권자의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구로 재편하는 것이 동시에 요구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국정원이 이른바 ‘통치권 보위 기구’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인 셈이다. 국정원 간부 “정보기관은 음지로 돌아가야”

그는 또 인사 개혁 방안과 관련해 ‘부내의 특정 요직은 대통령에게 충성할 수 있는 요원을 배치해 안기부 장악 및 통치권 보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면서, ‘특정 요직’으로 국내 담당 차장, 기조실장, 101·102 실장 등을 꼽았다. 이 가운데 101·102 실장은 이종찬 원장 시절 대공정책실로 통합되었는데, 천원장은 취임 직후 국내 담당 차장·기조실장·대공정책실장을 모두 호남 출신으로 교체했다. 평소 지론대로 국정원을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기구로 재편한 것이다. 이는 곧 2기 국정원의 방향성을 짐작케 한다.

이런 ‘천용택식’ 국정원 운영 방식에 대다수 직원은 일단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이제야 국정원이 정보기관으로서 제 위치를 찾는다는 반응이다. 한 중간 간부는 “이원장이 국정원의 어두운 이미지를 벗기고 시스템을 현대화하는 데는 기여했지만, 기관 내부 사정을 지나치게 노출시켜 정보기관 특유의 보안성을 훼손했다. 정보기관은 모름지기 음지로 돌아가야 제격이다”라고 주장했다.

다른 간부는, 국정원이 정치 공작의 주범으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과도(果刀)론’으로 응수했다. “과일 깎는 데 쓰이는 칼이 어쩌다 강도짓에 쓰였다고 아예 호미로 만들어 버리면, 과일을 깎아야 할 때는 쓸 수가 없다. 칼은 항상 칼답게 손질되어 있어야 하며, 국정원이 요즘 정보기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라는 설명이다. 그는 또 이 칼을 과일 깎는 데 쓸지 강도짓에 쓸지는 전적으로 사용자(대통령)에게 달렸으므로, 문제가 생기면 사용자를 탓해야지 칼 자체를 탓해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국정원 내부의 지역 갈등 ‘심각’

표현 방식에는 약간씩 차이가 나지만 여권 핵심부와 국정원은 한결같이 2기 국정원의 변화를 ‘정상화’로 보아 달라고 주문한다. 정치인 원장을 만나 잠시 궤도를 벗어났던 1기 국정원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지, 정치 공작과 정치 사찰에 앞장섰던 군사 독재 시절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국정원이 여전히 정치에 악용될 소지가 많다고 우려한다.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정권 교체 이후 더욱 심각해진 국정원 내부의 지역 갈등이다. 호남 출신 요직 배치로 형성된 ‘호남 득세, 영남 열세’ 구도는 국정원이 지역간 권력 투쟁의 장으로 변질될 우려를 낳고 있다. 현정권 들어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국정원 기밀 정보 야당 유출 사건은 이런 지역 갈등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과거에 내부 정보를 유출해 정치적으로 활용했던 직원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는 점도 ‘국정원 바로 서기’를 저해하는 걸림돌이라는 지적이다. 국내 정보를 담당하는 한 직원은 “내부 정보 유출자는 비록 DJ 당선에 기여한 직원이라도 과감히 옷을 벗게 해야 한다”라면서, 그래야만 국정원이 정치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국가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천용택 체제 한 달 만에 불거진 ‘국정원 안기부 회귀’ 논란이 태풍급으로 발전할지 그냥 사그라들지는 결국 김대통령이 국정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국정원의 변신이 ‘칼 다운 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인지, ‘정권 호신용 칼’로 전락하는 과정인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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