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경비 한국군, 북측과 몰래 접촉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8.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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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추적 확인/김 훈 중위 의문사와 깊은 관련… 월북 등 이적행위 해온 부소대장
지난 11월20일께 <시사저널>은 9개월 동안 추적해 온 판문점 경비대대 2소대장 김 훈 중위 의문사사건에 대한 오랜 취재를 마무리지었다. 김중위는 98년 2월24일 벙커에서 총격에 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후 군 수사 당국은 ‘자살’이라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으나 <시사저널>이 추적한 결과 사인(死因)은 권총 타살이고, 범행 동기는 이적 행위가 탄로난 부하가 적(북한)의 지령을 받아 상관을 살해한 사건으로 판단되었다. 살인 용의자는 같은 소대의 부소대장 김 아무개 중사. 그러나 <시사저널>은 이같은 사실을 확인하고도 곧바로 보도하지 않았다. 군 검찰의 재수사가 진행 중인 데다 섣불리 공개할 경우 관련자가 이적 행위 증거를 인멸하고 도주하거나 보복 후 월북하는 등 국가 안보와 관련된 불상사를 일으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지난 11월27일 육군본부(육본) 고등검찰부는 5개월간 진행해 온 김 훈 중위 사망 사건 재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놀랍게도 부대에 별 문제가 없고, 타살 동기도 없었기 때문에 ‘격무와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이라는 결론이었다. 1차 수사 당시 결론인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살’에서 바뀐 것이 있다면 자살 동기뿐이었다.

<시사저널>, 국회의원·변호인단과 공동 추적

군 검찰 발표가 자살로 나오자 <시사저널>은 그동안 공동 추적 작업을 벌여 온 국회 국방위원회‘김 훈 중위 사망 진상 규명 소위원회’(위원장 하경근 의원)와 천주교인권위원회 변호인단 등과 함께 모든 내용을 국회 소위원회 활동으로 수렴시켰다. 12월 들어 국회 소위원회가 가동되었는데, 핵심 내용은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비공개 회의 첫날인 12월3일 밤 비밀리에 군인 한 사람이 국군기무사에 체포되었다. 이적 행위 및 ‘적의 지령을 받은 상관 살해’ 용의자 김 아무개 중사였다. 김중사 체포는 한영수 국방위원장이 천용택 장관에게 연락해 증거를 제시한 후 이루어졌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위원회는 12월9일까지 판문점 사건 현장 조사 등을 마치고 언론에 사건 전모를 브리핑하기로 했다.

<시사저널>이 사망한 김 훈 중위의 부대에 엄청난 ‘안보상 문제점’이 내재해 있음을 발견한 때는 지난 9월이었다. 당시 미국 뉴욕 주 정부 소속 법의학 권위자 루이스 에스 노(한국 이름 노여수) 박사가 김 훈 중위의 법의학적 ‘타살’소견을 발표하자, 이를 보도(제464호)한 이후 새로운 증거를 추적하던 <시사저널>은 사건 현장에 있던 권총 번호가 김 훈 중위 본인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내 후속 보도(제467·468호)했다.

군 검찰은 여기에 충격을 받아 처음으로 권총 번호 조사에 매달렸고, 유족측과 <시사저널>은 김 훈중위 부하 장병들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사건 당시 판문점에 근무했던 김중위의 부하 병사 10여 명이 전역한 뒤였다. 이들을 각각 2∼3차례씩 개별 접촉한 결과 다음과 같은 놀라운 진술들이 쏟아져 나왔다.

“부소대장(김중사)은 판문점(BRF)에서 근무할 때 1주일에 1~3 차례 야밤에 군사 분계선을 넘어 적초소(1초소)로 가서 2∼3시간씩 머무르다 선물 보따리를 들고 나타났다. 스위스 감독 장교가 잠든 오전 1시쯤 넘어갔고, 넘어갈 때 적 2명이 엄호했다.”(이○○ 병장)

“부소대장이 월북했다가 받아 온 물건은 주로 용성흑맥주·인삼주·외제 의약품 등이었다. 술은 상황실에서 나눠 마시도록 하고, 병은 수거해 막졸(신참병)들 특박용으로 배분했다.”(박○○ 병장)

“부소대장이 간첩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말을 꺼냈다가는 소대원 전체가 기무사로 넘어갈까 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소대장은 술에 취해 돌아와도 적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김○○ 상병)
“김중위 사망 직전, 북측 협박 있었다”

‘소대장님을 지키지 못해 죄책감에 시달린다’며 눈물을 떨군 한 제대병은 이렇게 증언했다. “북한군 변용관 상위 귀순은 소대장님 죽음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2월3일 변용관이 귀순한 뒤 우리 소대원들은 정전 회담 내용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북측에서는 우리가 총으로 위협해 변용관을 끌고 갔다며 송환하라고 우겼으나 우리측이 귀순했다고 버티자 ‘돌려 주지 않으면 반드시 보복하겠다. 한국측 장교를 죽여서라도 끌고 오겠다’라고 협박했다는 설명이었다. 그 뒤 소대장님이 사망했다.”

그는 이어 ‘김 훈 중위가 지휘하던 2소대원들이 판문점 근무를 서던 2월16일께 부소대장이 한 차례 월북했다가 돌아온 일이 있다’고 밝혔다. 변용관의 귀순으로 양측이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을 무렵 김중사가 야음을 틈타 월북한 후 돌아왔다는 증언은 ‘모종의 지령’을 받았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 그로부터 1주일쯤 지난 뒤 김 훈 중위는 벙커에서 의문의 시체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소대원들, 양심 선언서 형식의 글로 증언

취재진이 만난 소대원들은 한결같이 이런 내용을 진실이라고 강조했으며 일부는 자필로 ‘양심 선언서’ 형식의 글을 써 주기도 했다. 이들은 조심스럽게 일부 사병들의 북측 공작원 접촉 실상도 털어놓았다. 사병의 경우 감히 월북은 생각하지 못하고 주로 판문점내 2초소와 북측 4초소가 마주보는 군사 분계선(MDL) 선상에서 몰래 만나 북으로부터 선물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선물은 주로 담배와 술, 김일성 배지, 공화국 국기 배지, 세계청년학생 축전 배지, 북한 발행 서적, 일제 시티즌 시계, 롤렉스 시계(천만원 상당) 등이었다고 한다.

북측 공작원들이 주는 선물은 친숙 단계(북한측으로서는 포섭 단계)에 따라 달라진다. 보통 한번 만날 때마다 20분 정도 얘기를 해주어야 담배 한 갑을 주며, 다섯번 정도 만나면 술과 배지, 열번 정도 접촉하면 책·시계 등을 준다고 한다. 이같은 접촉이 2소대원들 사이에 가장 많이 발생한 것은 부대를 장악하고 있던 부소대장이 적진을 드나드는 마당에 거리낄 것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측은 이렇게 접촉한 병사를 모두 촬영해 두었다가 말을 듣지 않을 경우 ‘협박용’으로 사용한 적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에 대해 양심 고백을 한 한 사병은 “일병 때 야간 근무 중 고참과 초소 이동을 하는데, 북측 병사가 MDL 부근에 와서 편지를 돌멩이에 매달아 던졌다. 편지 내용은‘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남쪽 친구들에게 알려서 우리 사이를 폭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고참은 한동안 이 문제로 고심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부대 상층부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일까? 2소대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적어도 부대 상급자(전임 소대장, 당시 중대장 김 아무개 대위, 당시 대대장 미군 루펜버그 중령)는 부대원들이 북측 경비병들과 접촉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중대장은 2소대원들이 유난히 북한 선물(적 습득물)을 많이 가져오는 데 대해 치하했고, 특박을 많이 보내기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한번은 부대 내무반 검열에서 김일성 배지와 북측이 보낸 편지 등이 발견되어 소대원 3명이 조사를 받았는데, 북측 병사를 통해 습득했다고 경위서에 써서 제출하자 중대장은 깜짝 놀라 불태우라고 지시하고 ‘지시 불이행’ 죄목으로 보름씩 영창을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국가 안보의 상징적 보루라 할 판문점 경비에 총체적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던 셈이다. 김 훈 중위는 이런 실정을 모른 채 소대장에 취임했다가 엄청난 비리를 파악했고, 그로부터 불과 한달 만에 싸늘한 시신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군 수사 당국은 두 차례나 수사를 벌이고도 부대에 내재해 있던 엄청난 대공 혐의를 밝혀내지 못했던 것이다.

육군본부 고등검찰부가 수사 결과로 제시한 소대원들 및 살인 용의자(부소대장)의 알리바이(현장 부재 증명)를 보면 군 수사팀이 처음부터 용의자에게 얼마나 농락당했는지 알 수 있다. <시사저널>과 국회 국방위 소위원회·천주교인권위 변호인단이 공동 추적한 바에 따르면, 사건 초기 현장 상황과 알리바이는 사실상 용의자인 부소대장의 장악 아래 있었다.

용의자 김중사, 사건 현장 장악하고 알리바이 조작

부소대장은 사고 현장인 벙커3을 가로막고 소대원들 출입을 막은 뒤 벙커 입구의 땅을 만지며 화약냄새가 난다는 둥 의심스런 행위를 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후 군 수사는 김중사의 알리바이를 인정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이런 사실은 역시 전역병들의 양심 고백으로 밝혀졌다.

전역병들에 따르면 사건 당일 김 훈 중위 사망 추정 시간은 오전 10시35분부터 11시 사이이다. 11시께에는 밥차가 올라왔고, 최초 시신 발견 시간은 11시20분께였다. 그런데 두 차례의 군 수사에서는 이미 사망한 김중위가 11시50분께까지 살아 있었던 것처럼 되어 있다. 밥차가 온 시간은 12시5분이며 시신 발견 시간은 12시20분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군 수사 내용은 소대원들을 집합시켜 놓고 쓰게 한 진술서를 토대로 한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지 1개월 후쯤 2소대를 찾은 1군단 헌병대 수사팀은 타살 방향의 수사를 사실상 포기한 채 소대원 전원을 한자리에 불러놓고 서로 상의해 가며 그날 행적을 쓰도록 했다. 이 자리에는 중대장 김 아무개 대위도 참석해 ‘이미 자살로 결론이 난 사건이니 서로 상의해서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그때 용의자인 부소대장이 ‘내가 사고 현장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12시29분이었다’고 소대원들에게 강조했다. 이 말이 곧 ‘기준 시간’이 되어 대부분의 소대원은 이 시간을 기준으로 역산해 자기 알리바이를 써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2개월간 공동 추적팀이 전역병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그날 자기 행적과 활동을 기준으로 다시 진술케 하고 대질시킨 결과, 모든 상황 전개가 김중사가 정해 준 기준 시간에서 무려 1시간 여씩 차이가 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결과는 용의자 김중사의 알리바이를 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김중사는 그동안 사건 당일10시부터 11시50분까지 소대장실에서 워드 작업을 했고, 11시45분에 소대장이 ‘나, 나가요’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갔다고 강조했다. 대신 소대장이 방에 들어온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워드 작업을 했다는 컴퓨터를 분석한 결과 마무리 시간은 오전 9시56분이었다. 결국 10시 이후 김중사의 알리바이는 깨진 셈이다.

물론 김중사와 김 훈 중위의 그날 행적에 대해서는 더욱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공범이 있을 경우 그 공범이 김중사의 알리바이를 맞춰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건 당일 김 훈 중위 사망 현장 부근에는 또 다른 이적 행위 혐의자가 근무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한편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미국 뉴욕 주 정부 소속 법의학자 루이스 에스 노 박사의 소견으로 보아 김 훈 중위가 자살로 교묘히 위장된 타살자 시신의 전형이라는 점은 <시사저널>이 이미 보도한 바 있다. 루이스 에스 노 박사는 군 검찰의 재수사 발표 직후 수사 자료를 입수해 미국내 권총 수사 전문가들과 토론을 벌인 끝에 ‘명백한 타살’임을 재확인했다는 추가 소견서를 국회 국방위 소위원회와 <시사저널>에 보내 왔다.
군 검찰, 대공 혐의 놓친 채 ‘자살’ 판정

이같은 여러 타살 동기와 정황, 알리바이 문제, 법의학적 진실 외에도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바로 지난 9월 말 <시사저널>이 보도했던, 현장에서 발견된 권총의 정체이다. 김 훈 중위가 소지한 권총은 M9 베레타 1140862번인데 사건 현장에서는 1140865번이 발견되었다. 군 검찰은 이에 대해 김중위의 권총이 2월9일 고장 나는 바람에 5일 간의 초소 근무에 들어가던 2월20일 순번에 따라 김 아무개 일병의 권총인 1140865번을 받아갔다고 밝혔다(1140864번 권총은 고장 수리 중이었음). 군 검찰은 그 근거로 2월20일에 수기(手記)로 작성된 ‘권총 불출 대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대장을 판문점 근무 병사들에게 확인한 결과 도착 순서가 뒤바뀐 데다 동일인의 필체인 것으로 보아 조작된 서류라는 일치된 증언을 얻었다. 문서 감정이 필요한 서류인 것이다.

그 뒤 ‘권총 불출 대장’을 추적한 결과 김 훈 중위의 1140862번 권총은 이미 수리를 끝내고 2월14일부터 19일까지 김중위 본인이 판문점 근무시 착용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2월20일 초소 근무에 들어갈 때 다른 사람의 권총을 지급받아야 할 아무런 이상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반면 놀랍게도 2월19일 부소대장인 김중사의 1140863 번 권총은 고장이 나서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기재된 사실을 발견했다. 결국 김중사는 다음날 반드시 다른 권총을 소지할 수밖에 없었고, 군 검찰의 논리대로라면 김중사는 순번에 따라 1140865번을 가져갔어야 한다.

결국 김 훈 중위 사망 사건은 그동안 공동 추적팀이 조사해 온 모든 증거·증언·양심 선언·서류 등으로 보아 이적 행위자에 의한 타살로 판단된다. 두 차례에 걸친 군의 수사 결론이 자살로 나온 것은 판문점 경비대에 내재해 있던 이같은 엄청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초동 수사 단계에서부터 부대 전체가 대공 측면에서 ‘사고 부대’였다는 사실을 놓치다 보니 수사팀은 객관적 입장에서 살해 동기와 대공 혐의 등을 스스로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태에 대해 국방부의 한 법무 당국자는 “그렇게 많이 수사하고도 부대내 대공 혐의점을 놓친 것은 기본적으로 실패한 수사였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방 당국이 이 사건 수사 과정에 대해 어떤 변명을 내놓든 김 훈 중위 사망 사건 수사는 군대내 인권 문제뿐 아니라 구멍 뚫린 안보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충격이 아닐수 없다. 따라서 혼선을 거듭해온 이 사건을 정예 대공 수사팀으로 하여금 조속히 매듭짓게 하고, 국민에게 충격을 안긴 책임을 지는 것이 국방 당국에 남은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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