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 ‘이회창 흔들기’ 시동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1997.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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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 충격 벗어나 이회창 흠집내기 시동… 충청권 의식한 자민련이 더 적극
‘이회창 대표’ 소식을 접한 야권의 반응은 충격과 긴장으로 요약된다. 최고 강적의 키가 성큼 자랐기 때문이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여당 대권 주자 가운데서도 이대표를 가장 두려운 적수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야권은 김대통령이 설마 이대표에게 대권 후보 자리를 내주겠느냐며 자위하곤 했다. 오히려 이대표가 탈당해 여권이 분열하거나, 내각제를 고리로 이대표와 연대할 수도 있다는 소망을 키워 왔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김대통령이 이회창 카드에 잔뜩 힘을 실어준 것이다. 국민회의의 한 당직자는 ‘뒷목이 뻣뻣해졌다’는 말로 극도의 긴장감을 표현했다.

‘이회창 파일’ 보강에도 주력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야권의 분위기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강적이 일찌감치 링에 올랐으니 그만큼 상처 입힐 시간도 많아졌다는 얘기다. DJ의 한 측근은 “15회전 경기에서 마지막 1,2회를 남기고 이대표가 등장했다면 DJ에게는 정말 버거운 상대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경기 초반에 나왔으니 충분히 힘을 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부담스런 KO승을 노리지 않고 잽으로도 이길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는 의미다. 대선 주자에게 9개월은 9년과 같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야권은 대표 지명 발표가 나자마자 이회창 흔들기에 들어갔다. 첫번째 공격 대상은 이대표의 ‘말 바꾸기’. 국민회의 유종필 부대변인은 논평에서 “이대표는 이한동 고문이 대표 물망에 올랐을 때는 당 대표의 경선 출마 불가를 주장하더니 막상 자신이 대표가 되자 이들 문제는 별개라고 주장한다”라면서 남에 대한 원칙과 나에 대한 원칙이 다르냐고 꼬집었다. 자민련 안택수 대변인도 “우리는 이대표의 답변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면서 대쪽이 수양버들로 변신할 수는 없지 않는가라고 비꼬았다.

이대표에 대한 포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야권은 이회창 파일을 보강하는 일에도 당력을 모으고 있다. 이회창 파일이란 이대표의 경력·어록·가족 사항 등 공적·개인적인 행적을 집대성한 자료 모음으로 언제든지 공격용으로 활용될 수 있는 무기다. 국민회의의 한 고위 간부는 5단계 공격 포인트를 귀띔했다. 법관에서 중앙선관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거쳐 본격 정치인이 되기까지 이대표가 대통령과 가까워진 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그때그때의 모순된 행적을 집요하게 짚어낸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대표 거품 걷어내기 작전이다.

이회창 흠집내기라는 목표는 같지만, 공격의 완급에서는 당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국민회의는 일단 이회창 흔들기에 앞장서지는 않는다는 전략이다. 자칫 맞으면서 크는 역효과가 날 수 있으므로, 여권 내부의 집안 싸움부터 지켜본다는 분위기다.

상대적으로 느긋하게 마음을 먹는 국민회의와 달리 자민련은 처음부터 공격 수위를 높게 잡았다. 여권을 비판하는 일에서는 대체로 국민회의를 뒤쫓아가던 자민련이 이대표 문제에만은 앞장서서 집중 공세를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자민련의 한 당직자는 절박한 위기 의식 때문이라고 말한다. 충청도 출신인 이대표에게 힘이 쏠리면 자민련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당내에 팽배하다는 것이다. 비록 여당이기는 하지만 충청도 출신인 박희부 전 의원과 이재환 의원이 노골적으로 이대표에게 줄서는 모습을 보면서 자민련의 불안감은 극에 달하고 있다. 더욱이 TK 맹주 격인 김윤환 고문이 일찌감치 이회창 대세론을 펴고 있어 당 안팎의 TK 동요도 걱정된다.

야권의 이회창 흔들기는 집요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를 벼랑 끝까지 몰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을 미루고 있다. 이대표가 김대통령의 마지막 카드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대표와의 싸움에 힘을 다 쏟고 나면 또 다른 복병이 등장했을 때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드러난 이대표와 싸우는 한편, 드러나지 않은 숨은 카드가 있는지를 파악하고 대비책을 세우는 것. 이대표의 등장은 야권에 이 두 가지 과제를 던져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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