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안은 중국의 ‘만만디’ 속셈
  • 북경·李興煥 특파원 ()
  • 승인 1997.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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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문제에 비중 키우는 계기 삼을 듯…북한 의식해 ‘황장엽 한국 직행’ 불허 가능성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가 주중 한국대사관 영사부 별관에 들어가 망명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접한 중국 고위층의 최초 공식 반응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사건 발생 이틀 후 싱가포르에서 유종하 외무부장관을 만난 전기침(錢其琛) 외교부장이 한 말이다. 무역 마찰로 미국과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거나, 대만 해협에 미사일을 발사하고 일전불사 결의를 다지면서도 느긋한 태도를 취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중국은 외교에 관한 한 상대방에게 좀체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는다. 아무리 자신에게 켕기는 구석이 있더라도 겉으로는 늘 당당하고 떳떳한 태도로 일관한다. 하지만 황장엽 망명 사건은 경우가 다르다.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황장엽이 망명한 직후 중국 정부가 취한 초기 대응에서 중국 정부는 이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냄으로써 난감해 하는 기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황의 망명 사실이 알려진 것은 12일 오후 5시(중국 현지 시간)였다. 그때는 이미 황장엽이 한국 영사부 건물에 들어가 있을 때였다. 그러나 중국의 무장 경찰과 공안 요원들이 우리측 요청으로 북경 산리문 외교 단지의 한국 영사부 건물 주위에 배치되기 시작한 것은 2시간 35분이 지난 오후 7시35분부터였다. 이때만 해도 건물 경비는 삼엄하지 않았다. 단순히 외부 인사의 접근을 막는 정도였다. 황장엽 일행이 정말 영사부 건물 내에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경비는 허술했다.

무장 경찰이 늘고 영사부 별관과 한국대사관에 대한 경비가 강화되기 시작한 것은 사건이 발생한 지 만 하루가 지나서였다. 같은 시간에 한국대사관 직원들이 영사부에 옷가지와 음식을 대는 등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물론 중국으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다. 처음 겪기는 한국도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한국으로서는 예고된 망명이었기에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검토할 만한 여유가 있었다. 황장엽은 망명하기 전 한국과 접촉했다. 그가 망명하기 3일 전인 9일에는 주중 한국대사관의 한 고위 관계자가 극비리에 서울을 다녀오기도 했다. 따라서 황장엽이 북경의 한국대사관 영사부 건물로 들어가기 전, 즉 망명하기 전까지는 우리측의 ‘사전 계획’이 어느 정도 통할 수 있었다.

심정적으로는 북한에 한발짝 더 가 있어

황장엽이 망명한 이후 사건의 열쇠는 중국 손에 넘어갔고, 따라서 중국은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상황이다. 황장엽 망명 사건은 그런 점에서 중국에게는 이중의 의미를 띠고 있다.

중국이 취하고 있는 한반도 외교 정책은 자나깨나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다. 망명 사건이 난 뒤 한·중 양국의 첫 고위급 접촉이 된 싱가포르 외무장관 회담에서도 전기침은 예상했던 대로 이 말을 또 끄집어냈다. 남북한 어느 한쪽 편을 들어주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중국은 일단 초상집이 된 북한을 달래주어야 한다. 이번 사건이 아니더라도 중국은 북한을 도닥거릴 필요가 있었다. 미·북한 사이는 최근 고속으로 가까워지고 있다. 쌍방간 연락사무소 개설은 이제 시간 문제만 남았을 뿐이다. 혈맹 관계를 내세우던 중·북한 관계도 어떤 방식으로든 재정립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쉽게 ‘심각한 사이’로 발전하지는 못하겠지만 북한과 대만이 접촉하는 것도 중국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일이다.중국 처지에서 중·북한 관계는 중·한 관계보다 심정적으로 한 발짝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북경 시내에 있는 주중 한국대사관과 북한대사관의 규모 차이는 양자의 비중을 가늠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북한대사관이 1만2천평 대지 위에 널찍하게 자리잡은 반면, 한국대사관은 아직도 국제무역센터 건물의 2개 층을 빌려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

중국 영도자들이 발표하는 공식 문건에서도 북한이 늘 앞자리이다. ‘중·조 관계는 전통과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한 관계는 경제 발전을 더욱 가속화한다’는 식이다.

糧油(양곡과 석유)로 대표되는 북한의 전략 물자를 거의 무상으로 대주는 곳도 중국이고, 군사 교류 측면에서도 우의가 돈독하다. 중국 인민해방군 창군 70돌을 맞는 올해, 북한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한국전)에 참전했던 인민해방군 참전 용사들을 대거 북한에 초청하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안승운 목사 사건이나 연길 기아연수원 박병현 이사 피살 사건에서도 중국은 북한에 자극을 줄 만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중국의 이런 태도를 우리 정부는 거의 수용하는 입장만 취했다. 중국을 자극하기는커녕 굴욕 외교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늘 중국식 외교 관행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황장엽 망명 사건은 또 한번 이런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커졌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중국 입장이 그런 조짐을 보여준다. 물론 중국식 의사 결정 관행이 긴 시간을 요하는 것은 사실이다. 최고위층의 특정 인물이나 외교부 내에서 단독으로 처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외교부는 물론 당중앙 판공실을 비롯해 공안부·선전부·안전부 등 유관 부서들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또 합의가 도출되기 전까지는 결코 서두르지 않으며, 합의 진행 과정을 절대 외부에 드러내지 않는 것도 중국 특유의 의사 결정 방식이다.

‘2개의 코리아’ 원칙 이번에도 적용할 듯

현재 중국측 협상 책임자는 당가선(唐家璇) 외교부 부부장(59)으로 남북한의 집중 로비 대상이다. 그는 북경 대학 출신으로 한·중 수교 교섭에도 깊이 간여한 인물로 알려졌다. 외교부내 한반도 정책은 그의 손을 거쳐 입안될 정도로 비중이 크다. 당부부장과 함께 황씨 망명 사건을 담당할 핵심 인사는 외교부에서 아시아 문제를 총괄하는 왕의(王毅) 아주사 사장(아시아 국장·44)이다. 일본 대리대사를 지낸 그는 95년 최연소로 현재의 국장급 자리에 올라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는 매사에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당부부장과 왕사장말고도 황씨 망명 사건을 맡을 중국측 실무진으로는 영부괴(寧賦魁) 아주사 부사장과 田寶珍 처장(과장)이 있다. 그들은 모두 평양 김일성대학 출신으로 한국어에 능통하다고 한다.

중국은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곤혹스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 문제가 대두할 때마다 중국은 자신의 존재를 부각하곤 한다. 미·북한 접촉, 남북한 접촉 등 한반도와 관련된 모든 사안에 중국은 상대국의 주권을 존중한다는 외교 원칙을 내세워 짐짓 3자의 입장을 취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미국 못지 않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황장엽 망명 사건은 중국에게 ‘즐거운 고민’을 안겨준 셈이기도 하다.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의 비중을 다시 한번 부각할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작 난감해 하는 쪽은 미국이다. 중국위협론 등으로 중국의 행동 반경을 제한하면서 중국보다 한발짝 앞서 한반도 문제를 주도적으로 이끌려는 미국의 한반도 전략에 황장엽 사건이 돌출 변수로 등장했다.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 변수’가 새삼 부각되면서, 미국의 한반도 외교 전략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니콜라스 번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4자회담과는 별개 문제이며, 일반 국제 관례대로 처리되기를 희망한다’고 처음 입을 열었다. 신중한 입장이기는 하지만 황장엽 망명 사건이 4자 회담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남북한이 똑같이 ‘하나의 중국’ 정책을 취하고 있는 데 반해, 중국의 한반도 외교 전략은 ‘2개의 코리아’이다. 황장엽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중국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는 그리 넓지 않다. 2개의 코리아라는 외교 전략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앞으로 황씨 망명 사건에 어떤 결론을 내릴지 속단할 수 없다. 다만 전통 우방인 북한의 입장을 최대한 배려하는 모양새를 갖출 가능성이 높다. 즉 최소한 곧바로 한국으로 보내는 방식은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현재 중국이 황을 일단 제3국으로 추방하거나, 아니면 북경에 주재하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을 통해 제3국행을 추진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아직은 설일 뿐이다. 중국은 서두르지 않고 있다. 황장엽 일행이 북경 한국 영사부에 체류하는 시간과 서울에 도착하기까지의 시일이 길어진다 해서 중국이 손해볼 일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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