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우외환 최병렬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r)
  • 승인 2004.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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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이 위태롭다. ‘차떼기·서청원 탈옥’에 공천 내홍까지 겹쳤다. 당 내에서는 최병렬 대표의 문제투성이 리더십이 이같은 위기를 불렀다는 목소리가 높다. 소장파 의원들은 총선 승리를 위해 ‘최대표 제거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최근 자주 드는 비유가 하나 있다. 지난 2월12일 상임운영위원회에서, 또 기자들과 자택에서 만났을 때 최대표는 이 비유를 들어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옛날 한 부부가 오랜 고생 끝에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그 아들이 풍진에 걸려 죽었다. 부인이 대성통곡을 하고 난리가 났는데, 남편은 담뱃대만 물고 가만히 있었다. 부인이 화가 나 당신은 사람도 아니라고 하니, 남편이 마당에 가래를 탁 뱉었는데 가래가 아니라 핏덩이가 나왔다.”

최대표는 한나라당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누구보다 고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대표가 아직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한나라당 위기의 본질은 ‘병에 걸려 죽은 아들’이 아니고 바로 최대표 자신, 즉 리더십의 위기라는 점이다. 홍사덕 원내총무나 박진 대변인 등 주요 당직자가 잇달아 사의를 표명한 것도 최대표의 리더십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최대표의 측근인 윤여준 여의도연구소장은 지난 1월 말 “환자가 자기가 아프다는 사실은 아느냐”라고 경고한 바 있다. 환자가 아프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면 처방이 나올 리가 없다는 것이다. 당 내에서 대표적인 전략통인 윤의원은 홍준표 의원 등 재선 그룹에 밀려 최대표의 자문에 응하는 것으로 역할이 제한되어 있다.
최대표는 이처럼 빨간불을 켜는 사람들을 “그런 시각도 있고…”라고 애써 무시하며 최근까지 낙관론에 젖어 있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사람만 바꾸면 된다는 ‘물갈이 환상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설을 전후해 영남권을 둘러본 최대표는 기자와 만나 “얼마나 사람을 바꾸는지 두고보겠다는 것이 핵심이다”라고 영남 민심을 분석했다.

최대표가 해묵은 여론조사 독해법을 맹신하는 것도 한 이유이다. 최대표는 한나라당 지지층이 일정하게 빠져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50∼60대 투표율이 높은 것을 감안한다면 실제 지지도는 그렇게 낮지 않다고 보았다. 정가에서는 최대표와 평소 친분이 있는 한 여론조사 기관 책임자가 최대표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 나온다.

최대표의 별명은 ‘최틀러’다. 강한 추진력과 순발력을 갖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나라당 어느 누구도 이 별명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오히려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알 수 없다며 고개를 흔든다. 최대표가 말은 그럴듯하게 하는데 실현한 것은 별로 없다며 ‘코멘트 정치를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사실 최대표는 총선 후보자들을 대폭 물갈이하겠다고 소리 높여 외쳤지만, 한나라당이 영입한 인사 가운데 딱히 내놓을 만한 비중 있는 신진 인사는 눈에 띄지 않는다.

지난 2월9일 서청원 전 대표에 대한 석방결의안이 통과된 이후에는 ‘양다리 리더십’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서청원 석방결의안이 통과된 전후 과정을 살펴보면 왜 그런 비판이 나왔는지 알 수 있다. 그 날 아침 상임운영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최대표는 “개인적으로는 오늘 처리하는 것이 속이 편하지만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라며 명확한 판단을 유보했고, 의사 일정에 올리지 않겠다는 홍사덕 원내총무의 의견을 묵인했다.

그러나 박종희·맹형규 의원 등이 지도부의 의견을 뒤엎고 본회의에서 ‘의사 일정 변경안’을 제출해 서청원 석방결의안을 추진했지만 최대표는 제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대표도 찬성표를 던졌다. 최대표는 여론이 좋지 않게 돌아가자 “서의원과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 그런 것까지 막으면 ‘사이가 좋지 않아 저러는구나’라고 나를 옹졸한 사람으로 볼까 봐 막지 않았다”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최대표가 지도자라면 국민 편에 설 것인지 서의원 편에 설 것인지를 확실히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최대표가 어영부영 눈치를 보다가 결국 양쪽으로부터 다 비난을 사는 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서청원 사건’은 한나라당 지도 체제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자 유권자들에게 한나라당을 찍지 말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분석했다. 남경필 의원은 “당이 도덕불감증·민심불감증에 걸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도부가 헛발질만 하며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하니 전략이 나올 수가 없다”라고 비판했다.

최대표의 상황 인식은 2월11일 남경필·오세훈·원희룡·정병국 의원 등 한나라당 소장파가 “최대표는 죽어야 산다는 자세로 당의 재창당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라”고 주장한 것을 계기로 변화했다. 2월11일 저녁 자택으로 최대표를 찾아간 임태희 비서실장·김문수 공천심사위원장·윤여준 여의도연구소장 등은 ‘총선 불출마’를 포함한 자기 희생을 통해 전면적으로 당을 혁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최대표에게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처음에는 ‘이대로 가면 이번 총선에서 참패한다’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집어던지며 이들과 격론을 벌이던 최대표는 3시간여에 걸친 대화를 통해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하지만 해결 방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인사는 “최대표의 리더십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3월에 전당대회를 열어 간판을 갈고 분위기를 일신해야 한다. 만약 최대표가 이를 거부하면 젊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장파도 이 인사와 비슷하게 인식하고 있다. 최대표가 퇴진하는 것이 소장파가 내세우는 핵심 목표는 아니다. 그렇다고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남경필 의원은 “최대표가 스스로를 얼마나 많이 버리느냐에 따라 소장파의 행보가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가 느끼는 위기 의식의 저변에는 낙선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 이들은 ‘차떼기당’에 이어 ‘서청원 탈옥당’ 이미지가 겹쳐 도무지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는 하소연과 분노를 당 지도부를 향해 쏟아내고 있다. 살기 위해서는 인기도 높지 않고 대권 후보도 아닌 ‘최병렬’이라는 걸림돌을 제거하자는 쪽으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다. 한나라당 소장파는 지금 총선을 치르면 수도권에서 한나라당 후보의 90%가 진다는 한 국가 기관의 조사 결과에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에서는 불과 세 곳에서만 한나라당이 이기는 것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준표 전략기획위원장을 비롯한 주류 그룹 일부와 상당수 중진 의원들은 최대표가 불출마하거나 퇴진하는 것에 반대한다. 오히려 최대표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홍의원은 “선거를 두 달 앞두고 대표를 바꾸자는 것은 해당 행위이다. 당명을 바꾸고 당사를 매각하는 등 혁신적인 재창당 프로그램을 통해 당을 변화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지난 2월15일 최대표를 만난 윤여준 의원은 “나는 불출마할 것을 권유했으나, 상당수 의원들이 선거에 출마하지도 않는 대표를 간판으로 해서 어떻게 선거를 치르느냐고 대표에게 말하고 있어 최대표가 막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최대표는 기본을 다지며 하나하나 실천해 가기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 발 빠르게 행보해 왔다. 지난해 정기국회 대표 연설을 앞두고 그가 연설문 작성팀에 요구한 것도 뉴스가 될 만한 새로운 ‘건’을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한 주변 인사는 이런 점을 들어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최대표가 마치 취재하듯이 정치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최대표가 선 굵은 행보를 통해 위기를 돌파하기보다는 ‘아이디어’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내에서는 서열 1,2위인 최대표와 홍사덕 원내총무가 나란히 한나라당 지지세가 강한 서울 강남 갑·을에 지역구를 두어 ‘강남당’이미지를 자처하는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최대표가 어떤 선택을 하건 그의 리더십이 일정한 힘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희생이 필수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윤여준 의원은 “최대표가 사심을 갖고 당을 운영한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로부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기 희생이 필요하다. 그래야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고, 다른 권한도 행사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최대표 주변 인사 가운데는 최대표가 불출마는 물론이고 정계 은퇴라는 배수진을 치고 당과 사람 모두 큰 폭의 변화를 일궈내야 한나라당이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를 버리는 결단이 없다면, 이번의 위기를 무사히 넘긴다고 해도 최대표는 공천이 완료되는 것과 함께 더 큰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있다. 한나라당 위기의 본질인 최대표 리더십이 바뀌는 데는 한계가 있고, 벌써부터 공천을 둘러싸고 심각한 내홍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13일 제3정책조정위원장 직을 사퇴한 이원형 의원은 “공천 과정이 공정하지도 투명하지도 않다. 공천심사위원을 새로 구성하고 지도부도 바꿔야 한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최병렬 대표측이 특정 후보를 적극 돕고 있다는 ‘사천(私薦) 의혹’이 일고 있고, 현역 의원이 공천을 신청한 한나라당 당직자를 검찰에 고발하는가 하면, 공천 탈락자를 중심으로 원칙과 기준이 무엇이냐는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는 등 공천을 둘러싼 한나라당의 내홍은 점점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최대표와 각을 세운 서청원 대표측의 대응도 주목된다. 어떤 계기를 통해 불꽃이 점화되면 이런 불만들이 하나로 뭉쳐지면서 지도부를 향해 분출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6월 한나라당 대표가 되면서 새로운 보수 세력을 건설하겠다고 큰소리쳤던 최병렬 대표의 홈페이지에는 ‘최대표가 물러나야 젊은 보수가 살고 한나라당이 산다’는 글이 올라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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