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법, 재벌 로비로 뒤집혔다.
  • ()
  • 승인 1997.01.3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가는 노동력과 화폐를 관리하는 데 경제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개입한다. 노동력 가치와 화폐의 재생산은 자본이 요구하는 것이지만 자본 그 자체에 의해서는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쉬잔 드 브뤼노프

노동관계법 날치기 처리로 빚어진 정국 위기의 최대 미스터리는 신한국당이 왜 상급 단체에 대한 복수 노조 허용을 3년간 유예하기로 결정했는가 하는 점이다. 상급 단체 복수 노조 허용은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에서 이해 당사자인 노사가 합의한 사안이고 정부 안에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해 국회로 넘긴 것이었다. 신한국당이 그처럼 결정한 배경이 중요한 까닭은, 노동자에게 불리한 정리 해고만큼이나 상급 단체에 대한 복수 노조 허용을 유예한 것이 노동계의 저항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은 최근 상급 단체 복수 노조 허용 유예와 노동관계법 날치기 통과에는 여권에 대한 삼성그룹과 전경련의 로비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증언들을 정치권·정부·재계·노동계로부터 확보했다. 그러면 어떻게 지금까지 이 미스터리가 밝혀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는 무엇보다도 밝혀지는 순간 정국의 향배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폭발력을 지닌 만큼 관련 당사자들이 철저한 보안을 유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세월만이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은, 그 비밀과 관련된 당사자들의 이해가 일치하는 경우다. 하지만 노동관계법과 같이 관련 당사자들인 노동계·재계·정부의 이해가 서로 얽혀 있는 경우에는 바로 그 이해득실의 편차로 인해 보안의 틈새가 벌어진다. 삼성그룹과 전경련의 로비가 앞서의 미스터리를 푸는 키워드라는 것이 밝혀지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노동관계법, 특히 상급 단체 복수 노조를 유예키로 한 개정 노동법 때문에 촉발된 20여 일의 총파업으로 재계 내부의 갈등이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보고서 제출·설득 작업 병행

노동관계법 개정 과정을 잘 아는 한 재계 고위 관계자는 1월16일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전경련과 경총이 지난 12월 중순 상급 단체에 대한 복수 노조 허용을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점과 96년 말까지 노동관계법을 처리하라는 성명을 발표한 것은 삼성그룹과 선경그룹의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재계의 복수 노조 불가 방침 결정을 삼성그룹이 주도하고 선경그룹 총수인 전경련 최종현 회장이 앞장섰다는 증언이다.

그는 이어서 전경련과 경총이 공동 성명을 발표한 직후부터 삼성그룹과 전경련이 나서 신한국당과 청와대에 대한 로비를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당시 신한국당은 이미 12월10일에 정부의 최종안을 넘겨받은 상태였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로비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상급 단체에 복수 노조를 허용할 경우 발생할 폐해를 논리적으로 밝힌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한국당과 청와대의 정책 결정자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는 작업이다.

보고서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 <시사저널>은 신한국당의 노동관계법 최종안 작성을 주도한 이홍구 대표의 자문 기구인 6인 소위에 참여한 한 의원으로부터 보고서 내용이 △ 복수 노조가 허용되면 노노 갈등과 노사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사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며 △국내에서 사업을 하기 어려워 모든 사업을 해외로 이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음을 확인했다.

삼성그룹이 전경련을 앞세워 복수 노조 허용을 무산시키기 위해 로비 공세를 펴게 된 까닭은, 삼성그룹의 무노조 전통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김유선 정책국장은 이와 관련해, 삼성그룹의 경우 지금까지 사원들이 노조를 설립하려고 하면 회사측이 사전에 그와 같은 움직임을 알고 먼저 설립 신고를 하는 식으로 노조 설립을 봉쇄해 왔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단위 사업장에서 복수 노조가 허용되면 삼성그룹은 무노조 방침을 유지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최종안에는 단위 사업장에 대한 복수 노조 허용을 2001년까지 유예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도 삼성그룹이 로비를 전개한 배경을 김국장은 “상급 단체에 복수 노조가 허용되는 것부터 막아야만 단위 사업장 복수 노조 허용도 궁극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절실함이 작용한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그가, 삼성그룹의 로비가 상급 단체뿐만 아니라 단위 사업장의 복수 노조 허용 철회에 맞춰졌을 것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김국장의 이와 같은 분석은 <시사저널>이 김문수 의원(신한국당·부천 소사)과 1월18일 가진 인터뷰에서도 간접으로 확인된다. 6인 소위원회의 일원으로 신한국당의

노동관계법 최종안 작성 회의에 참여했던 그는 상급 단체 복수 노조 허용 유예 결정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당초 정부의 최종안이 넘어 온 이후 한동안 당의 방침은 허용하기로 하는 것이었는데, 마지막에 3년 유예로 바뀌었다. 누가 그와 같은 결정을 했는지 모르겠다.”
복수 노조 유예 후 재계 분열 심각

신재벌 정책 포기에 이어 상급 단체 복수 노조 유예도 따지고 보면 재계의 사보타지로 인한 결과라고 경제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국내총생산의 90%를 담당하는 30대 그룹의 대부분이 96년 목표치를 조금 웃돌거나 약간 밑도는 매출액과 순이익을 기록했다. 그런데도 경제위기론을 확산시킨 목적은, 크게는 정부로 하여금 재벌의 소유 구조 개편이라는 칼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고, 작게는 복수 노조를 유예시키는 데 있었다는 주장이다.

노동관계법의 운명은 어쨌든 그리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우선 상급 단체에 대한 복수 노조 허용 유예와 관련해 재계가 심각한 분열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그룹과 대우그룹처럼 노조가 민주노총 소속인 재벌들은 삼성그룹의 로비로 인해 자신들만 총파업에 따른 희생을 감수하고 있다는 불만을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노총이 민주노총과 연대 투쟁을 벌이기로 합의한 상황이어서, 여권이 노동관계법을 재개정하지 않기란 그리 쉽지 않다는 분석이 많다.
여권도 노동관계법의 재개정만이 유일한 해결 방안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신노사 관계 개혁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온 여권의 고위 인사는 상급 단체 복수 노조 허용 쪽으로 재개정하는 것이 정국 위기를 타개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