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 목숨 거는 ‘회사 인간’의 시대 종언
  • 李文宰 기자 ()
  • 승인 1996.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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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 인생 걸 수 없는 사회…젊은 세대 ‘탈회사 인간’ 되기 안간힘
‘사원들이야말로 우리 회사의 가장 소중한 재산입니다’ ‘새로운 제도에서 여러분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고객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조직 개편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험을 감행하는 사원들에게 상을 줍니다.’

신입 사원이라면 피가 뜨거워지는 경영자의 비전 제시일 것이지만, 명예 퇴직 증후군에 걸려 있는 중간 간부들은 한 귀로 흘려버리는 사내 방송일 터이다. 위에 소개한 ‘연설문’들은 최근 국내에서도 번역된 미국의 베스트 셀러 <딜버트의 법칙>에 나오는 ‘경영자들의 위대한 거짓말’이다.

‘한국, 1996년 겨울’을 이야기할 때 ‘회사 인간’만큼 적절한 키 워드도 많지 않다. 한국의 봉급 생활자 수는 천만 명을 넘는다. 한국 사회는 회사 인간으로 구성된 회사 사회인 것이다. 회사 인간의 가정을 움직이는 것은 가장이 아니라 회사이다. 가정의 안정이 회사 발전의 주요한 요소라고 판단한 회사는 가정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다.

개인의 삶이 회사 이전·회사·회사 이후로 삼분된 지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이같은 삼분법적 삶은 벌써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제도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조화로운 인격이 아니다. 학교는 취직 학원이 된 지 오래이다. 통과 제의는 이제 신입 사원 환영회로 바뀌어 있다. 개인의 삶은 이제 개인이나 국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회사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주체는 대부분 회사이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회사는 제2의 가정이고 사원은 그 회사의 가족이었다. 한번 직장은 평생 직장이었다. 회사 인간은 월급으로 결혼하고, 내집을 마련하고 자녀들을 키우고, 치료를 받았고, 경조사를 치러냈다. 가장인 회사 인간은 오로지 일에만 열중하면 되었다. 일하는 가장은, 사회는 물론 가정에서도 존경받았다. 직업이, 회사가 곧 그 사람의 인격과 신분을 대신했다. 일이 곧 삶이었다. 회사는 ‘제2의 자연’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회사 인간들은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제3의 물결, 국제화·지방화, 정보화 사회, 세계화·현지화…. ‘마누라만 빼놓고 다 바꾸’어야 했다. 다운사이징·리엔지니어링·리스트럭처링·초일류 기업·세계 경영·국가 경쟁력…. 지난 몇 년간 회사 인간들은 발칸포처럼 발사되는 ‘말의 포탄’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회사는 다운사이징을 통해 실질적인 몸집을 불렸지만, 회사 인간은 다운당하기 시작했다. 공무원 사회도 흔들렸다. 대통령은 물론 장관·외교관까지 세일즈맨이라고 자처했다. 국가 기관에도 경영 마인드가 계속 수혈되었다. 일본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은 하나의 거대한 주식회사가 되어 가고 있다. 대기업들은 공무원들에게 경영학을 가르치고 국가 정책에 입김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세계를 경영하고자 한다.

자본주의가 지구를 장악하면서, 정보화 사회가 궤도에 진입하면서, 이제 회사 인간은 전지구적인 문제로 떠올랐다. 20세기 산업사회에서 인간은 비회사 인간과 회사 인간으로 나뉘었다. 최근 번역된 <회사 인간의 흥망>을 쓴 앤터니 샘슨은, 회사 인간을 경제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라고 파악한다. 이때 회사 인간은, 고용주와 항상 변화하는 관계, 즉 난처한 상황에서 행동해야 하는 개인, 회사와 가정 사이를 왕복하는 개인이다.

회사 인간은 자본주의의 큰아들이다. 서구에서 그 장남은 18세기를 지배했던 프리드리히 대제의 훈령에 의해 양육되었다. 오합지졸을 기계적 조직으로 뒤바꾸고자 했던 프리드리히는 위계와 제복을 도입하고 체계를 세웠다. 그야말로 기계화한 조직을 탄생시킨 것이다. 19세기 기업가들이 공장을 건설하고 사무실을 차릴 때 그 모델이 프리드리히 대제의 군대였다.

금세기 미국 기업들은 양차 세계대전을 거쳐 극적인 진화를 거듭하면서, 실제로 군대 조직을 닮아갔다. 장군이나 제독들이 기업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회사 이름에도 제너럴(general)이 사용되었다(GM, GE처럼). 병역 필 혹은 면제를 입사 자격의 맨 위에 올려놓는 한국의 경우는 새삼스런 설명이 필요없다. 패전 이후 일본은 전쟁 중 군대와 군함 등에 퍼부었다가 빼앗긴 자부심을 회사에 쏟아부었다. 군대와 회사, 군인과 회사 인간은 내용과 형식에서 그만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탈회사 인간’ 어떻게 가능한가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미셸 푸코의 말투를 빌린다면, 회사 인간을 관리·감독하는 것은 회사가 아니라 회사 인간 자신이다. 회사란, 소장학자 조봉진·홍성태 씨가 기획한 반회사론 <회사 가면 죽는다>에 따르면, 감시자는 피감시자를 볼 수 있지만 피감시자는 감시자를 볼 수 없는 ‘원형 감옥’이다. 수많은 회사로 이루어진 회사 사회는 거대한 원형 감옥이다.

회사와 가정이 구분되고, 일하는 시간과 여가 시간의 경계가 뚜렷하던 시대는 오히려 행복해 보인다. 회사 인간의 또 다른 아버지는 기계였다. 회사 인간은 육체의 생존을 위해 기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무릎 꿇는 순간 그는 기계로 전락했다. 찰리 채플린은 인간의 이와 같은 변화를 <모던 타임스>에서 신랄하게 풍자했다.

산업화를 인간의 처지에서 보자면, 일과 놀이가 구분되지 않던 농경 공동체 인간에서 일과 여가가 엄격하게 구분되는 회사 인간으로의 변화이다. 도시가 탄생하자, 도시인들은 저마다 시계를 보기 시작했다. 회사 인간이란, 회사가 요구하는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시계 인간이었다.

전화기에 이어 컴퓨터가 정보통신 기술을 급속하게 발전시키자 회사 인간은 시계와 더불어 호출기와 휴대 전화 노트북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시간에 이어 공간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일하는 장소와 쉬는 장소의 구분이 없어지고,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의 성격이 모호해졌다. 20세기 산업 사회의 회사 인간은 21세기 탈산업 사회에 적응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많은 중년 회사 인간들에게 21세기 정보화 사회는 ‘지옥문’이다. 한 대기업에서 자기 정체성 확보 프로그램을 지도했던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신경정신과 클리닉‘마음과 마음’원장)는 ‘40세 전후 회사원들이 가장 불안해 하는 것은 자신의 미래’라고 말했다.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인정받아온 회사 인간들이 앞으로 3~5년 뒤의 자기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영 혁신은 회사 인간에게 더 많은 요구를 한다. ‘살아 남은 자’들은 슈퍼맨이어야만 한다. 능력에다 인간성·리더십·사교성 등을 고루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회사가 요구하는 덕목들을 갖추는 기간이 곧 재직 기간인데, 어느날 회사를 떠나게 되면 회사 인간들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가정과 사회에 전직 회사 인간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거의 없다. 회사를 떠나는 순간 회사 인간은 사회적·심리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회사 인간의 자녀들, 즉 21세기 탈산업 사회의 아버지가 될 신세대들은 벌써부터 징후를 알아챘다. 직업이 삶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가치관과 함께 회사를 적극 이용하려는 것이다. 20대 때의 회사 생활을 ‘독립을 위한 수련 기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 24시간 편의점 주인의 80%가 20,30대이다. 산업 사회를 정점까지 밀고 올라간 회사 인간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폐기 처분하는 것이다. 80년대 <포춘>이 선정한 세계 5백대 제조기업은 그동안 일자리를 3백20만개나 줄였다. 그러나 경영 혁신 이론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어떤 나라 못지 않게 정보화 시대에 열중하는 한국의 사정도 결코 다르지 않다. 평생고용제의 회사 인간이 종말을 맞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일과 놀이를 결합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회사 인간을 모색하는(67쪽 딸린 기사 참조) 한편, 이중경력제가 정착되고 있는 추세다. 즉 사회에 진출하는 첫 시기(보통 15년간)는 대기업이나 안정된 직장에서 일하다가, 그후 15년은 창업하거나 전문직·프리랜서로 일하고, 그 이후는 연금으로 삶을 즐긴다는 것이다. 노동 시장의 탄력성과 사회보장제도가 뒤떨어진 한국에서 보기에 이중경력제는 먼 나라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노령화 사회를 염두에 둔다면, 바로 지금의 이야기다. 현재의 회사 인간들에게는 앞으로 30년 안팎의 미래가 남아 있는 것이다.

변화에 민감한 성공학 강사들은 벌써부터 탈회사 인간을 주창해 왔다. 미국의 미래학자 윌리엄 브리지스는 <직장 혁명 시대의 자기경영>에서 다음과 같이 권유한다.

‘지금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욕구). 내가 정말 가장 잘하는 것은 무엇인가(기질).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만족스런 성취도를 보이는가(기질). 내 인생 경력 중 어떤 것이 내게 유리하게 작용하는가(자산).’

탈회사 인간이 되고자 할 때 이 네 가지 사항을 반드시, 그리고 냉정하게 고려하라는 것이다.

회사 인간들은 이제 성인식을 두 번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40대에 행하는 두 번째 성인식이 훨씬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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