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쇠 파이프에 맞아 죽는 부처님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9.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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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유혈 종권 다툼… 민심·불심 이반해 ‘누란의 위기’
그것은 시가전이었다. 정화개혁회의가 10월12일 오전 11시 총무원 청사 및 조계사 인수를 시도하겠다고 공언했을 때부터 이미 ‘전투’는 예견되었다.

그러나 전투의 양상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정화개혁회의가 동원한 승려·신도·사설 경비업체 직원 1백50여 명과 조계사를 철통처럼 방어하던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관계자 2백여 명이 충돌하면서 조계사 입구 왕복 6차선 도로는 순식간에 무법천지 싸움터로 변하고 말았다.

승려·신도·용병들 ‘아수라 지옥의 혈투’

소화기 분말이 최루탄 못지 않게 시야와 호흡을 방해하는 아스팔트 위에서 양측은 바리케이드로 설치했던 구조물, 야구 방망이, 쇠 파이프 따위 손에 잡히는 기물을 닥치는 대로 휘둘렀다. 일부 승려는 취재하는 사진 기자가 길가에 세워 놓은 철제 사다리를 방패 삼아 휘두르기도 했다. 도망가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승려는 머리를 감싸안은 채 나뒹굴며 쇠 파이프 세례를 받았다.

한 경비업체 직원이 분말을 뿌리고 난 소화기 통으로 승려의 머리를 내리찍는 광경도 눈에 띄었다. 옷섶이 찢기고 손발은 들린 채 경비업체 직원 서넛에게 질질 끌려가던 한 승려는 “살려 줘, 제발 살려 줘”라고 죽어가는 소리로 애원하고 있었다. 곳곳에 튀는 피, 비명, 원색적인 욕설. 아수라(阿修羅) 지옥이 따로 없는 현장이었다.

법원 판결 이후 다시 불 붙은 총무원과 정화회의의 갈등이 우려했던 대로 폭력 분규 사태로 번졌다. 지난 10월1∼2일 서울지법은 정화회의가 제기한 소송에 대해 대한불교조계종 오고산 총무원장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선출되지 않았다며 ‘자격 없음’ 판결을 내렸다. 정화회의는 지난해 11월 ‘송월주 총무원장 3선 반대’를 내걸며 조계종 총무원 청사를 실력으로 점거했다가 43일 만에 공권력에 의해 해산되었던 집단.

법원 판결이 있은 뒤 총무원 현 집행부와 정화회의는 총무원장 직무대행을 누가 맡느냐를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여 왔다(<시사저널> 제521호 참조). 양측은 10월20일 현재 서로 다른 직무대행 체제를 가동하고 있다.
10·12 폭력 사태 이후 또 다른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양측은 새 무기로 상대방을 압박하고 있다. 세력 과시용 대중 법회가 그것이다. 시작은 총무원이 먼저였다. 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부터 이를 ‘불교를 말살하려는 사법부의 폭거’라고 규정해 온 총무원은 10월12일 오후 2시 대규모 사부대중 궐기대회를 준비했다. 10·12 폭력 사태는 바로 이 대회를 훼방하려는 정화회의가 소란을 일으키면서 터진 것이었다. 소란에도 불구하고 이 날 궐기대회에는 전국 25개 교구 본사에서 모여든 신도 만여 명이 참석했다. 총무원은 이 날 법회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했다.

그로부터 닷새 만인 17일에는 경남 양산시 통도사에서 신도 5천여 명을 모아놓고 정화회의가 대중 집회를 열었다. 이름하여 ‘10·12 납치 고문 폭력 규탄 및 제2 정화 불사 완수를 위한 사부대중 전진 법회’.

민심이 자기 편에 있다고 선전하는 양측 지도부와 달리 이를 바라보는 일반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10·12 사태가 터진 뒤 인터넷이나 PC통신에는 ‘중들의 싸움, 이제는 정말 신물 난다’‘사찰 재산을 아예 국고로 환수해 잿밥 싸움을 근절하자’‘길거리를 지날 때, 예전에는 백골단이 제일 재수 없었는데 요즘에는 중들이 제일 재수 없다’ 같은 비판적인 글이 쏟아졌다.

조계종 지도부는 이같은 비판 여론이 언론의 흥미 위주 보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법원 판결 직후 결성된 ‘대한 불교 조계종 법통 수호 대책위원회’는 10·12 사태 당시 등장한 폭력은 궐기대회를 수호하기 위해 방어 수단으로 행사한 것인데 언론 매체가 폭력 사태만 부각할 뿐 ‘역대 최대 규모’였던 범불교도 궐기대회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불교계 내부에서도 이같은 불만은 자가당착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94년 개혁 종단 출범에 관여했던 한 30대 불자는 “일찍이 행인이 오가는 길거리를 승려들이 무단 점거하고 편싸움을 벌인 일은 없었다. 지난해에도 승려대회만 거리에서 열었을 뿐 양쪽이 직접 맞붙은 곳은 조계사 경내였다. 동네 깡패도 편싸움은 으슥한 데서 하는 법인데, 백주 대낮 중인환시리에 도로를 무단 점거하고 편싸움을 벌일 수 있는 간 큰 집단이 대한민국에 조계종밖에 더 있겠느냐”라고 비웃었다.
불자들,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민심 이반. 사실 이는 최근 몇 년간 불교계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일반인의 민심 이반은 이미 지표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한국갤럽은 84·89·97년 세 차례 ‘한국인의 종교 실태’를 추적했다. 이에 따르면 불교도 숫자는 점점 감소해 97년 처음으로 개신교도 숫자에 뒤지기 시작한 것으로 드러났다(개신교 20.3%, 불교 18.3%, 천주교 7.4%). 더 심각한 것은 고학력층에서 불교 신자 감소 추세가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었다. 대학 재학 이상 불자 비율은 9년 전과 비교했을 때 2.5% 포인트 줄었다.

그러나 이보다 심각한 문제가 불교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민심 이반이다. 한 불교계 신문사 ㅂ기자는 최근 몇 년 사이 불교 신도가 두 부류로 양극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교계 흐름에 아예 냉소적인 부류와 기복 신앙에 깊이 빠져드는 부류가 그것이다. 이같은 정서는 둘 다 종단과 ‘정치승’에 더 기대할 것이 없다는 절망감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같은 절망이 단순히 폭력 사태에서 말미암은 것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물론 ‘폭력 사태 한 번에 불교 신도가 백만 명씩 떨어져 나간다’는 말이 불교계에 나돌 만큼 유혈 충돌의 폐해는 심각하다. 그렇지만 국가나 종단 개혁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폭력을 용인했던 것이 한국 호국 불교의 전통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폭력 사태에 대한 불자들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최근 대립 구도에서 정화회의는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해 비록 ‘송월주 총무원장 3선 반대’를 명분으로 내걸었다고는 하나, 총무원 청사를 점거하기 위해 무력을 먼저 행사한 원죄에서 정화회의는 자유롭지 못하다. 사찰 재산을 횡령하거나 문란한 생활을 하다가 멸빈(승적을 박탈 당하는 징계) 당한 일부 파렴치범이 정화회의에 가담한 것도 이들의 명분을 훼손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옳고 그른지 분명히 알면서도, 양쪽에 모두 냉담할 수밖에 없는 것’(천리안 불교동호회)이 오늘날 불자들이 지닌 정서이다. 말 그대로 이들은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한국 불교의 위기를 거론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은 이같은 정황을 반영한다. 개혁 성향으로 손꼽히는 ㅂ스님은 “한국 불교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다”라고 말했다. 신도들에게 끝내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면 불교는 머지 않아 간판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독설이다.
종단 개혁에 실패한 정화개혁회의

물론 현응 스님(전 선우도량 사무처장) 말마따나 한국 불교 역사상 위기가 아니었던 적은 거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교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사건’이라고 평가되는 94년 개혁종단 출범 이후 다시 위기가 거론된다면 문제는 다르다. 94년 4월10일은 불교계에서 ‘4·19’ 내지 ‘6·29’에 버금가는 의미를 갖는다. 그 날 전국에서 모여든 출가·재가 불자 3천여 명은 현대사 이후 최대 규모의 승려대회를 열고 권불(權佛) 유착·비리·횡령·3선 연임 강행으로 얼룩진 서의현 총무원장 장기 집권 체제를 종식시켰다.

‘평화적인 정권 교체’에 뒤이어 등장한 송월주 총무원장 체제는 불자들의 기대를 흠뻑 모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현실은 어떠한가. “개혁을 입에 올렸다가는 왕따를 당하는 분위기이다. 그 누구도 5년 전 우리가 그토록 열망했던 개혁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중앙승가대 학생) “야당이 여당 된 뒤 더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불교계도 마찬가지이다. 개혁적인 승려라는 말을 듣던 사람들조차 주지를 꿰차고 앉은 뒤에는 대형 불사를 벌이며 자기 재산을 불리느라 바빴다.”(전 총무원 직원)

송월주 체제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조계종 총무원 조한권 홍보주임은 △종헌 종법의 기틀을 마련해 3권 분립(중앙종회·총무원·호계원이 각각 입법·행정·사법을 맡는 형태)을 제도화하고 △중앙 종단의 모든 재정을 원칙적으로 공개하게 해 공명성과 투명성을 높였으며 △지방 사찰이 함부로 삼보정재를 처분할 수 없게끔 재산 처분 요건을 엄격히 강화한 것을 송원장 체제의 주된 업적으로 꼽았다.

그러나 이같은 개혁 의지는 집권 후반기 들어 뚜렷하게 퇴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불교계 사정에 정통한 재가 불자 ㄱ씨의 주장이다. 차기 총무원장 자리를 노린 권력 투쟁이 본격화하면서 재집권을 노린 송원장이 급격하게 보수 기득권 세력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차기 집권을 노리는 반대 세력은 97년께부터 이미 ‘조계종단의 발전을 염원하는 중앙종회 의원들의 모임’ 같은 조직을 만들어 행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총무원장의 인사 파행, 사찰 재산 처분 과정에서 나타난 횡령 의혹, 본·말사 주지 임명 과정에서 나타난 금품 수수 의혹 따위를 파고들었다. 이를 두고 ㄱ씨는 ‘법과 제도는 갖추었으되 참신한 인물을 등용하는 데 실패하면서 개혁을 열망한 불자들의 지지 기반마저 취약해진 것이 송월주 체제의 비극’이라고 평가했다.

김응철 교수(중앙승가대학·포교사회학)가 지난해 9∼10월 전국의 출가·재가 불자 5백여 명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 결과는 이같은 평가를 뒷받침한다. 이 중 신도를 이끌어야 할 승려들이 자신감을 잃고 있는 대목은 눈여겨 볼 만하다. 조사 결과 통일 이후 불교가 성장할 것이라고 낙관하는 비구 승려는 전체의 19.4%에 불과했다. 승려들의 자신감 결여는 불교 위기의 또 다른 징후를 드러낸다.

‘미완의 개혁’은 올 들어 새로 출범한 오고산 총무원장 체제로 계승되었다. 앞서의 ㅂ스님은 “올해 초 종단이 직면한 급선무는 상처 받은 불자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개혁 비전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막상 ‘무차(無遮) 화합’, 다시 말해 평등한 대화합을 취임 제일성으로 내걸었던 고산 총무원장이 맨 먼저 벌인 일은 무자비한 징계였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영·호남 문중간 지역 감정 폭발할 수도

새로 제정된 ‘해종 행위 조사 특별위원회법’은 징계 내용을 대폭 강화했다. 징계자가 승적을 되찾을 수 있는 기간이 최소 5년에서 10년으로 늘어났다. 한번 제적 당한 자가 ‘공민권’을 되찾는 기간도 2년에서 5년으로 늘어났다. 곧 제적을 당한 자가 중앙종회 의원 및 종무원에 취임하려면 승적을 되찾은 날로부터 5년을 기다려야 했다. 이는 세속법에서도 악법 중의 악법으로 평가되는 보호관찰법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 ㅂ스님의 지적이다. 이 특별법에 따라 징계 받은 승려가 백여 명. 이 중 10여 명은 승적을 박탈(멸빈) 당하는 극형을 선고받았다.

정화회의가 궁지에 몰리면서까지 ‘극한 투쟁’을 선언한 데는 이같은 징계 정책도 한몫 했다는 것이 불교계 안팎의 비판이다. 이러한 비판을 의식한 듯 조계종은 11월15일 총무원장 선거를 새로 치르기에 앞서 징계자를 재심사하겠다고 발표했다.

총무원과 정화회의 사이에 재연된 갈등은 당분간 봉합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조직이나 자금 면에서 정화회의가 열세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통도사를 거점 삼아 세력 확장을 꾀하는 정화회의의 야심은 만만치가 않다. ‘방장(월하 종정) 뜻을 따르는 것이 불가의 오랜 전통인 만큼 정화회의를 편들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입장’이라는 통도사 주지 신허 스님의 말은 이들의 야심을 더욱 뒷받침한다. 지난해 월하 종정은 정화회의 쪽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교시를 내렸다.

통도사는 ‘통도 문중’이라는 독자적인 문중을 길러낸, 영남 지방의 유서 깊은 사찰이다. 이 때문에 의식 있는 불자들은 자칫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정화회의가 지역 감정을 부추길까 봐 우려한다. 실제로 정화회의는 지난해 분규 당시 송월주 총무원장을 ‘호남 출신 부패한 정치승’이라고 매도하며, 그를 비호하는 호남 출신 통치자가 총무원 청사에 공권력을 투입했다고 공공연히 비난했다(<제2정화를 통해 조계종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 올 들어 재판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진행된 만큼 정권 비판을 삼가고 있지만 상급 법원에 올라가 상황이 뒤집히면 정화회의는 언제라도 다시 ‘경상도 사찰·승려 탄압’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지적이다.

조계종, 개혁 정신으로 돌아가야 위기 극복

반면 정화회의측 움직임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칠 것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일각에서는 ‘정권의 오만’에 공동 대처하는 이번 싸움이 종단 개혁에 전화 위복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낙관론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새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벌써부터 물 밑에서 치열하게 나뉘고 있는 계파간 이해 관계는 이같은 낙관론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한 중앙종회 의원이 지적한 대로 누가 총무원장에 선출되든 당분간 돌아선 민심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 불교가 처한 위기를 극복할 길은 한마디로 요약된다. ‘개혁 정신으로 돌아가라.’

그렇다면 개혁 정신이란 무엇인가. 현응 스님은 ‘인치(人治)에서 법치(法治)로 가는 기틀을 닦아 놓았다’는 데서 94년 불교 개혁의 가장 큰 성과를 꼽는다. 그것은 특정 문중·파벌이 종권을 독식하던 과거와 달리 이판(수행승)과 사판(행정승)의 엄격한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무소유 정신으로 수행에 정진하는 이판과, 세속법 앞에서도 한 점 부끄러움 없는 투명함으로 종단 행정을 펴는 사판.

그러나 개혁 종단은 멍석을 까는 시늉만 했을 뿐 이판사판의 이상을 사바 세계에 이식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국어사전에 ‘이판새판’이라고 나온 ‘이판사판’은 본래 ‘이판을 하든 사판을 하든 수행의 길은 결국 하나’라는 뜻에서 출발했다). 그것은 ‘인치’를 펴기 위한 자비대덕도, ‘법치’를 펴기 위한 가차없음도 갖추지 못한 조계종단의 한계가 낳은 ‘예고된 실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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