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 5060 대결 2라운드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4.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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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의장의 발언으로 촉발된 ‘노풍’을 업고 5060 세대가 다시 전의를 다지면서 17대 총선이 ‘대선 연장전’으로 흐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대선에서 고배를 마셨던 산업화 세대의 ‘패자 부활전’은 성공할 것
2002년 12월19일, 대통령 선거가 있던 날 아침, 홍종인씨(27·가명)는 아버지에게 만 원을 받았다. 스무 살 이래 늘 그랬다. 한나라당 열성 당원인 아버지는 선거가 있는 날이면 으레 그에게 용돈을 건넸다. ‘내가 미는 후보를 너도 찍으라’는, 무언의 압력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 홍씨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배신’했다. 배신의 대가는 재떨이였다. 분노에 떨며 그에게 재떨이를 날렸던 아버지는, 오는 4월15일 ‘불효’를 만회할 기회를 주겠노라며 기세등등 벼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부산이 원적인 신호영씨(31·가명)는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무시 모드’라고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정치 얘기만 나오면 서로 못들은 척 무시하는 것으로 대화 방식이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지지자인 신씨는 ‘DJ는 빨갱이’라 스스럼없이 말하는 경상도산(産)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 이들 관계에 중대 변화가 있을 뻔했다. 탄핵 사태 이후 아버지 홀로 광화문 촛불집회에 다녀온 것을 안 뒤 신씨는 아버지에게 난생 처음 동지적 연대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화해 모드’도 잠시. 새로 등장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열광하는 아버지를 보며 신씨는 ‘역시나’를 되뇌고 있다. 둘의 관계는 다시 ‘무시 모드’다.

매복해 있던 전운(戰雲)이 이 봄에 또다시 곳곳에서 움트고 있다. 2002년 12월19일, 운명의 대회전을 치렀던 20~30대 세대와 50~60대 세대가 재격돌하려는 조짐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

1년4개월 전 승자는 2030이었다. 이들의 아버지 세대인 5060은 자신들의 어이없는 패배를 한동안 믿을 수가 없었다. 송호근 교수는 <한국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에서 이들을 엄습한 공황 심리를 이렇게 묘사했다.

“선거 전날까지도 기연가미연가했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갑작스런 공포로 돌변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설 자리를 잃었다는 표현은 차라리 온건한 것이었다. 이제는 할 일이 없어졌다는 허탈감, 광복 이후 50년을 가꿔온 자리와 신분과 권력과 말발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도 철없는 아이들로 보이던 젊은 세대가 투표를 통해 합법적으로 ‘강탈’해 갔다.”

송교수에 따르면, 아버지 세대를 더 허탈하게 만든 것은, 혁명군이 바로 자기 집안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들이 애지중지 키워온 자식들이 ‘아버지 세대의 피와 땀을 자양분으로 다름아닌 아버지 세대를 물리칠 비장의 무기를 생산’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5060은 경악했다.
그러나 아버지 세대가 언제까지나 ‘물 먹은 솜뭉치처럼’ 축 처져 있을 수는 없었다. 몸과 마음을 추스른 이들은 지난 1년4개월간 끊임없이 크고 작은 반격을 시도했다. 대통령의 잦은 말 실수와 386 참모들의 아마추어리즘은 안성맞춤의 공격거리였다. 이들의 반격은 어느 정도 성공하는 듯했다. 대통령 지지율은 30%를 밑돌았고, 386 참모는 거의 초토화했다. 때를 놓칠세라 5060 지도부는 결정적 한 방을 밀어붙였다. 합법적으로 강탈당한 권력을 합법적으로 되찾아오고자,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강력 신무기를 동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적’을 과도하게 자극하고 말았다. 2002년 대회전 이후 2030은 일상으로 느긋하게 복귀해 있었다. 제일기획 브랜드마케팅연구소는 W(월드컵)세대, P세대(참여세대)라고도 불리는 이들의 행동 유형이 발아→공유→확산→표출→종료의 5단계를 밟는다고 분석한다. 특정 이슈가 터지면 게릴라처럼 출현해 토네이도처럼 강력한 에너지로 무언가를 만들어놓고, 이슈가 사라지면 또 급작스럽게 집단 행동이 소멸하는 것이 2030 세대의 특징이다. 대선 이후에도 그랬다. 승리를 맛본 이들은 각자 자신들의 개인 공간으로, 사무실로 돌아갔다.

정치는 더 이상 이들의 흥밋거리가 아니었다. 여론조사 기관에 따르면, ‘이번 총선에 꼭 투표하겠다’는 적극 투표층은 3월 초 이미 지난 대선 투표율(70.8%)보다 13% 포인트 이상 낮은 57% 수준까지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때 탄핵 사태가 터졌다. 자발적으로 긴급 소집 명령을 발동한 2030은 ‘순식간에’ 다시 광장으로 결집했다.

홍덕률 교수(대구대·사회학)는 이들의 위기 의식이 그만큼 심각했다고 설명한다. 학계에 따르면, 2030을 ‘진보’라는 단일한 틀로 묶기란 사실 쉽지 않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고졸·서민 출신 ‘노짱’을 지지하다 말고 갑자기 나타난 재벌 귀족 정몽준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유동성’이 2030 정치 행태에 나타나는 특성이다(특히 20대의 정몽준 지지율은 전 연령대를 통틀어 가장 높았다). 말이 2030이지, 민주화 세대인 386과 정보화 세대인 N세대 사이의 간극도 상당하다.

그러나 이질적인 이들을 묶어낸 힘이 바로 5060식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홍덕률 교수는 지적한다. 수구·친미·냉전 의식과 물질주의로 상징되는 이른바 산업화 세대의 권위주의 문화에 2030은 본능적으로 넌더리를 낸다. 민주화와 세계화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이런 케케묵은 권위주의가 자신들의 미래를 가로막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대선에서 치명상을 입혔다고 생각한 낡은 권위주의가 새삼 복귀할 움직임을 보이자 민주화 세대와 정보화 세대가 다시금 손을 잡았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각성된 386 세대와 문화적으로 각성된 N세대의 연대’가 또다시 위력을 발휘하면서 아버지 세대는 재차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기사회생의 계기를 제공했다. “60대 이상은 투표날 집에서 쉬셔도 된다”라고 한 정의장의 발언이 일파만파를 일으키면서 5060은 총선의 막판 변수로 떠올랐다(상자 기사 참조).
이를 두고 한국노인복지학회 임춘식 회장은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라고 설명했다. “요즘 가정에서 권력 순위를 봐라. 1순위 주부, 2순위 아이들, 3순위 강아지, 4순위 남편, 5순위 파출부, 그리고 맨 마지막 6순위가 노부모이다. 이렇게 가정에서 홀대받던 노인들의 설움이 정의장 발언을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라고 그는 주장했다.

문화 평론가 이동연씨 또한 노년층의 상대적 박탈감에서 이번 사태가 커진 원인을 찾았다. “최근 몇 년 사이 월드컵·촛불 시위·대선 따위를 거치며 2030은 변화의 주역으로서 떠들썩하게 눈길을 받아 왔다. 반면 산업화 세대는 그 뒤켠에서 퇴물 취급을 받으며 퇴출 압박에 쫓기고 있었다.” 이씨는 한국 사회가 이미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는데도 이에 대한 대책이 거의 전무했던 것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고도 지적했다.

이번 노풍(老風)이 총선 판도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정의장 실언 파문이 터진 지난 4월1일 한겨레와 리서치플러스가 벌인 여론조사에 따르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지지율은 각각 48.4%와 17.6%로, 1주일 사이 열린우리당 지지율은 4.6% 포인트 하락한 반면 한나라당 지지율은 6.5% 포인트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노풍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리서치플러스 임상렬 사장은 지적한다. 탄핵 직후 치솟았던 열린우리당 거품이 빠지고 박근혜 새 대표에 대한 기대 효과 등이 겹치면서 어차피 일정한 조정 국면이 예상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탄핵 사태 이후 부동층으로 돌아섰던 한나라당 지지 성향 유권자들이 노풍을 명분 삼아 한나라당으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은 충분하다. 문제는 노풍이 탄풍(彈風)을 압도할 수 있겠느냐는 것인데, 이에 대한 판단은 유보적이라고 코리아리서치 김경혜 이사는 말했다. 탄핵 변수가 장기적으로 워낙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만큼 기본 구도가 바뀌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노풍이 무너질 뻔한 5060의 대오 재정비에 도움을 준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치적으로 정의장의 실언은 5060을 세대적으로 ‘각성’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선거 막바지면 어김없이 등장하곤 하던 지역 감정의 망령에 이어 이번에는 ‘세대 감정’이 새롭게 출현할 판이다. 실제로 야당은 노골적인 지역 감정 자극을 자제하는 대신 전국 양로원을 순회하고 ‘부모와 함께 투표장 찾기’ 캠페인을 벌이는 등 세대 감정을 자극하는 새로운 선거 전략을 쓰고 있다.
물론 투표를 세대간 대결로 보는 시각은 위험하다. 모든 5060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또 모든 2030이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난 대선 이후 ‘세대’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변수로 빠르게 떠오른 것만은 분명하다고 한국사회여론연구소 한귀영 연구실장은 지적한다. 난공불락의 성처럼 보였던 지역주의가 깨져 나가면서 세대 갈등이 지역 갈등을 급속히 대체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2002년 본격적으로 점화한 세대 전쟁 제1 라운드에서 5060은 참패를 당했다. 이제 아들 세대는 수적으로 아버지 세대를 압도한다(전체 유권자 중 2030은 47.0%, 5060은 30.1%를 차지한다). 그렇지만 아버지 세대가 일치 단결할 경우 이번 총선은 예측 불허의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른다. 지난 대선 때도 20대(56.5%)·30대(67.4%) 투표율은 50대(83.7%)·60대 이상(78.7%)에 비해 현저하게 낮았다. 제아무리 탄핵 정국이라 해도 대선보다 관심도가 떨어지게 마련인 이번 총선에서 이 격차는 더 벌어질 전망이다. 5060이 ‘패자부활전’에 성공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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