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민들 “오리엔트 특급은 우리의 희망”
  • 로스앤젤레스·李哲鉉 기자 ()
  • 승인 1997.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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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선발 경기 찾는 교민 급증…일부선 “지나친 관심 금물”
지난 5월4일(현지 시각) LA 다저스가 시카고 커브스를 맞아 벌이는 홈 9연전 세번째 경기가 열리는 다저스타디움 1루 관중석에서 ‘박찬호’를 연호하는 소년이 눈에 띄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파라다이스스캐넌 초등학교 5학년인 이 소년의 이름은 양일연이다. 일연이는 박찬호가 등판하는 경기를 빼놓지 않고 본다. 백인이나 흑인 친구를 만나도 다저스에 있는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 리거 얘기를 자주 한다. 때로는 친구 대니얼과 다툴 때도 있다. 박찬호 선수가 제일 훌륭한 투수라고 생각하는데 대니얼은 좀처럼 일연이의 의견을 따라주지 않는다.

“찬호 아저씨는 최고의 투수다. 훗날 찬호 아저씨처럼 다저스타디움에서 뛰는 선수가 되겠다.”

실제로 일연이는 파라다이스스캐넌 초등학교의 야구 선수이다. 현재 2루를 맡고 있는데 박찬호 선수처럼 마운드에 오르는 것이 꿈이다.

박찬호는 지금 많은 재미 동포 소년들에게 영웅이다. 그가 공을 던질 때마다 그의 선전을 기원하는 눈망울들이 그의 투구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다저스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포수 마이크 피아자는 멋있기는 하지만 어딘가 자기 모습과 달라 어색했는데, 박찬호는 자신과 생김새가 비슷해 친근감이 든다는 것이다.

“교민들 박찬호 활약 보며 소외감 덜어”

물론 박찬호 팬이 소년들만은 아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교포들이 다저스타디움에 나와 그의 선전을 기원한다. 경기마다 적게는 2백여 명, 많게는 5천여 명이 주로 1루쪽 최상단 관중석에 모여 박찬호를 응원한다. 로스앤젤레스 교민 방송인 라디오코리아는 박찬호가 선발 등판하는 경기를 거의 모두 중계한다.

94년 4월 박찬호가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 있는 옥스퍼드 팔레스 호텔에서 다저스 입단 기자회견을 할 때, 김항경 로스앤젤레스 총영사를 비롯해 많은 교민 사회 단체장들이 모여 ‘코리언 캐논’의 메이저 리그 재입성을 축하했다. 특히 로스앤젤레스 교민들은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 리그 사상 두번째로 높은 1백20만 달러를 계약금으로 받고 홈팀 다저스에 입단했다는 사실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박찬호 열풍은 그가 메이저 리그에 진출했던 94년보다는 많이 수그러들었다. 지난 2년 동안 박찬호 선수가 마이너 리그로 밀려나면서 성적이 부진했던 탓이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던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 교민회 김남권 회장은 “교포들이 처음에 너무 많은 기대를 가졌다. 박찬호 선수가 미국 야구와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가 부진할 때 무척 많이 실망하고 낙담했다”라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회 조용갑 사무총장은 “교민들은 미국 주류 사회에서 소외됐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박찬호가 미국 주류 사회에서 제대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박찬호 선수가 부진하자 자연히 열기가 식게 되고, 초기에 활발하게 움직이던 후원회도 없어지고 말았다”라고 말했다.

94년 우후죽순 격으로 생겼던 후원회들은 박찬호 선수의 마이너 리그 생활이 1년 넘게 지속되자 하나씩 유명무실해졌다. 김남권 회장은 “후원회가 없어진 것은 후원회 관계자들이 박찬호 선수의 지명도를 이용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박찬호 선수가 부진하자 상품 가치가 떨어졌다는 뜻이다.

박찬호, 교민 단체와 일정 거리 유지

박찬호도 교민들의 지나친 기대가 부담스러운 데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후원회에는 참여하기를 꺼린다. 게다가 교포 사회는 심하게 분열되어 있다. 백여 개가 넘는 교민 단체가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어 박찬호는 여기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 한다. 따라서 현재 박찬호와 연락이 닿아 수시로 교류하는 후원회는 없다.

박찬호가 올 시즌 2승1패, 방어율 2점대로 호투하자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붐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국 교민들은 라디오코리아를 통해 박찬호 소식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다저스타디움을 찾는 교민 수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 배포되는 <중앙일보>는 얼마 전 박찬호 코너를 신설한 후로 판매 부수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코리아타운 교민회 김남권 회장은 이런 현상을 걱정하는 눈길로 바라본다. “교민들이 찬호에 대해 가진 애정은 마치 급히 달아올랐다가 금방 식는 냄비 같다. 찬호가 경험을 많이 쌓아 훌륭한 메이저 리거가 되기를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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