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념과 오기로 내일을 향해 던진다
  • 로스앤젤레스·李哲鉉 기자 ()
  • 승인 1997.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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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념과 오기의 광속구로 고난과 고독 관통한 ‘젊은 코즈모폴리턴’…영광의 마운드에 우뚝 서서 “사이영 상 받겠다”
81년 여름 공주중학교 야구부. 1학년짜리가 3루를 맡고 있었다. 몸놀림과 1루 송구가 좋아 선배를 제치고 주전으로 뛰게 된 것이다. 어느날 소년은 연습하다가 왼손 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숨긴 채 공을 받을 때마다 팔을 따라 전해오는 고통을 참고 연습을 계속했다. 이 소년이 고통을 숨기려 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프다고 하면 형들이 내 자리를 뺏을까 봐”였다.

올해 5월4일 미국 메이저 리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홈구장 다저스타디움에서 시카고 커브스를 맞아 벌인 두 번째 경기. 그때 그 소년이 다저스의 선발 투수가 되어 마운드에 올랐다. 1회 초부터 투아웃 만루 위기. 시카고 커브스의 다음 타자는 브룩스 키에시닉. 지난해 대타로만 나와 타율 3할4푼을 넘긴 찬스에 강한 타자였다. ‘코리안 캐논’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투수는 가장 자신있는 빠른 직구를 한복판에 던졌다. ‘딱’하는 소리와 함께 공이 투수 머리 위로 날아갔다. 긴 포물선을 그린 공은 중견수 토드 홀랜스워스의 글로브로 빨려 들어갔다. 이후 그는 6과 3분의 2 이닝 동안 투타에서 맹활약하며 시즌 2승째를 챙겼다. 16년 세월을 뛰어넘은 두 삽화의 주인공은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 리거 박찬호이다.
박찬호에 관한 한 미국과 한국의 시차는 없다. 박찬호의 일거수일투족은 곧바로 태평양 너머 한국에 전해져 세간의 화제가 된다. 박찬호가 등판한 경기는 위성으로 생중계되어 마치 70년대 축구 국가대표팀이 원정 경기할 때처럼 남녀노소를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모은다. 이때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는 미국 메이저 리그 팀이 아니라 한국 국가 대표팀이 되고 만다. 평소에 야구에 관심이 없었다는 이용만씨(70)는 “정치권의 한심한 작태와 불황 때문에 답답했던 가슴을 박찬호가 시원하게 뚫어준다”라고 말했다.

마이너 리그의 냉혹한 생존 경쟁서 승리

냉정히 따지면 아직은 메이저 리그 루키에 불과한 박찬호. 따라서 한국의 ‘박찬호 증후군’은 지나치게 성급하거나 과장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탄탄한 미래가 보장된 국내 프로 리그 진출이라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세계 무대를 목표로 위험한 도전을 감행한 ‘젊은 세계인’ ‘한국인의 오기와 근성을 가진 코즈모폴리턴’이 거쳐온 오랜 고난과 외로움을 향한 격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박찬호 선수는 한국 국민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를 짐으로 여긴다. 이제야 간신히 메이저 리그의 첫 계단을 올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밟고 선 영광의 마운드 뒤에는 고통과 외로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서 있다.
93년 마지막 날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박찬호는 영광만을 머리 속에 그렸다. 세계 야구 최정상인 미국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는 첫 한국인인 데다, 역사상 열일곱 번째로 마이너 리그를 거치지 않고 곧장 메이저 리그로 진출했으니 야구 선수가 얻을 수 있는 모든 영광을 얻은 듯했다.

하지만 갓 스물이 넘은 박찬호에게 최정상의 무대는 아직 높았다. 메이저 리그에 진출한 지 17일 만에 마이너 리그 더블A팀 샌안토니아 미션스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때를 박찬호는 잊지 못한다. 샌안토니오 미션스로 내려가기로 확정되고 난 후 경기장을 통해 라커룸으로 가려고 하자 경기장 관리 요원이 ‘메이저 리그 선수 명단에서 제외된 선수는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면 안된다’고 말하며 경기장 출입을 막았다. 박찬호는 “경기장 건물 복도를 통해 라커룸으로 들어가 짐을 싸면서 프로 세계의 냉혹함을 뼛속 깊이 실감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찬호는 몇달 뒤면 메이저 리그로 돌아갈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으나 1년이 넘도록 다저스는 박찬호를 부르지 않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마이너 리그 생활과 생소하기 그지없는 환경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외로워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어느 때는 숙소 앞에서 방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앞에서 몇 시간씩 앉아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찬호는 몇달 뒤면 메이저 리그로 돌아갈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으나 1년이 넘도록 다저스는 박찬호를 부르지 않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마이너 리그 생활과 생소하기 그지없는 환경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외로워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어느 때는 숙소 앞에서 방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앞에서 몇 시간씩 앉아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찬호는 다시 일어섰다. 야구를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연습에 몰두했다. 95년 트리플A팀 앨버커키로 옮긴 뒤 박찬호는 경기장과 숙소를 뛰어서 다녔다. 중간에 우범 지역을 지나야 하므로 위험천만한 일이었으나 박찬호는 개의치 않고 뛰었다. 트리플A팀에서는 선수 간에 우정이 싹틀 여지가 없었다. 서로가 메이저 리그행을 다투는 경쟁자이다 보니 마음을 열 여유가 없어 외로움은 더해 갔다.

이 와중에서 박찬호는 어느 때보다 개인 훈련을 많이 소화했다. 외로움과의 투쟁 끝에 마침내 95년 9월1일 메이저 리그에 복귀했다. 마이너 리그 시절 맛본 쓰라린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박찬호는 95년 말 시즌이 끝난 후에도 한국에 가지 않고 개인 훈련에 치중했다. 또 도미니칸 윈터 리그에 참여해 실전 경험을 익혔다. 틈틈이 영어학원에 다니며 영어 회화도 배웠다. 코치나 동료 선수들과 제대로 호흡을 맞추려면 의사 소통이 원활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찬호는 트리플A팀 앨버커키에 있을 때부터 다저스 구단이 붙여준 통역을 거절했다. 통역이 있으면 당장 편리하겠지만 통역에만 의존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통역을 거절한 탓에 그는 불편을 많이 겪었다. 의사 소통이 되지 않아 동료들과 다툰 적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박찬호의 영어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지금은 웬만한 대화를 거의 할 수 있게 되어 언론과의 인터뷰에도 능숙하다. 대신 한국어 발음이 명확하지 않게 되었다. 한국인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마이너 리그 생활이어서 모국어를 거의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정동순씨는 “한국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미국에 가더니 발음이 이상해졌다”라고 걱정했다.
모국어 발음까지 이상하게 만든 마이너 리그 생활이었지만, 이 시절은 고통과 외로움으로만 소진되지는 않았다. 마이너 리그 시절에 겪었던 고통은 시속 1백60㎞까지 이르는 강속구를 가진 젊은 투수를 성숙하게 했다. 국내외 야구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박찬호 선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경험과 노련함이라고 말한다. 아직도 경험이 부족한 그는 주자를 진루시키고 나면 투구 간격이 빨라지는 미숙을 종종 드러내곤 한다. 하지만 94년 메이저 리그에 처음 선보일 때 강속구 위주로 투구했던 박찬호 선수가 그나마 투구의 완급을 조절하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은 마이너 리그 시절 얻은 경험 덕분이다.

마이너 리그 시절 박찬호가 얻은 또 하나의 수확은 버트 후튼 코치와의 만남이었다. 현역 시절 메이저 리그 최고의 커브를 구사했던 버트 후튼 코치로부터 박찬호는 커브와 인내를 배웠다. 직구와 체인지업에 커브가 가미되자 그의 공은 위력을 더했다. 후튼은 또 마이너 리그 생활을 빨리 마치고 메이저 리그에 올라가기만 바라던 박찬호에게 기다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동양인 투수에게 열 계단을 오르기 위해서는 첫 번째 계단을 디뎌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

지난해 4월7일 메이저 리그 복귀전을 치를 때 박찬호는 공만 빨랐던 메이저 리그 새내기 시절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83년 전통을 자랑하는 시카고 커브스의 홈구장 리글리에서 4이닝 동안 강타자 세미 소사를 비롯해 일곱 타자를 삼진으로 잡으며 무실점 호투해 메이저 리그 첫 승을 거두었다.

메이저 리그에서 첫 승을 거둔 박찬호가 제일 먼저 전화해 승전보를 전한 사람은 스승 후튼 코치였다. ‘사람은 은혜를 입은 사람을 잊어선 안된다’는 어머니 정동순씨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94년 10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가 인사를 한 사람도 공주중학교 야구부 시절 자신을 투수로 키운 오영세 감독(현재 대전 청란여고 체육교사)이었다.
메이저 리그에서 첫 승을 거둔 박찬호가 제일 먼저 전화해 승전보를 전한 사람은 스승 후튼 코치였다. ‘사람은 은혜를 입은 사람을 잊어선 안된다’는 어머니 정동순씨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94년 10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가 인사를 한 사람도 공주중학교 야구부 시절 자신을 투수로 키운 오영세 감독(현재 대전 청란여고 체육교사)이었다.

현역 시절 투수로 활약한 오감독은 박찬호의 체격과 송구 모습을 보고 투수 자질을 발견했다. 오감독은 교장과 학부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찬호에게 2학년 때부터 투수 훈련을 시켰다. 오감독이 감독 직을 사임할 정도로 사태는 악화했으나 박찬호는 투수 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었다. 박찬호는 지금도 오감독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어렵게 투수가 된 박찬호는 오감독의 판단이 틀리지 않음을 주위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에 남보다 더 많이 노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마음이 여린 편이었다. 겁 많은 중학생 박찬호는 투수에게 중요한 담력을 키우기 위해 매일밤 공동 묘지를 혼자 다녀왔다. 공주 웅진동 무령왕릉 옆에 있는 공동 묘지까지 뛰어가 섀도 피칭과 스윙 연습을 했다. 박찬호 아버지 박재근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야구 방망이를 들고 공동 묘지로 가는 아들의 모습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대견하기도 해서 말릴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 증후군’ 닮은 ‘박찬호 증후군’

이제 박찬호가 다저스의 선발 투수로서 제 구실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박찬호는 자기가 루키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팀 선배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한다. 타자가 타격 연습할 때면 담장 위로 넘어간 공을 주워 건네주기도 한다. 도미니카 출신 선발 투수들이 그를 따돌려도 그들과 함께 뛰면서 연습한다. 아예 투수 러닝 훈련에서 빠져 혼자 연습하는 노모 히데오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박찬호는 다저스 선발 투수가 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메이저 리그 최우수 투수에게 주는 사이영 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불고 있는 ‘박찬호 증후군’의 이상 열기에는 한보와 김현철씨 비리, 대선 자금 등 답답하고 분통 터지는 일만 잇달아 전개되는 한국 사회의 현실도 분명히 작동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박찬호 증후군’의 사회적 속성은 ‘박정희 증후군’과 닮아 있다. 다만 박찬호는 미래 지향적이라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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