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편들기인가, 정치권의 음해인가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7.1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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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후보 ‘편들기’ 위험 수위… 권력 정점에 근접하려 갖가지 수단 동원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다.” 지난 11월29일 <중앙일보> 내부에서 작성한 이른바 ‘이회창 경선 전략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보고서를 입수·공개해 파문을 일으킨 국민신당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몇몇 언론이 특정 후보를 밀고 있다는 의혹을 강하게 품고 있던 터에 이를 입증할 ‘확실한 물증’을 찾았다는 것이다.

<중앙일보> 보고서가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11월26일부터였다. 그 날 <시사저널>을 포함한 몇몇 언론사와 국민신당에는 문제의 보고서를 담은 편지가 배달되었다. 익명의 제보자는 여기에 ‘중앙일보 편집국=이회창 후보 선거 참모부’라는 제목의 설명서 한 장을 덧붙여 놓았다. 설명서에 따르면, 이 보고서는 지난 7월 신한국당 경선 직후 편집국 고위 간부의 지시에 따라 정치부 기자가 작성한 것으로, 데스크의 검토를 거친 뒤 이회창 후보 진영에까지 전달되었다고 한다.

<중앙일보>는 이같은 보고서를 작성한 사실은 시인하나 이 보고서가 ‘이회창 후보 조언용’으로 10여 차례 작성된 문건 중 하나이며, 작성된 보고서가 모두 이회창 후보 진영에 전달되었다는 제보자의 주장은 사실 무근이라고 반박했다. 국민신당이 제보자의 주장을 원용해 <중앙일보>에 공격의 포문을 열자 이 신문사 이수근 부국장 겸 정치부장은 ‘국민신당에 할 말 있다’며 <중앙일보> 지면(11월30일)을 통해 이 문제를 공식 해명했다.

이부장은 문제의 보고서가 △취재 기자가 데스크에게 통상으로 전달하는 ‘정보 보고’ 차원에서 작성된 것으로, 편집국장이 작성하라고 지시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편집국장이 이 보고서를 토대로 이회창 후보를 만나 조언했다거나, 이부장 자신이 이회창 후보 진영의 고흥길 특보(전 <중앙일보> 편집국장)에게 이 보고서를 한 부 전달했다는 제보자의 주장 또한 ‘날조’라고 못박았다. 이를 국민신당이 정치 목적으로 왜곡·오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쟁점은 <중앙일보> 보고서가 ‘사내 보고용’이냐 ‘이회창 후보 조언용’이냐로 압축된 셈이다. 보고서는 이회창 후보의 경선 전략과 스타일에 따른 문제점을 지적하고 각각 그 개선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이수근 정치부장은 신한국당 경선이 끝난 직후 이회창 후보 진영에서 설왕설래 논의된 자체 분석과 향후 대책을 정치부 정당반장이 종합해 ‘사내 보고용’으로 작성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부장은 나아가 이 보고서를 이회창 후보 진영에 주기 위해 작성했다면 ‘제목:이국장 앞 보고’ 식으로 <중앙일보> 내부의 일반 문서 양식을 따를 필요가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28쪽 사진 참조).

국민신당 김충근 대변인은 이에 대해 ‘정치부 기자가 계통을 밟아 정보 보고를 한 것이야말로 사주의 방침에 따라 중앙일보사 전체가 주도 면밀하게 일을 추진해 왔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김대변인은 ‘나 자신 20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했지만 이같은 내용의 정보 보고는 해 본 일도, 받아 본 일도 없다’고 덧붙였다.

국민회의 또한 이 보고서가 ‘사내 보고용’이 아닌 ‘이회창 후보 지원 전략 보고서’임에 틀림없다며, 그 구체적인 이유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언론사의 통상적인 정보 보고서와 달리 6하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점. 둘째, 보고서의 내용과 형식이 단순한 ‘제안’을 넘어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점. 셋째, 개선 방향을 제시한 부분에서 ‘대쪽 이미지의 장점을 적극 홍보해야’‘기본적으로 덕치(德治) 대통령의 인상 심어 주어야’ 식으로, ‘서술’ 아닌 ‘권유’ 형식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 따위가 그것이다.
기회주의 드러낸 ‘야당 편향 보도’

국민회의는 나아가 이회창 후보 진영이 보고서에 제시된 개선 방향을 실행에 옮긴 흔적이야말로 <중앙일보>가 이후보의 ‘1급 참모’임을 입증한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보고서에는 △아들 병역 문제 해결 △김대통령과의 관계 설정에 세심한 주의 △지나친 김윤환 의존에서 탈피 △이한동 등 민정계 주류 인정 따위가 개선 방향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런데 보고서가 나온 뒤 △이회창 후보 아들의 소록도 행 △김대통령에 대한 탈당 요구 △김윤환 의원과의 불화 △이한동 의원 당 대표 임명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같은 공세가 계속되자 <중앙일보>는 지난 12월1일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및 김충근 부대변인, 국민회의 장성민 부대변인 등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언론계에서도 <중앙일보> 보고서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 기자들은 이 보고서가 당시 정당을 출입하던 기자라면 누구나 지적하던 ‘상식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이 보고서가 국민회의의 주장처럼 이회창 후보를 돕기 위한 ‘비중 있는 전략 보고서’였는지 의문을 표시했다. 그렇다고 단순한 내부 보고용이라고 보기에는 신문사 데스크에 보고할 만한 가치가 거의 없는 시시콜콜한 개선 방향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대목(이를테면 ‘언제나 좋은 얘기를 하는 데 신경 써야’) 이 걸린다는 지적도 있었다.

한 중견 정치부 기자는 이같은 이유를 들어 <중앙일보> 기자를 포함한 이회창 후보 사조직에서 논의된 내용을 해당 기자가 회사에 보고한 내용일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다른 신문사 경제부 기자는 삼성그룹이 ‘대선 후보 관리 전략’을 짜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보고서가 작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중앙일보>의 한 정치부 기자는 ‘증권 회사와 결탁한 내부 브로커가 정보를 빼돌리는 일은 있어도 신문사가 직접 삼성에 정보를 넘기는 일은 없다’고 반박했다.

이번 <중앙일보> 보고서 파문이 관심을 끄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우선은 그간 국민신당과 <중앙일보>가 보여 온 갈등 때문이다. 국민신당은 몇몇 언론이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 및 이인제 죽이기’를 이끌어 왔다며, 그 대표적인 신문으로 <중앙일보>를 지목해 왔다. 이 신문이 일방의 주장만을 토대로 ‘YS 신당 지원설’을 1면에 앞장서 보도하는 등 결과적으로 이인제 후보 지지율을 떨어뜨리는 ‘1등 공적’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중앙일보>에 대한 국민신당의 불신감이 단순한 피해 의식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라고 보는 기자들도 있다. <중앙일보> 편집국의 한 기자는 “특정 후보에 대한 편향을 공공연히 드러낸 기사·칼럼·만화를 볼 때마다 얼굴이 달아오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국민신당의 입장을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라고 말했다.

다른 언론사의 한 정치부 기자는 국민신당이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한 11월4일 <중앙일보> 1면 머리 기사(‘청와대, 국민신당 창당 지원’)를 예로 들며 “다른 신문은 설(說) 차원에서 다룬 기사를 1면 머리에 올린 <중앙일보>의 과감함을 높이 산다. 그러나 그 기사 때문에 물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기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중앙일보>는 다양한 인터뷰와 크로스 체킹을 거쳐 확인된 내용이므로 1면 머리 기사로서 자격이 충분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론 조사 보도 또한 국민신당의 불만을 샀다. 국민신당측은 10월25∼26일 <중앙일보> 자체 조사 결과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최악(15.1%)에 이르고, 이인제 후보와의 격차 또한 최대(16.2% 포인트)로 벌어졌을 때, 조사만 해 놓고 이를 보도하지 않은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했다. 이에 대해 <중앙일보>는 ‘2주 전 실시했던 여론 조사 결과와 큰 변동이 없어 뉴스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보도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문제는 이것이 국민신당과 <중앙일보>의 갈등에 국한된 사안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중앙일보> 보고서 파문이 관심을 끄는 두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론계는 92년 대선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였던 ‘특정 언론의 대통령 만들기’가 이번 대선에서도 재연될 조짐을 보여 왔으며, 만약 <중앙일보> 보고서가 ‘이회창 후보 지원용’으로 밝혀질 경우 이를 실증하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지난 9월 초부터 신문·방송을 모니터하고 있는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선감연)는 전반적으로 올해의 대선 관련 보도가 92년에 비해 공정성 측면에서 진일보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올해 들어 노사가 함께 공정한 대선 보도를 위한 지침을 만들어 시행에 들어간 방송사들의 경우 심지어 야당 편향의 보도가 눈에 띌 때도 있다는 것이다. 선감연 모니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1월7일 한 방송사는 신한국당 32초, 국민회의 53초, 국민신당 43초 식으로 뉴스 시간을 배분하는 ‘상식 밖(?)의 불공정’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야당 후보가 줄곧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사상 초유의 사태’ 앞에서 언론의 기회주의적 행태를 유감없이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최근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상승세를 보이면서 ‘대선 보도의 공정성이 전반적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선감연의 지적은 이같은 비판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선감연은 특히 이번 대선 보도에서 새롭게 등장한 불공정 보도 형태, 곧 ‘여론 조사 보도를 통한 특정 후보 밀어주기’에 주목했다(30~32쪽 딸린 기사 참조).

지난 9월20일 민간 기구인 선감연이 출범하는 자리에서 권혁남 교수(전북대·신문방송학)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언론은 현재의 3강 구도(이회창·김대중·이인제)를 2강 구도(이회창·김대중)로 압축해 가려 할 것이고, 이를 실현할 가장 유력한 수단은 여론 조사가 될 것이다.”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바닥을 면치 못하고 있던 시점에서 누구도 실감하기 어려웠던 예측이 결국에는 맞아떨어진 셈이다.

권혁남 교수는 ‘누가 이겼나’처럼 경마식 선거 보도를 선호하는 한국 언론의 속성에는 다자(多者) 구도보다 양자(兩者) 구도가 훨씬 적합할 수밖에 없다고, 이같은 예측이 나오게 된 배경을 밝혔다. 권교수는 일부 언론이 이를 ‘특정 후보 편들기’와 연계함으로써 더 큰 문제를 빚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이효성 교수(성균관대·신문방송학)는 “<중앙일보>가 비록 구설에 오르기는 했지만, 더 교묘하고 세련되게 편파 보도를 자행하고 있는 일부 언론 또한 주시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효성 교수가 문제 있다고 지적한 언론은 92년 대선 당시 ‘YS 대통령 만들기’라는 신조어의 주인공이었던 <조선일보>이다. 이교수는 이 신문이 5년 전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으나 ‘세련되고도 외곽을 때리는 방식으로’ 사설과 칼럼을 통해 특정 후보를 배제하는 수법을 쓰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표적인 예로 ‘반DJP 연합을 촉구한’ 류근일 칼럼(10월11일자 )에 대해 매체 비평지·언론 모니터 단체들이 비판을 퍼붓자 ‘그놈이 그놈’(11월8일자 <이상한 동거>)이라는 식으로 정치 허무주의를 조장해, 논점을 흐렸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92년에 견주어 일견 공정해 보이는 최근의 <조선일보> 보도 행태는, 노골적인 ‘특정 후보 편들기’가 다양한 성향의 독자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상업적 판단과, YS를 대통령으로 만든 뒤 별 ‘재미’를 보지 못한 경험이 한데 섞여 나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사내의 평가는 사뭇 다르다. 기자들은 92년 대선 당시의 경험 때문에 외부에서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조선일보> 정치부의 한 기자는 “스트레이트 기사에서만큼은 양적·질적인 균형을 거의 완벽하게 이루고 있다고 자부한다”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노동조합 또한 유사한 평가를 내리면서 ‘문제는 지금부터’라고 강조했다.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오르면서 편파적이거나 상식을 벗어난 기사 내용이나 편집이 등장하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공정하게 선거 보도를 해왔다고 자평하는 언론사 또한 ‘문제는 지금부터’라는 강박감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한 언론사 정치부장은 남은 선거 기간에 언론이 ‘전략적 투표 행위를 부추기는 행태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지난 몇 달 간의 ‘이인제 죽이기’도 이같은 맥락에서 진행된 측면이 크다는 것이다. 특정 후보(A후보)에 대한 반감과 ‘될 사람(C후보)을 밀어 주자’는 분위기를 교묘하게 조성해 지지 후보(B후보)를 바꾸게 하는 행태는 지난 대선에서도 등장했었다.

92년 대선 당시 한 유력 신문사는 간판 칼럼을 통해 ‘정주영 후보(당시 국민당)를 밀어주면 김대중 후보(당시 민주당)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다’며, 전략적 투표 행위를 노골적으로 부추겼다. 마찬가지로 대선 막바지에 발생해 YS에게 악재로 작용할 수도 있었던 이른바 ‘초원 복국집 사건’은 언론에 의해 ‘부산 기관장 대책회의’(11월15일)→‘부산 기관장 모임’(11월16일)→‘부산 도청 사건’(11월17일)으로 그 의미가 변질되어 갔다.

“차기 대권 노리는 언론 사주 있다” 소문

“권·언(權言) 유착은 이제 옛말이다. 무게 중심은 점차 ‘권력(權)’에서 ‘언론(言)’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라는 손석춘 기자(<한겨레> 매체부 차장)의 지적은, 언론이 권력 기구로 자리잡아 가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와 비례해 언론의 대통령 만들기 또한 92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대다수 언론인의 지적이다. ‘YS 장학생’으로 상징되는 특정 언론인이 앞장서고 기득권을 유지 또는 재생산하기 위해 언론사가 이를 지원했던 92년과 달리, 이번 대선에서는 일부 언론사가 권력의 정점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사운(社運)을 베팅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언론사 사주는 차기 대통령 출마를 내다보고 특정 후보에게 줄서기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이다.

이같은 언론 현실에서 “92년 대선 당시 대통령 만들기에 간여한 언론사는 결국 명실상부한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권위를 얻는 데 실패했다. 공정성과 불편부당성을 더 이상 인정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언론은 이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는 한 평기자의 지적은 공허한 울림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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