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연패 신화 도전하는 핸드볼 여전사들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6.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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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자 핸드볼, 구기 사상 첫 3연패 ‘예약’ 혹독한 훈련·강철 의지로 ‘국민의 무관심’ 극복
 
문향자 곽혜정 김미심 조은희 허순영 김정심 한선희 김 랑 김정미 오성옥 홍정호 오영란 박정림 김은미 이상은 임오경. 애틀랜타로 진격하는 한국 여자 핸드볼 ‘전사’들이다. 이들의 지휘관은 정형균(감독)·김갑수·윤태일(코치)이다. 이 명단에서 서너 명의 이름과 얼굴을 연결할 수 있다면, 그는 매우 예외적인 한국인이다.

익명의 여전사들. 개인이 아니라 팀으로 존재하는 여자 핸드볼 선수들. 최용수 박재홍 허재처럼 선수 이름이 그 팀과 종목을 대표하지 못하는 국가 대표 선수들. 그러나 한국을 벗어나면 사정은 완전 역전된다. 앞에 소개한 19명은 한국과 한국 여자 핸드볼을 대표한다. 세계 핸드볼의 최고봉이다. 배드민턴의 박주봉이 그런 것처럼.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3연패. 여전사들의 이름과 얼굴을 모르면서도 국민들은 애틀랜타올림픽을 앞두고 저마다 여자 핸드볼 3연패를 점친다. ‘연례 행사’. 여자 핸드볼팀의 적은 정작 고온다습한 애틀랜타의 기후 조건이나 유럽의 강호들이 아니다. 그들의 적은 국내의 차가운 무관심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난데없이 쏟아지는 국민적 성원이다. 이 응원 앞에서 그들은 난감하다.
핸드볼 경기장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질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한국팀은 작년 12월 올림픽보다 훨씬 어려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지난해 12회

 
대회에 이르기까지 한국팀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거둔 가장 좋은 성적은 82년의 6위. 그 이후에는 줄곧 10위권 밖이었다. 유럽의 강호 12개국을 포함해 20개국이 참여한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은 축구에서 월드컵을 거머쥔 것과 똑같다. 그러나 국내에서는(국내에서만) 이 기록을 주목하지 않았다.

이번 대표팀의 전력은 8년·4년 전보다 훨씬 강력하다. 바르셀로나올림픽 당시 3각 편대를 이루어 유럽팀 골네트를 뒤흔들었던 임오경·오성옥·홍정호 공격 트리오와 명수문장 문향자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여기에 겁없는 신세대가 대거 합세했다. 좌우 날개 김미심·이상은, 포스트 김 랑과 함께 구성될 정예 7명은 사상 가장 강력한 군단. 정형균 감독은 “날개가 조금 걱정되지만, 전체 전력은 바르셀로나 때보다 낫다”라고 말했다.

전력도 전력이지만, 올림픽 경기 조건도 세계선수권대회 때보다 유리하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2~13위를 차지한 유럽팀 가운데 헝가리 덴마크 노르웨이 독일만이 올림픽 본선에 올랐다. 전통의 강호 러시아와 난적 오스트리아가 지역 예선에서 탈락해 한국의 부담이 훨씬 줄었다. 참가국도 8개에 불과하다. 예선 세 경기와 준결승·결승전만 치르면 금메달, 3연패다. 그러나 핸드볼 선수들에게 가장 힘겨운 상대는 유럽 강호들이 아니다. “주변에서 <기네스북>에 오른다, 대기록을 작성하라는 격려가 오히려 부담이 돼 훈련이 고통스러웠다”라고 주장 임오경 선수는 말했다.

 
“눈물로 밥을 비벼 먹었다”


지난 7월3일. 태릉선수촌 핸드볼 대표팀의 시간표는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아침 6시 기상, 7시30분까지 체력 훈련, 10시~12시 웨이트 트레이닝, 오후 3시~6시30분 전술 훈련. 지난해 5월부터 본격 가동된 대표팀의 빈틈 없는 일정표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실내 온도 22℃. 대표팀의 훈련장은 애틀랜타 올림픽 핸드볼 경기장인 조지아월드콩그레스센터의 온도와 똑같다. “마루에 돈 떨어졌어? 앞 쳐다보고 손 들어!” “몸을 부딪쳐, 밀고 나가야지!” 정감독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린다. 그러나 훈련장에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감독의 지시대로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가끔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선수들도 있다. 마침 격려금을 들고 훈련장을 찾은 전 대표 선수 김순숙씨(연세대 강사·체육학)는 “나이가 어린데도 올림픽 2연패와 세계선수권 대회를 제패한 팀다운 노련함이 보인다”라며 대견해 했다.

대표팀 평균 신장은 172.8cm. 유럽 강호들보다 10~15cm 작다. 백인 선수들의 바위 같은 몸과 부딪치면 1~2m 나가떨어지기 십상이다. 구기 종목 가운데 몸싸움이 가장 심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밀리지 않는다. 혹독한 체력 훈련을 통해 차돌 같은 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형균 감독은 체력만큼은 자신있다고 말했다.

선수들의 몸무게가 평균 2㎏ 늘었다. 오랜 훈련을 통해 근육이 불었기 때문이다. “여자 유도와 함께 여자 핸드볼팀이 체력 훈련을 가장 열심히 했다. 이전 올림픽 때처럼 애틀랜타에서도 부상자 없이 결승전까지 무난히 치러낼 것이다.” 태릉선수촌에서 체력 훈련을 맡고 있는 김준성 위원의 말이다.

 
정형균 감독의 체력 훈련은 세계 최정상급. 매우 혹독하다. 선수들은 남자 선수들도 손을 내젓는 훈련을 감당해내야 한다. 날마다 15~20㎏짜리 모래주머니를 어깨에 메고 윗몸 일으키기를 했다. 1백20~1백30㎏에 달하는 역기를 들어올렸다. 현기증이 났고 눈앞에서 별이 왔다갔다 하기도 했다. 새벽, 운동장을 스무 바퀴 돌고 나면 땅바닥에 나뒹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정감독은 냉정했다. “다시 다섯 바퀴.” 눈물 때문에 아침밥을 들지 못하면 또 영락없는 불호령. 여전사들은 정감독 앞에서 밥에다 더운 눈물을 비볐다. 눈물 섞인 밥을 꼭꼭 씹어 삼켰다. 임오경 선수는 “감독님은 완벽함을 추구하신다”라는 말 한마디로 훈련 강도를 설명했다.

강인한 체력은 강력한 수비를 낳는다. 한국팀의 주특기는 ‘대각 변칙 수비’. 세계 무대에서 한국형 핸드볼로 공인 받은 이 수비는 정감독 작품이다. 유럽 장신 선수들이 가속을 붙여 우리 문전에 접근하기 전에 중간 차단하는 방식이다. 다른 팀 수비는 6m 라인 바로 앞에서 이루어지지만, 한국팀의 수비는 상대 선수들을 10m 밖까지 밀어낸다. 기다리는 수비가 아니라 공격하는 수비다.

 
발이 빠르고 몸놀림이 민첩한 한국 선수들은 공을 잡은 상대 선수에게 2~3명이 한꺼번에 벌떼처럼 달려든다. 일단 공을 빼앗으면 번개 같은 속공. 한 경기에서 7골 이상을 속공으로 따낸다. 유럽 선수들은 전광석화 같은 속공에 속수무책이다. 뛰어난 체력과 공격 집중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전이다.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덟 경기 중 세 경기를 후반에 뒤집었다. 그것도 유럽팀과의 싸움에서. 특히 헝가리와 맞붙은 결승전에서는 전반 9 대 11의 스코어를 후반 들어 25 대 20으로 역전시켰다.

반복에 반복을 거듭한 전술 훈련. 한국팀은 완벽한 세트 플레이를 구사한다. 태릉선수촌에서 1년이 넘도록 ‘지옥 훈련’을 해왔지만, 선수들은 그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지옥의 사자’를 존경한다. 감독의 지시를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과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의 주역이 지옥 훈련이었던 것.

우리는 여전사들을 또 잊어버리고 말 것인가

세계 무대에서 한국 여자 핸드볼팀은 영웅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찬밥’이다. 이 소외감이 더욱 불거지는 때가 바로 요즈음이다. 3연패를 바라는 국민의 기대감. 평소에는 냉정했다가 올림픽을 앞두고 3연패가 당연하다고 외쳐대는 매스컴도 불만이다. “어떤 종목보다 좋은 성적을 내왔지만 성취감은 시상대에서 끝난다. 관중석이 가득찬 인기 종목들을 보면 속이 상한다.” 그래도 3연패를 위해 죽기 살기로 땀을 흘린다는 한 선수의 하소연이다.

구기 종목으로는 유일하게 명실상부한 세계 정상. 그리고 대기록 작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여자 핸드볼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소 무관심은 아예 잔인하다.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 결승전은 겨우 녹화 중계되었고, 귀국 뒤 예정되었던 청와대의 초청도 ‘준비하라’는 지시만 들었을 뿐이다. 아시아 예선을 통과한 축구팀에게 보낸 국민의 환호, 대통령의 격려 전화, 각계에서 쏟아진 격려금, 그리고 농구장·야구장·축구장을 가득 메우는 관중은 이들에게 먼 나라 남의 일처럼 여겨진다. 한 전직 국가 대표는 “내 자식은 절대로 핸드볼을 시키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1910년대 북유럽에서 생겨난 핸드볼은 30년대에 한국에 도입되어 다른 종목보다 보급이 30년 가량 뒤졌다. 국내 인기 종목처럼 매니지먼트를 중요시하는 미국 스포츠가 아니고, 한국의 인기 종목이 미국의 영향권에 들어 있는 까닭에 핸드볼은 세계 무대의 빛과 국내에서의 그늘을 반복해 왔다. 핸드볼인들의 소망은 소박하다. 관중이 믿고 찾을 수 있는 전용 체육관을 서울에 하나 세워 달라는 것이다. 기존 체육관은 인기 종목에 다 빼앗겼다. 핸드볼 경기가 지방을 전전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래도 믿는 건 핸드볼이라는 말씀에 감사한다. 앞으로는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해 주셨으면 한다”라고 임오경 선수는 말했다. 이 젊은 전사는, 부담스럽기는 해도 순간의 관심이나마 고마운 것이다.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전국민은 텔레비전 앞에서 환호작약할 것이다. 대한의 낭자군 금메달, 사상 최초 3연패. 더불어 기뻐하는 것은 권리다. 그러나 서울올림픽,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그랬던 것처럼, 애국가가 끝나고 그들이 시상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국민들은 채널을 돌릴 것이다. 핸드볼 여전사들이 귀국하는 순간, 그들은 또 익명으로 돌아가야 한다. 애틀랜타올림픽 여자 핸드볼 3연패 앞에서 우리들은 과연 그들에게 박수를 보낼 자격이 있는 것일까. 또 하나의, 그러나 그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여자 핸드볼 결승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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