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재창출을 위해 4대 프로젝트 추진
  • 김 당·李敎觀 기자 ()
  • 승인 1997.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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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 북한 투자·식량 지원·황장엽 망명·정상회담… 정권 재창출 위해 밀어붙여
김현철씨(38)는 △한보의 대북 투자사업 △한보와 관련된 미국 곡물 메이저 카길사의 대북 곡물 판매 △황장엽 비서 망명 △남북 정상회담 메시지 전달 등 네 가지 대북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 중 한보의 대북 투자사업을 제외한 세 건은 모두 96년 9월 김씨가 중국을 방문한 것과 관련이 있다. 또 한보 관련 프로젝트는 최근 김씨의 자금 관리인 박태중씨가 한보철강 대리인으로 나서 독일 SMS사와 열연설비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거액의 리베이트를 받아 해외에 도피시켰다는 의혹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지난해 김현철씨 및 그의 측근 인사들이 중국과 홍콩을 방문한 시기에 돈 세탁을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그것인데, 이는 국정조사의 핵심 과제인 김씨와 한보와의 커넥션을 밝힐 새로운 단서로 떠오르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는 역시 효자였다. 김씨는 케이블TV 및 지역 민방 선정, 고속도로 휴게소 입찰건 같은 이권 개입뿐만 아니라 4·11 총선 공천 및 남북 관계에도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실상 국정 전분야에 걸친 김씨의 이같은 개입은 궁극적으로 신한국당의 정권 재창출을 통해 아버지의 퇴임 이후 안전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87·92년 두 번의 대선에서 선거 참모로서 아버지를 도운 김씨는, 현정부 출범 후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냉엄한 정치 현실과, 정치적 역학 구도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5년 단임제 대통령의 퇴임 후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특히 정권 재창출을 위한 수단으로 남북 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의혹에서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 남북 관계에 깊이 개입한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청와대·안기부 등에 포진한 김씨의 공·사 조직 라인이 결합된 김씨 캠프(대선 기획팀)에서는, 차기 정권 재창출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정상회담 추진 같은 남북 관계의 획기적 개선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안기부의 한 관계자는 현철씨가 개입한 정황을 이렇게 밝혔다.

“김영삼 정부의 정권 재창출을 위한 핵심 과제는 경제난을 해소하고 노태우 정부 때보다 더 악화한 남북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난은 어차피 국제 경제 동향과 맞물려 있는 구조적인 문제인 데다가 현정권 말기에는 경기가 회복기에 접어들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경제 전망이었다. 따라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악화한 남북 관계를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김현철 대선 기획팀 사령탑은 ‘K2 핵심’ 이원종·오정소

이 관계자에 따르면, 대선 기획팀의 사령탑은 현철씨의 모교인 경복고 출신을 지칭하는 이른바 ‘K2 인맥’의 핵심 인사인 이원종 전 정무수석과 오정소 전 안기부 1차장이었다. 역시 현철씨의 K2 인맥으로서 재정경제원 차관 시절 전금철 북한 조평통 부위원장과의 쌀회담에 대표로 나섰고, 지금은 한보 대출 압력 의혹을 받고 있는 이석채 전 경제 수석도 현철씨가 관여한 대북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씨의 대북 프로젝트에 참여한 핵심 실무진은 안기부의 ㅇ단장, 청와대 민정수석실 최동렬 비서관(36), 최근 정무수석실에서 무적(無籍) 근무해온 사실이 밝혀진 정대희 행정관(34) 등으로 알려졌다. 이들말고도 3당 합당 뒤 김씨가 소장으로 있던 중앙조사연구소를 확대 개편한 민주사회연구소 출신으로서 청와대에 행정관으로 입성한 조청래(정무)·정상환 과장 등도 김씨가 심어 놓은 ‘눈과 귀’로 알려져 있다.

안기부의 대북 부서인 ㅇ실에서 근무하면서 안기부 공조직을 가동해 현철씨의 대북 프로젝트를 도와온 ㅇ단장은 현재 안기부에서 나와 ㄱ산업 대표로 있다. 부산 동아대 학생회장 출신으로 통일민주당 부산시지부 청년부장을 지낸 최동렬 비서관은, 역시 청와대에 근무하다 4·11 총선에 출마한 고려대 학생회장 출신 신한국당 김영춘 서울 광진 갑 지구당위원장과 함께 현철씨의 핵심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현철씨의 자금 관리인이라고 알려진 박태중씨가 설립한 (주)심우 비서실에서 부장으로 근무해온 정대희씨는, 현철씨의 천거와 이원종 전 정무 수석의 요청으로 지난해 10월부터 정무수석실의 정무기획비서실 행정관으로 ‘무적’ 근무해 왔다. 현철씨의 고려대 후배로서 현철씨의 비서실장 노릇을 해온 정씨는, 현철씨의 국정 농단 행위가 도마 위에 오르자 잠적했다.
정권 재창출 프로젝트를 수행한 대선 기획팀에는 이들말고도 현철씨와 이원종 전 수석 및 오정소 전 차장과 가까운 ㅇ·ㄱ씨 등을 포함한 30대 소장파 정치컨설팅 그룹이 결합되어 있었다. 지난해 <신동아> 9월호가 ‘여권 사조직의 청와대 비밀 보고서’라는 제목으로 폭로한 적이 있는 문제의 보고서를 작성한 여권 사조직이 바로 이들과 관련되어 있다. 당시 기사에서 ‘과거 학생 운동권 출신으로 지금은 여권에 가담한 소장파 개혁 세력의 일원’으로서 ‘정무 파트’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한 이 보고서 중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남북 관계 대책’에 관한 내용이다.

북한의 내부 변화를 가상해 우리 정부의 권력 구도와 연계해 시나리오를 작성한 이 보고서에는, 남북 관계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대목이 자주 언급되어 있다. 이를테면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될 경우 아(我)측에서는 집권 후반기를 통일 분위기로 주도할 수 있다 △정상회담은 국내 현안 및 DJ·JP의 정략 정치를 압도할 수 있는 파괴력이 있다 △남북 정상회담은 가능한 한 빨리 성사시키는 것이 좋다고 판단된다 같은 ‘정략적’ 표현들이다.

대선 기획팀은 한보·김현철 커넥션 의혹이 불거지기 전까지만 해도 위 보고서의 연장선에서 정권 재창출 및 대북 프로젝트 추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왔다. 단계별 시나리오를 상정한 이 보고서의 핵심은 역시 남북 정상회담을 통한 정권 재창출이다. 그러나 현철씨를 정점으로 한 이 사조직들은 한보 사태 와중에서 K2 라인의 핵심 인사인 오정소 차장과 이원종 정무수석이 경질됨으로써 2월 말까지 해체되고 하나만 남았는데, 이 하나도 청산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 사조직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이 팀이 (보고서를) ‘버전 업’하는 과정에서 한보 사태가 터져 더 진행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철씨의 공·사 조직이 ‘앉아서’ 정권 재창출 및 대북 프로젝트 추진에 관한 보고서만 작성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실제로 사업을 추진했다. 그 움직임은 현철씨의 96년 9월 중국 방문 일정(9월4∼14일)에서 확인된다. 현철씨 부부와 그의 측근인 최동렬 비서관 부부를 포함해 8명이 동행한 중국 방문에는 비서실장 격인 정대희 행정관과 중간에 합류한 박상희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그리고 두 비서관과 가까운 사업가 조 아무개 회장이 동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이틀간 투숙한 연길 대우호텔 관계자는 “현철씨 일행은 숙박부에 가명을 썼으며, 일정은 중국을 자주 드나드는, 경상도 사투리를 억세게 쓰는 40대 중반 남자(조 아무개 회장)가 관리했다”라고 밝혔다.

김현철, 한보에 대북 투자 권유

당초 현철씨 측근들은 중국 방문 자체를 숨겼다. 그러나 현철씨 관련 녹음 테이프를 공개한 G남성클리닉 박경식 원장에 따르면, 김씨 일행은 9월4∼14일 중국을 방문했다. 박원장은 “당시 메디슨 사건 때문에 현철씨가 중국에 가기 전날 그를 만났고, 중국 갔다 오자마자 다시 만났기 때문에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최동렬 비서관은 처음에는 중국 방문 자체를 부인했지만 나중에는 “아내와 함께 중국에 휴가 여행을 다녀왔다”라고 정정했다.

김씨의 한 측근은 “당시 김소장(현철씨)은 북경대 총장과 면담하고 대학 강의 문제를 타진했다. 북경 체류 뒤에는 백두산 등반을 위해 잠시 연길에 머무른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김씨 일행은 연길(백두산)-북경-서안(西安)-계림(桂林)으로 이어지는 중국 방문 기간에 중국 공안으로부터 1급 경호를 받았다. 백두산 일정은 당초 계획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씨 일행이 연길에 나타나기 불과 이틀 전에 중국 공안이 급작스레 김씨 일행의 숙박지인 연길 대우호텔에 대해 보안작업을 서둘렀던 것도 이 때문이다. 또 김씨 일행은 청와대 경호실 요원 2명의 경호를 받으며 움직였고, 중국내 전체 일정 관리는 주중 한국대사관 김 아무개씨가 주도해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왜 김씨 측근들은 중국 방문 목적과 일정을 감추려 했을까. 또 연길을 방문한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 이들은 북경뿐만 아니라 서안·계림 같은 관광지를 여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는 ‘관광을 위장한 일정 관리 여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위장 여행’을 할 만큼 중요한 방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김현철씨는 그동안 △한보의 대북 투자사업 △한보와 관련된 미국 곡물 메이저 카길사의 대북 곡물 판매건 개입 △황장엽 비서 망명 개입 △정상회담 메시지 전달이라는 네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그 중 한보의 대북 투자사업은 95년부터 추진된 것이고, 나머지는 김씨 일행의 방중 기간에 진행되었다.

한보의 대북 투자사업에 김씨가 개입한 부분은 그동안 설(說)로만 떠돌던 김현철-한보 커넥션을 밝혀 주는 새로운 단서이다. 김씨는 95년 10월께 한보그룹으로 하여금 비자금을 이용해 북한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에 대규모 투자를 하도록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이 비자금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한보·김현철 커넥션의 의혹을 밝힐 중요한 단서임에 틀림없다. 비자금의 출처로 추정되는 곳은 대략 세 가지이다. 우선 <한겨레> 신문이 의혹을 제기한 대로, 92년 대선에서 선거 자금을 관리한 김현철씨 캠프가 한보에 자금 관리를 위탁한 ‘쓰고 남은 대선 자금’일 가능성이다. 또 하나는 김씨가 독일 SMS사로부터 받았다고 의혹을 받고 있는 ‘리베이트 자금’의 일부일 가능성이다. 마지막으로 대출받은 설비 자금에서 빼돌린 한보의 ‘순수한 비자금’일 수도 있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 서울에 온, 한보의 대북 합작 투자사업 파트너였던 연변 소재 용흥집단공사 최원철 회장의 말에서 확인되었다. 최회장은 3월12일 “김현철씨가 인사에 개입한 것과 관련해 여론의 질타를 당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중국과 북한에서는 그런 일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라면서 “한보그룹과 용흥집단의 대북 투자계약 과정에서 김씨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라고 밝혔다. 최회장에 따르면, 한보그룹 정태수 총회장이 나진·선봉 지대에 대한 대규모 투자사업을 제안해와 일단 시범으로 한보가 5억원을 투자해 운수업을 함께하기로 계약했으며, 이 과정에서 김씨가 수 차례 최회장을 만나 한보의 대북 진출을 적극 도와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최회장에 따르면, 95년 10월 계약 당시 한보측(정태수 총회장과 김태승 한보경제연구원 부회장)은 대북 투자 자금이 비자금인 점을 감안해 위장 중소기업을 대리인으로 내세웠다(최회장은 계약자를 밝히지 않았으나 한보의 위장 계열사인 세양선박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최회장은 계약 이행을 한보가 보증한다는 이면 계약을 했고, 계약 과정에서 김현철씨를 수 차례 만났다고 말했다. 그런데 계약 체결 직후 정회장이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바람에 이 계약은 이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회장의 진술은, 한보 배후의 ‘몸체’라는 의혹이 일자 정태수 회장과 만난 적이 없다고 부인해온 김현철씨의 진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이에 대해 한보그룹 고위 관계자는 <시사저널>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당시 정태수 회장이 전담했던 일이라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고 전제하고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으며, 다만 계약 당사자는 한보가 아니라 다른 중소기업인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이 고위 관계자는 그 과정에서 김현철씨가 개입했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고 말했지만, 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김덕홍 만나 황장엽 망명 최종 확인

김현철씨가 황장엽 비서 망명에 개입했다는 의혹은 일본 언론에서 먼저 제기되었다. 또 <신동아> 최근호(4월호)도 NHK 방송 보도를 고리로 삼아 추적한 ‘김현철 대리인 박태중, 황장엽 만나 망명 확인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시사저널>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황비서를 만난 사람은 박태중씨가 아니고 김현철씨가 황비서의 측근인 김덕홍 여광무역사장을 만났던 것으로 파악된다. 장소는 북경이고 시기는 김씨의 9월 방중 기간이다(3월22일 국민회의 김원길 의원이 공개한 박태중씨의 출입국 자료에 따르면, 박씨는 △93년 7월15∼18일 △95년 7월20∼22일 △96년 6월16∼19일 △96년 8월24∼26일 등 네 차례 홍콩을 다녀왔다. 이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현철씨 일행이 방중하기 직전인 8월 일정이다. 김의원도 이와 관련해 박씨가 홍콩에서 돈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믿을 만한 제보를 입수했다며, 이 자금이 한보 리베이트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 경위는 이렇다.

당시 북경 소재 여광무역회사 김덕홍 사장과 접촉 승인을 받은 국내 기업은 2개뿐이다. 그중 하나가 50대 초반 여성 사업가 김 아무개씨가 대북 사업 고문을 맡아온 ㅊ산업 ㅈ사장이다. 김씨가 대북 사업을 하면서 김덕홍 사장을 만나 황비서의 망명 의사를 전해 들은 시점은 95년 하반기였다. 그후 김씨는 96년 3월 현철씨한테 이를 알렸고, 현철씨는 중국 방문 기간(9월)에 북경에 들러 김덕홍 사장을 접촉해 황비서의 망명 의사를 최종 확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철씨의 중국 방문 이후 김씨를 동행했던 측근들은 ‘큰 일을 하고 돌아왔다’는 말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황비서의 망명 의사를 누구보다도 먼저 파악하고 있던 안기부 실무진은 당초 황의 망명이 ‘이벤트 상품’이 될 수는 있지만 남북 관계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해 신중히 대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안기부 일부에서는, 김기섭 전 운영차장이 현철씨에게 고급 정보를 보고했듯이, 황비서가 망명 의사를 가지고 있다는 특급 정보를 조직 내부에서 누군가가 김씨에게 제공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씨 측근의 말대로 ‘큰 일을 하고 돌아온’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결국 특정 사조직이 국가 정보기관의 특급 정보를 중간에서 가로채 개입한 셈이다. 현철씨가 황비서 망명 등 대북 사업에 개입한 데는 안기부 ㅇ실 ㅇ단장이 이끈 일부 조직이 적극 지원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같은 지원은 안기부의 조직 생리상 적어도 오정소 전 차장 또는 그 이상 직급자의 지시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가 정보기관의 사조직화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방중 기간에 김씨한테는 황비서의 망명을 타진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있었다. 그것은 김씨가 김대통령 취임 초부터 아버지의 재임 중 업적으로 만들기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여온 남북 정상회담 추진이었다. 김씨가 남북 관계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는 데 모종의 역할을 하려 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일이다. 김씨의 사조직은 94년 남북이 합의한 정상회담 준비 작업과 95년 북경 쌀회담에도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회담에 참여한 한 인사는 “중간에 현철씨 비선 조직이 치고들어와 애를 먹었다”라고 술회했다.

<시사저널>이 특종 보도한 ‘청와대 밀가루 북송’ 기사에서도 암시했지만, 그 배후는 김씨였을 가능성이 크다. 김씨는 당시 밀가루 사업을 중개한 김양일씨(전 미주한인식품상총연합회 회장)와 김 아무개 교수 등 재미 동포를 대북 밀사로 활용했다. 안기부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김양일씨는 당시 오정소 1차장의 일정 관리 아래 극비리에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중요한 프로젝트를 추진했는데, 그것은 현철씨와 청와대 전·현직 비서실장의 요청에 따른 남북 정상회담 추진을 위한 막후 밀사 역이었다.

“97년 5월께 정상회담 열자”

김현철씨가 9월 북경 체류 기간에 카길사 대표들과 극비 회동해 대북 쌀 판매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 방안을 협의한 목적도 정상회담 실현을 위해서였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김씨는 연길 대우호텔에서 묵은 동안(9월4∼5일) 북한 당국에 영향력이 큰 것으로 알려진 연변 조선족자치주 남상복 부주장과 연변 대학 방문일 총장을 만났으나 그 목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씨는 이후 북경에서 머무른 9월8일 김정일 비서의 매제이자 핵심 측근인 장성택 제1부부장(노동당 조직부)의 측근과 접촉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김씨는 이 접촉에서 97년 5월께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의 대선 기획팀이 작성한 보고서는 정상회담 시기를 △96년 8월15일 △97년 초 △97년 중반이 적합하다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가 버전 업되기 전의 재임 중 마지막 기회가 97년 중반이다. 아버지의 대통령 취임 이후 공식 직함을 한번도 갖지 않았던 현철씨가 중국 방문 직후에 유엔한국청년협회 회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처음으로 가진 것도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열정과 효심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안기부의 한 관계자는 “현철씨가 대선 자금이나 리베이트 자금을 비축했다면 그 돈으로 정치권에 자기 사람을 심고 정상회담을 실현시켜 아버지의 퇴임 이후를 확실하게 보장받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결국 현철씨의 비극은 스스로 개혁 세력을 자임했으면서도 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의 그것과 닮은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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