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첩보전은 분석관이 승패 좌우
  • 이정훈 기자 ()
  • 승인 1996.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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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분석·상황 예측 능력이 승패 좌우…한국, 인적 정보·기술 정보 북한에 앞서
 
지난 10월1일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최덕근 영사가 피살되고, 다음날 정전위 비서장급 회의에서 박임수 북한 대표가 “인민군은 남한에 보복하겠다. 미국은 우리의 보복에 관여하지 말라”고 협박한 후, 국방부가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발령하는 등 남북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북한은 잠수함을 이용해 공작원을 침투시킨 것이 명확한데도 왜 협박을 계속하는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열전(熱戰)에 열전을 거듭하는 남북한 첩보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선(戰線)도 없고 총성도 없이 확전 일로를 치닫고 있는 남북한 첩보전에서 핵심 분야는 △상대 군사력에 대한 정보 파악 △상대 최고 지도자의 의사 결정 파악 △상대 내부 모순을 극대화시켜 자체 분열을 유도하는 공작 활동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세 분야 중 군사 정보 수집은 군 정보기관이, 최고 지도자의 의사 결정 파악은 안기부와 같은 전문 정보기관이 주로 맡는다. 상대 진영을 교란하는 공작은 북한 로동당 산하 통일전선부와 사회문화부 등이 관여한다고 한다.

김정일 목소리 듣고 당뇨병 상태 파악

강릉에 침투한 공비 소탕 작전을 지켜본 국민 중에는 ‘우리도 북한에 공작원을 파견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붙잡혔다는 이야기가 없을까’ ‘북한은 활발히 공작원을 보내는데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품은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정보 관계자는 “매년 수백 명씩 탈북자가 나와 갖가지 정보를 전해 주는데 따로 공작원을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북한은 월북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공작원을 남파하는 것이다. 앉아서 정보를 구하는 것이 한국이라면, 무리해서 공작원을 보내야 하는 것이 북한이다. 남북한의 경제력 격차만큼 수세에 몰리고 있는 것이 북한 정보기관이다”라고 말했다.

정보 요원에는 특수 목적을 위해 적지에 침투하는 공작원, 수많은 사람을 만나 정보를 수집하는 수집관, 수집된 정보를 분석하는 분석관 등 다양한 전문가가 있다. 첩보 세계에서는 상대의 능력을 떠보거나 속이려고 거짓 정보를 흘리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수집된 첩보가 과연 사실인지를 가려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확한 정보를 가려냈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 상대의 움직임에 대한 예측이 틀려버린다면 의미가 없어진다. 따라서 정보를 분석하고 향후 상황을 판단하는 분석관이 정보기관의 능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원으로 꼽힌다.

 

분석관은 외부 활동이 적기 때문에 드러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안기부의 경우 분석관은 이 분야에서 30년 넘게 종사한 50∼60대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담당 분야의 기사가 실린 국내외 신문과 방송·잡지를 스크랩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한다. 이어 수집관이 보내온 보고서와 귀순자로부터 나온 자료, A-3 방송 등 대남 지령 방송을 종합해 대조·검토하면서 어느 것이 사실인지를 가려낸다. 때로는 감청부대가 감청한 김정일의 목소리를 듣기도 하는데, 노련한 분석관은 이 목소리만으로도 전날 밤 김정일이 술을 먹었는지 여부와 그의 당뇨가 심해졌는지를 가려낸다고 한다.

강릉 침투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반인은 해안 방어망이 뚫리고 한국군 전사자가 발생하는 등 우리측 피해 사실에 주목하겠지만, 분석관은 북한 정찰국장이나 김정일 입장에서 이 사건을 보려고 노력한다. 북한 처지에서 강릉 침투 사건은, 잠수함이 좌초하고 이광수의 진술로 정찰국의 실체가 한국에 알려지는 등 커다란 손해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 지도부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일까를 판단하는 일이 분석관의 임무인 것이다.


북한 분석관, 김정일 입맛에 맞는 보고만

따라서 남북 첩보전은 남북한 분석관 간의 두뇌 싸움으로 축소할 수가 있다. 한 정보 관계자는, 분석의 마지막 단계인 판단은 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이루어진다며 “5공 시절 김일성 사망설이 유포되었을 때 국방부는 휴전선의 대남방송을 듣고 대통령에게 김일성이 죽었다고 보고했지만, 안기부는 여러 정황을 종합한 뒤 죽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당시 안기부는 △예정되어 있던 김일성의 공식 행사가 취소되지 않았다 △1급 비상령이 하달되지 않았다 △북한 주민 생활이 전시 체제로 전환되지 않았다는 극히 상식적인 이유로 이같이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북한 정보기관에서도 분석관은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한 정보 관계자는 지난 7월 검거된 교수 간첩 무함마드 깐수가 서울에 주재한 북한 정보기관의 분석관이었다고 정의했다. 그는 “연례 행사처럼 발생하는 한국의 학생 시위와 노사 분규를 북한에서 바라본다면, 한국에 적잖은 동조 가능 세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공작원을 파견해 지하당 구축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무너질 것만 같던 한국은 고도 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여기서 북한은 한국 정세 분석이 북한 입장에서만 이루어졌다고 판단하고, 머리가 좋은 깐수를 선발해 국적 세탁을 거쳐 서울에 잠입시킨 것이다”라고 말했다.

깐수의 보고서에 대해 북한 정보기관은 내용이 매우 좋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동아> 10월호에 실린 깐수의 한국 정세 보고서는 국내 언론의 정세 분석과 거의 흡사해 특별히 눈에 띄는 부분이 없다. 한국군의 정찰기 도입에 관한 보고서 역시 신문에 1차 보도되고, 이어 국방 전문지가 심층 보도한 것을 종합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깐수 보고서가 호평을 받았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북한 분석관이 김정일 등 북한 지도부의 입맛에 맞는 보고만 해왔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가 있다.

분석의 전 단계인 정보 수집에서도 북한은 한국에 뒤지고 있다. 지난 6월 말 한국군은 한반도 전역을 대상으로 신호·영상 정보를 수집해 분석할 수 있는 정찰기를 도입키로 하고, 미국 레이티온사의 호커 800XP를 대상 기종으로 선정했다. ‘백두·금강 사업’이라고 불리는 이 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한국군은 2000년에 정찰기 10대를 갖게 되어, 근접 정찰기 RC-7B 등을 운영하고 있는 현재 주한미군 수준으로 정보 수집 능력을 보유하게 된다. 이처럼 한국은 인적 수단 위주의 정보 수집에서 기술적 수단을 통한 정보 수집으로 발전하고 있으나, 북한은 고정 간첩과 공작원 등 인적 요소 위주의 첩보 수집을 계속하고 있다.

남북 첩보전의 기술 격차는 강릉 지역의 무장 간첩 소탕 작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 육군 관계자는 그 근거를 간첩들이 반경 15㎞ 내 좁은 지역에서 사살 또는 생포되고 있는 점을 꼽았다. 그는 사건 발생 보름이 지났는데도 간첩들이 반경 15㎞라는 좁은 지역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북한으로부터 통신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 정보 관계자는 78년 충남 광천 침투 사건 때 북한은 한국군의 교신 내용을 완벽히 감청해 침투조에게 안전한 도주로를 알려준 적이 있다. 강릉 사건에서는 한국군 특수부대가 강력한 전파 방해 작전을 펼쳐 북한의 통신 감청을 막았다고 밝혔다.

북한, 테러 일으킬 가능성

북한은 상대 진영의 모순을 극대화하는 공작 활동을 하는 데 한국내 양심 세력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 정보 전문가는 분석했다. 양심 세력으로 하여금 ‘북한 주민도 우리 동포니 도와줘야 한다’며 정부의 대북 강경 노선을 비판토록 하는 것도 북한의 교란 작전에 포함된다는 분석이다. 이에 맞서 한국은 중국·러시아 정부와의 관계를 밀접하게 해 북한을 고립시키려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한국에 호감을 가진 중국과 러시아의 고위 관계자가 북한 고위층을 만나 “한국식 발전 모델을 채택하는 것이 북한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충고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듦으로써, 북한 지도부로 하여금 체제에 대해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다.

핵 개발 의혹으로 고립이 심해지던 94년에 북한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해 고립에서 탈출하고 제네바 합의를 끌어낸 바 있다. 이번 강릉 사건을 계기로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규탄이 계속되자 북한은 한국에 백배 천배로 보복하겠다고 위협하는 벼랑끝 전술을 다시 구사하고 있다. 그러나 남북한 첩보 전쟁에서 북한이 서서히 밀리고 있어, 이번 벼랑끝 전술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다수 전문가의 의견이다. 따라서 북한은 위험 부담이 큰 국지전보다는 테러 같은 비군사적 충돌을 일으켜 그들의 말이 헛말이 아님을 증명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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