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없이 성장 없다” 뚜껑 열린 ‘노무현 노믹스’
  • 장영희·이숙이 기자 ()
  • 승인 2004.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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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경제 살리기를 집권 2기 최대 과제로 삼고 개혁과 성장 두 토끼 몰이에 나섰다. 직무 정지 기간 경제 학습에 매진했던 노대통령의 ‘경제 올인’은 성공할 것인가.
‘이제는 경제다.’ 노무현 대통령 집권 2기 국정 운용 방향이 윤곽을 드러냈다. ‘이제는 경제’라는 선언에는, 정치에서는 한 걸음 물러서되 경제는 앞줄에서 챙기겠다는 노대통령의 의지가 담겨 있다.

지난 5월15일 노대통령은 청와대 본관 입구에서 가진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을 통해 자신은 ‘국정의 안정적 관리자’로서 경제 회복에 전념하겠다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경제가 살아나지 않아 서민들의 고통이 말할 수 없이 큰 것을 잘 알고 있다며, 당면한 민생 경제의 어려움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주사 몇 대로 당장 일으켜 세워서 걸어라 뛰어라 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비유하며, 단기 부양책을 쓰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실질적인 효과가 있는 정책을 내놓아 어려움을 타개하겠다는 것이다. 5월11일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이 ‘일시적 경기부양책과 몇 발짝도 못 가 발병 나는 성장 정책을 펴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당초 사전에 배포된 원고에는 경제 분야에 3분의 1 가량을 할애했으나 실제 낭독에서는 절반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노대통령은 경제 분야에 역점을 두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국민에게 사과한다는 연설문의 필수 항목을 빼면 거의 대부분을 경제 문제에 할애했다. 집권 2기를 경제에 ‘올인’했다고 해석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노대통령의 경제 올인 선언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대통령으로서 업무가 정지된 63일 동안 노대통령은 경제 공부에 매달렸다는 후문이다. 비서실이 취합한 경제 동향을 수시로 점검한 것은 물론 경제 일반에 대한 ‘심화 학습’도 병행했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은 조윤제 경제보좌관과 몇몇 경제학자들과 함께 미시·거시 경제라는 경제학 원론을 파고들었으며, 존 메이너드 케인스나 조셉 슘페터의 경제 이론도 화제에 올렸다고 한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특히 성장 잠재력 배양과 직결된 기술 혁신과 인재 양성, 비정규직 문제 따위의 노사관계 현안, 기업 투자와 일자리 창출 방안 등을 둘러싸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고 귀띔한다. 헌재 결정이 나기 전날인 5월13일에도 노대통령은 경제 정책 당국자들과 저녁을 들며 대국민 담화문에서 밝힐 경제 구상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직무 정지 기간에 노대통령은 <기술 강국 2만 달러 시대> <동아시아의 경제 변화와 국가 역할> <경제 전쟁 시대 이순신을 만나다> 따위의 경제 서적도 읽었다고 한다.

직무 정지 기간에 노대통령은 경제 브레인이나 경제학자 들과 토론만 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4년, 집권 2기 동안 펼쳐갈 ‘경제 비전’을 완성했고 이것을 몇몇 컨설팅 회사에 검토를 의뢰했다는 것이다. 컨설팅 회사의 한 컨설턴트는 “지난 1년 동안 로드맵 등에서 선보이거나 언급했던 정책과 개혁 과제가 대부분이어서 크게 새로울 것은 없었으나.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라고 전했다.

경제 올인을 선언한 노대통령이 복귀 첫주 행보를 경제 챙기기로 시작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노대통령은 5월17일 이헌재 경제 부총리 등 경제 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제 상황 점검 회의를 주재했다. 최근 거시 경제와 금융 시장 동향, 중소기업 경영난 등 당면 현안을 점검하고 대책을 논의한 것이다.

경제계 인사들도 만난다. 5월21일 먼저 중소기업 경영자들을 초청하며 5월25일께는 삼성·LG·SK·현대자동차 등 재벌 총수를 포함해 최고경영자들과 회동해 경제 불안 심리 해소와 함께 적극적인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노력해 달라고 당부할 예정이다.

집권 2기 경제 정책은 변화가 있을까. 5월16일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 총회에 참석한 이헌재 부총리는 “지금 정부가 쓰고 있는 경제 정책은 지난해 말과 올해 초 만든 기본 방향에 의한 것이다. 대통령 업무 복귀로 경제 정책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는 정부와 여당에서조차 분분했던 개혁이냐, 성장 우선(실용주의)이냐에 대한 논쟁에도 큰 방향성을 제시했다. 경제 회생의 방법론이 성장우선론이 아니라 ‘개혁을 통한 성장’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은 담화에서 “경제(운용)는 원칙에서 출발해야 하며 어려울 때일수록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현장의 경제 문제가 모든 것을 덮어버려서는 안된다”라고 밝혔다.
노대통령은, 지난 1년 간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준비했지만, 앞으로 4년 간은 ‘대통령 프로젝트’를 ‘또박또박’ 실천해 가겠다는 의지도 피력했다. 시장 개혁과 정부 혁신, 동북아 경제 중심과 지역간 균형 발전 과제, 기술 혁신과 인재 양성 같은 7대 과제를 뜻한다. 대통령 위원회 방식으로 추진되는 이런 과제들은 성장 잠재력을 높여 지속적인 성장을 이끌어내고 비정상으로 뒤틀린 부분을 바로잡는 것들로 참여정부의 개혁 색채를 드러낸다. 이미 단계적 이행 방안이 나왔거나 성안을 눈앞에 두고 있어 실천만 남은 것이다. 노대통령이 ‘우리 경제는 혁신주도형 경제로 발전해 가야 하며 시장과 공공 부문이 이제 혁신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아가 노대통령은 최근 보수 언론과 논객들이 집중 유포한 경제위기론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자기에게 불리한 정책을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거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위기를 확대 주장해 국민 불안을 조장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 대목은 사전에 배포된 원고에는 없던 것이다. 원고에는 ‘우려되는 징후를 너무 과장되게 인식하고 과잉 반응을 하게 되면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표현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재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경련과 대기업들은 겉으로는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의례적 언급이 아니겠느냐는 반응을 보였지만,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경제가 어려운데 공정거래법으로 규제해야 하느냐며 정치권과 정부에 강력 반발했던 것을 겨냥한 발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담화 직후 긴급 회의를 가진 전경련에서는 대통령의 ‘안이한’ 현실 인식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성장과 개혁을 대척점에 놓았던 전경련은 이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성장 잠재력을 확충하려면 각계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 합리적· 효율적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며 한 발짝 물러서는 성명을 냈다. 또 일단 청와대를 자극하는 언동은 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가 추진하는 노대통령과 20대 그룹 경영자 회동에 적극 협력하고 6월10일 예정된 ‘기업투자 국민보고대회’ 준비에 역점을 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1월19일 출국해 미국·일본 등에서 4개월째 머무르고 있는 삼성 이건희 회장과 중국을 방문한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곧 귀국할 것으로 보인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5월7일 입법 예고한 출자총액제한 제도 유지 및 재벌 계열 금융사 의결권 축소라는 공정거래법 관련 이슈는 노무현 정부의 개혁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개혁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재계가 대표적인 개혁 조처로 여기며 극력 저지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전경련은 출자총액제한 제도가 투자를 어렵게 하며 외국계 투자자의 적대적 합병·매수 시도에 맞서 경영권 방어를 할 수 없게 하는 ‘역차별’ 규제이므로 폐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해왔다.

과연 그럴까. 공정위 이동규 독점국장은 “출자가 투자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지난해 한국개발연구원에 상관관계 연구를 의뢰했는데 그 결과가 유의미하지 않게 나왔다. 무엇보다 지난해 수차례 재계에 투자를 방해받는 사례를 적시해주면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나 별로 가져오는 것이 없었다”라며 투자 걸림돌이라는 재계의 주장을 일축했다.

상대적으로 공정위보다 재계 편에 가깝다는 재경부의 이헌재 부총리조차 출자총액 규제로 투자가 제약받는다는 사례를 한 건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산업자원부 김종갑 차관보는 투자가 부진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규제 탓도 있지만, 기술 재편기여서 어디에다 투자해야 할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주요인이다. 투자의 불확실성 증대는 한국 기업뿐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출자총액제한제는 이미 예외 조항이나 적용 제외 조항이 절반 가까이 되어 규제의 실효성이 적다는 비난이 높았다. 이번에도 공정위는 입법 예고 전에 신기술 관련이나 10대 성장 동력 산업 관련 출자를 아예 제외했다. 또 재계는 이미 지난해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을 협의하는 자리에 참여해 자신들의 이해를 상당히 반영했다. 한마디로 출자총액제한 때문에 투자하기 어렵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재계는 출자총액제한 제도가 투자의 발목을 잡는다며 공세를 취했던 것일까.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상조 소장은 “일종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벌이는 것이다. 투자를 앞세우면 여론에 호소해 정부를 움직이기 쉽기 때문이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경제위기론의 이데올로기부터 극복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김소장은 또 한국 사회에 주기적으로 유포된 경제위기론의 주창자가 누구였는지 돌이켜 보라며, 개혁을 성장의 대립물로 보는 것 자체가 기득권 세력의 이데올로기라고 지적했다.

금융기관의 의결권 축소 문제도 마찬가지다. 당초 공정위 안은 현행 30%에서 15%로 축소하되, 1년간 유예 기간을 두는 것이다. 아직 정부내 최종 합의를 이루지 못했지만, 계열사 주식에 대한 의결권 허용 범위와 관련해 현행법에서 다른 특수 관계자(재벌 총수와 계열사)를 포함해 최대 30%까지 허용하던 것을 앞으로 3~4년에 걸쳐 25%부터 시작해 15%까지 단계적으로 축소하는 방향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감위 이동걸 부위원장은 “고객 돈인 금융회사 돈을 지배 주주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데 쓰는 것이기 때문에 원론적으로 말하면 0%가 되는 것이 맞다. 시장 경제 원리에 부합하는 너무나 당연한 규제를 저지하려는 것은 ‘재벌, 그들만의 시장 경제’를 명징하게 드러낸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아시아개발은행 연차 총회에 참석한 장하성 교수는 공정거래법 저지 의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극소수 재벌에만 한정된 이 문제를 마치 우리 경제 전반의 문제로 포장하고 있다. 정부가 정치적으로 몇몇 재벌에게 도움을 요청해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이 자리에서는 장교수 같은 이른바 국내 개혁파 외에도 MIT 사이먼 존스 교수나 스탠리 피셔 씨티그룹 부회장 같은 외국인들도 한국 정부에 개혁 정책 추진을 주문했다.

성장과 개혁, 성장과 분배는 대척점에 서 있지 않다. 양쪽을 균형 있게 추진해야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진정한 의미의 경제 발전을 꾀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선언으로 한국 경제는 이제 겨우 제 궤도를 찾았지만, 탈선시키려는 기도는 앞으로 재계와 정치권 등 곳곳에서 벌어질 것이다. 그 첫 시험대가 17대 국회가 첫출발하는 6월 국회의사당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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