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반란 '문화 체계 전복'
  • 成耆英·李哲鉉·崔寧宰 기자 ()
  • 승인 1996.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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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축제, 反문화·反대학·反이념·反교육 등 선언…저항성과 대중성 접목 '새 길 찾기’도
서울대 본부 앞 축구장 크기 새파란 잔디밭은 ‘성역’이다. 이 학교 학생은 물론 교직원도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다. 학생들은 이 잔디가 학교 당국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해서 ‘총장 잔디’라고 부른다. 그런데 서울대 축제 기간에 이 성역이 무너졌다. 5월 13~17일 거의 한 주일 내내 학생들은 이 잔디 위에서 뛰고 구르고, 막걸리를 마시며 고래고래 노래를 불렀다.

이러한‘반란’이야말로 올해 서울대 축제의 키워드였다. 이 학교 총학생회는 축제의 이름을 아예 ‘반(反)대학(anti-university) 문화제’라고 붙였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여성오군(24·국사 4)은 “반대학 문화제는 일상에 대해 의심해 보자는 것이다. 사회 전반의 문화 체계를 뒤집어 보고, 국가 권력에 길들여지는 대학을 거부하자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여성오군은 ‘총학생회장=투사’라는 고정 관념을 깨기 위해 축제 팜플렛에 여자 분장을 하고 앞치마를 두른 자기 사진을 실었다.

저항의 한 수단으로서 ‘문화 체계 뒤집기’는 비단 서울대에 국한한 현상이 아니다. 거의 모든 대학이 성 문제를 축제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기획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학생들은 성을 밀실에서 광장으로 끌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동성애 문제까지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이른바 성의 정치화로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요즘 축제가 열리는 대학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기 강사 중에 서동진씨(연세대 사회학과 대학원 졸업)와 이정우씨(서울대 산업디자인과 졸업)가 있다. 서씨는 95년 3월 연세대에 ‘컴투게더’라는 동성애자 모임을 만들어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이씨는 지난 3월 발족한 한국대학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이들은 대학마다 불려다니며 ‘동성애와 성 정치’를 열심히 전도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이성애는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것이지만 동성애는 비정상적이고 변태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생각의 근저에는 다수의 오만과 폭력 논리가 깔려 있다는 문제 의식에서 비롯한다.
학생들은 또 자기가 몸 담고 있는 대학 그 자체에 대해서도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다. 사회 체제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지배 구조를 지탱하는 관념을 대다수 구성원에게 ‘세뇌’하는 장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체계적으로 구조화한 것이 교육 제도라고 보기 때문에 이에 저항한다. 현재의 교육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절대 진리로 받아들여 체제에 순응하는 학생들을 만들어 낸다고 학생들은 비판한다.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핑크 플로이드의 영화 <더 월(the wall)>에서는 학교라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학생들의 박제를 등장시켜 제도 교육의 폭력성을 섬뜩하게 표현한다. 이 영화에서 ‘박제가 된 바보’ 학생들은 교실을 부수고 불태움으로써 체제에 저항하는데, 반교육을 주장하는 학생 운동권이 꿈꾸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올해 축제 기간 중 서울 시내 일부 대학에서는 이 영화가 상영되었다).

학생들의 반교육 운동에 대해 서울대 학생처장 이정빈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일정 기간 기존 질서를 거부해 보는 것은 괜찮다. 반대학 문화제에서 보여주는 학생들의 행동은 반쯤은 치기 어린 장난 같기도 하다. 우리 학생들이 서울대 특별법 제정을 반대하는 것도 괜찮다. 축제 기간에 대학 본부 앞 잔디를 쓰는 것도 괜찮다. 나폴레옹이 독일을 점령했을 때도 며칠 동안은 프랑스를 마음껏 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는가.”

어쨌든 올해 5월 집중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대학 축제는, 화염병과 민중 가요로 뒤덮였던 80년대의 대동제와는 내용과 형식 면에서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화여대 총학생회 기획국장 전현경양(경제4)은 “93년부터 학우 대중은 정치 투쟁 일변도인 총학생회 행사에 거의 참여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대동제(축제)를 준비하면서 더 많은 학우를 끌어들일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 왔다”라고 말했다.

92년 이후 각 대학 총학생회는 대학 축제에서 대중 동원에 실패하는 쓰라림을 맛보았다. 최근 1∼2년간 대학 축제에서 가장 많은 학생을 동원한 행사는 줄다리기나 차전놀이가 아니라 KBS나 MBC 등 공중파 방송이 주관하는 공연물이었다. 그래서 ‘대동제 위기론’을 말하는 사람까지 나왔다. 즉 노동과 놀이가 하나 되는 ‘대동의 기쁨’을 신세대에게 기대하기는 무리라는 것이다.
록 페스티벌로 저항성 고취

대중성 상실이라는 위기 의식을 느낀 학생 운동권은 대중을 끌어들이기 위한 대안이 필요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여성오군은 이번 축제를 준비하면서 그동안 선배들의 열정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려 왔는데 그같은 고민 끝에 나온 것이 ‘문화를 통한 길찾기’라고 밝혔다. 그는 92년부터 맞이하게 된 학생 운동의 위기는 과학적 사회주의가 대중 운동과 결합하는 데 실패한 결과이므로, 이를 극복하는 길은 ‘교조화되었던 사회주의를 대중 속에서 복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각 대학 총학생회와 운동권은 학생들의 저항성을 고취할 문화적 고리를 록 페스티벌에서 찾았다. 서울 지역에서 5월 축제 기간에 록 페스티벌이 열린 대학은 줄잡아 열 곳이 넘는다. 성균관대 동아리연합회장 한승목군(체육4)은 운동권이 빠지기 쉬운 문화 편견을 깨기 위해 이번 대동제에서 록 페스티벌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등 몇몇 대학에서는 동아리연합회장 선거에서 록 페스티벌 유치를 공약으로 내세웠을 정도였다.

록 음악은 대중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태생적으로 저항성을 내포한 장르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대학 총학생회는 대학 속에 대중 문화를 연착륙시키기 위한 첫 기종(機種)으로 록을 선택했다.
“대중화 추구=상업주의” 비판도

서강대 총학생회장 권유신군(화학4)은 “대동제를 준비하면서 투쟁과 문화를 조화시키는 데 애썼다. 사회 의식을 가진 록 그룹의 콘서트는 학우 대중을 저항이라는 주제 의식으로 집결시킬 좋은 프로그램이다”라고 밝혔다. 5월7일 연세대에서 열린 대형 록 콘서트는 다른 프로그램과 달리 3천명이 운집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대학 축제가 대중 문화를 수용하는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텔레비전 화면을 타면서 소개되기 시작한 얼굴 페인팅은 요즘 대학 축제에서 빠지지 않는 풍경이다. 일명 3 대 3 농구라 부르는 길거리 농구 열풍은 말 그대로 화끈하다. 5월14일부터 경희대에서 열린 길거리 농구대회에는 20개가 넘는 팀이 참가했다. 그렇지만 이 날 자기 학과 응원에 열을 올리던 장지성군(경제2)은 “대학 문화가 노는 것으로 치우치고 있다. 한마디로 소비 문화로 흘러가고 있는데, 이를 바로잡기는 무척 힘들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올해 대학 축제의 가장 큰 특징인 대중 문화 끌어들이기 전략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인 결과를 안겨 주었다. 서울대 복학생 박세용군(25·경영3)은 “많은 학생이 반대학 문화제에 공감하고 있다. 올해 대동제는 새로운 저항과 대안 문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대동제였다”라고 평가했다. 대중 문화 비평가인 손동수씨도 “80년대의 대학은 과도한 정치적 부담 때문에 놓친 것이 많았다. 구체적인 삶과 일상이 더 이상 거대 담론에 묻혀 버려서는 안된다. 대학가에서 문화가 핵심 주제로 떠오르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반문화·반체제 운동은 90년대 후반기 대학가의 새로운 흐름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이벤트 중심의 ‘상업주의’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다. 성균관대 총학생회 문화국장 김현조군(행정4)은 아직도 상업 문화를 대학이 수용할 때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상업 문화와의 대립점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대학 문화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 과정에 다니는 김득준씨는, 85년 1학년 때 대동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광주항쟁을 다룬 사진전이었는데, 요즈음 대학 축제를 보면서 사회적 성격이 탈색되어 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호기심을 끌고 있는데다 저항의 의미를 그 안에 담고 있는 성 정치 프로그램도 비판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일상의 삶 속에서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는 지배 구조를 밝히겠다는 의도와는 달리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감각적인 면에 치우쳐 일부 학생에게 당혹감과 반감을 주었다’는 학생 대중의 반론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성균관대의 성 정치 프로그램을 준비한 총여학생회 김현용양(독문 야간 3)도 “동성애자들의 인권 회복 주장에는 공감하지만 동성애는 우리가 주장하는 가부장 제도 타파의 대안이 될 수 없다”라고 운동으로서의 한계를 지적했다.

이같은 비판에 서울대 총학생회장 여성오군은 “지금은 통합적인 가치가 어느 누구에게도 통하지 않는다. 답과 지향이 있었던 시기는 80년대이다. 지금은 모색기이다. 명확한 시대 정신을 밝히지는 못하지만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다”라고 밝혔다.
소비 자본주의에 포위된 ‘문화주의’

일부에서는 최근 대학 축제의 경향을 두고 70년대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70년대에는 정치는 숨죽인 채 문화로 정치를 위장했고, 5·18을 겪은 80년대에는 정치가 문화를 압도했는데, 80년대의 터널을 빠져나온 90년대 들어 대학이 다시 ‘문화주의’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비판은 90년대 학생 운동의 ‘상업주의’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즉 대중을 확보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정치성이 실종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학생 운동의 주체들은 이런 시각에 강력하게 반발한다. 경희대 총학생회의 한 학생은, 총학생회가 감당해야 할 몫이 정치·학생 복지·문화 등으로 영역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행사 중에서 몇몇만을 부각해 70년대로 회귀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주장했다. 문화라는 포장 안에 감추어진 대학 축제의 정치성을 흘려 버려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운동 논리를 떠나 대학 축제의 문화주의는 그 자체가 소비 자본주의에 포위된 90년대의 초상이다. 김성곤 교수(서울대·영문학)는 “반체제·반문화 운동은 미국의 60년대 학생운동과 일맥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지금 각 대학 축제에서는 여성과 문화 문제가 전면에 부각되어 있다. 이는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이다”라고 분석했다.

문화주의로 후퇴하는 것이든 문화를 통해 전진하는 것이든, 고통스런 모색을 거듭하는 90년대 후반의 대학 문화는 과연 또 어떤 반란을 잉태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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