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써 말 부른' DJ 정부 홍보맨
  • 徐明淑 기자 ()
  • 승인 1999.10.2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지원 장관, 언론 간여 '파문'···<중앙일보> 사태로 정국 쟁점 인물 떠올라
청와대 공보수석의 언론사 심야 방문과 물컵 사건. 지난해 3월3일 밤에 벌어진 이 사건은, 문화관광부 국정감사와 <중앙일보>의 ‘언론 탄압 시리즈물’을 통해 생생하게 공개되면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사건의 주인공 박지원 문화공보부장관(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은 10월 정국의 핵심 쟁점 인물로 떠올랐다. 정치권에서는 한나라당이 제출한 박장관 해임 건의안 표결 시기를 둘러싸고 줄다리기가 한창이다. <중앙일보> 편집국은 지난 10월7일 편집국 비상 총회를 열어 박장관과 박준영 공보수석 해임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박장관은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라는 자전 에세이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평소 깔끔한 옷맵시와 조리 있는 말솜씨로 대중에게 각인되었던 인물. 그런 그가 왜 밤 늦은 시각에 언론사를 방문해 폭언을 퍼부었을까. 그 정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의 야당 시절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다음은 그 시절의 삽화 두 가지.

야당 시절부터 DJ에 불리한 보도 ‘육탄 방어’

삽화1. 97년 10월10일. 평소처럼 언론사 순방에 나섰던 그가 <중앙일보> 편집국에 들른 때는 그 날 오후 2시30분께. 그와 이야기하던 정치부장은 한나라당 출입 기자로부터 다급한 정보 보고 전화를 받았다. 강삼재 사무총장이 엄청난 폭로 건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기자의 보고였다. 내용은 김대중 총재의 정치 비자금이 동화은행 계좌에 친인척 명의로 분산 관리되고 있다는 것.

정치부장과 같은 시각에 정보를 입수하게 된 그는 맨 먼저 잠실에서 행사에 참석 중인 DJ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고를 받은 DJ의 첫마디는‘한마디로 난센스’라는 것. 총재의 반응에 일단 안도한 그는 즉각 당사로 돌아왔다. 유재건 비서실장·이종찬 부총재 등 당의 간부급은 다 출타 중이었다.

소식을 접한 당직자들은 충격과 초조감에 휩싸였다. 가판(배달판에 앞서 시내 가판대에 깔리는 신문) 기사 마감 시간인 5시까지 주어진 시간은 겨우 2시간여. 그는 모든 신문사와 방송사에 DJ의 첫 반응을 알리고, 당내 대처 방안과 앞으로 예상되는 문제점, 한나라당이 들고나올 2,3탄을 점검하는 리포트를 작성했다. 그날 밤 11시 맨하탄호텔에서 비자금 관리역으로 지목된 이형택씨의 기자회견을 발 빠르게 주선한 것도 박씨였다. 당시 이 광경을 지켜본 당직자들이 그의 전광석화 같은 일처리 솜씨에 혀를 내둘렀음은 물론이다.

삽화 2. 역시 97년 대선 선거전이 한창 달아오를 무렵. 그는 KBS 뉴스제작팀이 북한으로 넘어간 전 천도교 교령 오익제씨의 편지 건을 보도하려고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를 내부 인물로부터 들었다. 김후보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리 만무한 뉴스였다. 그는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무조건 KBS로 달려갔다. 당시 홍두표 사장과 최동호 부사장을 붙들고 무려 4시간에 걸쳐 이 뉴스를 내보내지 말아 달라고 설득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읍소와 항의와 설득은 물론 ‘훗날의 역사적 평가를 어떻게 다 감당하려 하는가’라는 위협성 경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다. 그날 KBS 뉴스 시간에 오익제 편지 건이 빠졌음은 물론이다.

이 두 삽화는 박지원식 홍보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언론사 평기자에서부터 사장단(홍석현 사장만 하더라도 97년 대선 전까지 박장관과 꽤 절친한 사이였다)까지를 두루 망라하는 폭넓고 끈끈한 유대 관계, 밤낮은 물론 일요일조차 가리지 않는 극성 홍보, 쉽게 설득되지 않는 언론사와 기자에 대한 집요한 ‘진드기 작전’은 그의 전매 특허였다. 그는 모든 신문의 가판을 빠짐없이 점검해 문제가 있다 싶으면 즉각 대처해 배달판에 반영되도록 손을 썼고, 한꺼번에 다 볼 수 없는 방송사 뉴스는 녹화 테이프를 보며 검색하곤 했다. 나름으로 커다란 성과를 거둔 박지원식 홍보에 대한 김대통령의 신임은 두터웠고, 그의 정치적인 입지는 날이 갈수록 강화되었다.역대 공보수석 중 최강 파워 발휘

사실 박장관은 처음 출발할 때만 해도 국민회의에서 뿌리가 약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럭키금성상사 주재원으로 미국에 갔다가 그곳에서 눌러앉아 가발 사업으로 성공한 재미 기업인 출신. 80년에 뉴욕한인회장을 지낸 그는 전두환 대통령 방미 환영 행사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을 받기도 했다. 87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 DJ와 인연을 맺었지만, 당내 주류인 동교동계가 볼 때는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지닌 정치 신참자’ 정도였다. 그런 그가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측근 중의 측근으로 급성장한 배경은, 오로지 성실하고 꼼꼼한 홍보 능력과 폭넓은 언론계 인맥이었다. 그러나 그가 당선자 대변인을 거쳐 청와대에 입성하면서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정치권과 언론계 주변에서는 그를 둘러싸고 갖가지 풍문과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정치권에서는 대통령과 접촉하는 빈도가 가장 높은 그가 정보를 왜곡하고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정권 창출의 일등 공신이면서도 철저하게 소외되었다고 여기는 동교동계 일각이 불만의 진원지였다.‘방송사 고위 인사 간여’ 풍문도

하지만 정치권보다 박수석의 파워를 더 크게 의식했던 곳은 역시 언론계였다. 당시 박수석이 이끄는 공보수석실은 공보처가 폐지되는 바람에 공보에서 단순 행정 업무에 이르기까지 국내 언론 정책 전반을 담당하게 된 데다, 정권 출범 초기에 민정수석실과 힘겨루기를 해 공영 언론사 인사권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자연히 박수석은 역대 공보수석 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YTN 전무 추천 건은 공보수석실이 인사에 간여한 것으로 지적되는 대표적인 사례. 3월 말 주주 총회를 앞둔 지난 3월 초 YTN 장명국 사장은 청와대 공보수석실 박 아무개 비서관과 주변에서 다 알아들을 만큼 큰소리로 언쟁을 벌였다. 박비서관이 한때 YTN에 근무했던 전 아무개씨를 전무로 추천하자, 장사장은 ‘공보수석실이 언론사 인사에까지 개입하느냐’면서 불쾌감을 내비쳤다. 장사장이 반발해 전씨 입성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훗날 장사장이 조기 퇴진을 결심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이다. 언론계 주변에서는 이밖에도 박수석이 외부 입김에 취약한 MBC와 SBS 고위층 인사와 프로그램 제작에 깊이 간여한다는 풍문이 끊이지 않았다.

일간지들이 98년 11월 클린턴 방한 때 이례적으로 일요판을 발행한 것도 박수석의 입김이 작용했던 사례로 꼽힌다. 그는 98년 11월6일 아침 출입 기자에게 정례 브리핑을 하다가 “21일에 중요 행사가 다 있는데 신문을 발행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고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런 중요한 때에는 일요판을 발간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라고 언급했다. 한동안 일요일자 신문을 발간하지 않던 신문사들은 공교롭게도 그 발언이 나온 직후 11월22일자 일요판을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미디어 오늘〉 11월18일자는 일간지들의 이같은 결정에 대해‘권력을 의식한 것인가, 독자의 알 권리를 중시한 결정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그와 정반대 일이 발생했다. 중국을 방문한 김대통령이 베이징 인민대회장에서 한·중 정상회담을 열고 있던 98년 11월13일 안주섭 대통령 경호실장이 대통령을 경호하지 않은 채 수행원까지 대동하고 쯔진청(紫禁城) 관광을 나갔다가 기자들에게 현장을 들킨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부산일보〉만이 이 사실을 보도했을 뿐, 다른 언론에서는 관련 기사를 찾아볼 수 없었다. 박수석이 기자들에게 ‘이런 보도가 나가면 대통령의 정상 외교가 엉망이 된다’면서 보도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기 때문이었다. 한나라당 이경재 의원이 뒤늦게 국회 예결위에서 이런 사실을 폭로했지만, 그조차도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 ‘DJ에게 좋은 기사는 가능한 한 크게, 불리한 기사는 가능한 한 작게’라는 박수석의 공보 가이드 라인이 관철된 것이다. <중앙일보>가 박수석이 지면 제작에 간여한 사례로 제시한 것도 조상묘 이전 기사 등 DJ에게 누를 끼칠 만한 기사이거나 DJ에게 매우 비우호적인 만평 등이었다.

언론사를 향한 박수석의 끈질긴 이의 제기와 협조 요청은, 앞의 사례에서도 나타났듯이 야당 시절부터 있었던 일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야당 시절에만 해도 그의 협조 요청을 애교와 극성쯤으로 여겼던 언론계가 점차 압력이나 주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입지가 취약한 언론이나 자체 문제점을 안고 있는 언론사일수록 그런 경향이 심했다. <중앙일보>가 지난 1월 제3자를 통해 간접으로 전달된-최근 박장관은 국감에서 ‘어떤 지방지 발행인이 말을 잘못 옮긴 것’이라고 해명했다 - <중앙일보> 인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도, 따지고 보면 특정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해 편파 보도한 97년 대선 때의 원죄와 사주의 비리 때문이었다. 홍석현 <중앙일보> 사주는 지난 추석 연휴 때 한남동 자택을 찾은 편집국 기자들에게 “그동안 박장관으로부터 받은 압력이 너무나 엄청나서 견디기 힘들었다. 모두 대통령의 뜻인 것 같다. 신문사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내가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털어놓았다.

박장관은 언론 간여 사례에 대해 입장을 말해 달라는 〈시사저널〉의 요청에 대해, 국회 표결을 앞둔 만큼 그 어떤 인터뷰도 사양하고 있다면서 반론권 행사를 거절했다. 다만 그는 “어떤 형태로건 언론사에 압력을 행사한 적이 없다. 요즘 청와대의 압력이 언론사에 먹혀들기나 하는가. 언론사의 보도에 간혹 이의를 제기하거나 협조를 부탁한 일은 있었지만, 이는 공보 본연의 역할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해당 언론사와 시민단체는 이러한 해명을 선뜻 수긍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중앙일보사 비상대책위원회 최형규 홍보팀장은 “박수석은 대통령과 접촉 빈도가 가장 높았고, 한때 김중권 비서실장보다도 파워가 세다는 평판이 나돌았다. 그런 박수석의 불만 토로를 과연 단순한 이의 신청쯤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언론개혁시민연대 이영호씨(전 <세계일보> 편집국장)는 “정부 관계자가 반론권 청구 같은 공식 절차를 밟는 대신 비공식으로 편집국의 협조를 부탁한 것은 잘못된 접근 방식이다. 만일 공식으로 접근했더라면 사주가 탈세를 저지른 <중앙일보>측에 언론 탄압이라는 빌미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언론 관련 시민단체들은 탈세와 비리를 저지른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과 그를 싸고도는 중앙일보사의 행태를 강력히 비난하면서, 박장관의 언론 간여에 대해서도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마디로 양쪽 모두 파울 플레이를 저질렀다는 것이다.“박장관 입지 더 탄탄해졌다”

그러나 <중앙일보>와 전면전을 치르고 있는 여권의 분위기는 딴판이다. 청와대는 박장관에 대한 <중앙일보>와 야당의 공격을 김대통령에게 타격을 입히려는 고도의 전술이라고 파악한다. 박장관은 공보수석 자리에서 물러난 지금까지도 국민들에게‘대통령의 입’으로 인식되고 있고, 따라서 박장관이 입는 상처는 곧 대통령의 상처가 되고 만다는 것이 청와대의 인식이다. 여권이 해임 건의안 처리 과정에서 박장관을 필사적으로 엄호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평소 박장관에게 불만을 표시하던 동교동계는 물론이거니와 박장관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자민련도 해임안 투표 때 반란표를 던질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동교동계는 박장관에 대한 김대통령의 의중을 잘 알고 있고, 자민련은 반란표가 생길 경우 JP에게 돌아갈 부담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장관 해임 건의안은 국회에서 부결되리라는 것이 정치권의 지배적인 관측이다. 심지어 <중앙일보>와의 전쟁을 계기로 박장관의 입지가 더욱 탄탄해졌다는 분석마저 나오고 있다. 여론의 흐름으로 보아 <중앙일보>와의 전면전에서 완봉승을 거두었다는 것이 청와대의 인식이다.

군사 정권이 정보기관을 통해 언론을‘통제’했다면, 문민 정부는 언론과 인연이 깊은 인물을 통해 언론을 ‘관리’했다. 김영삼 정권 때 이원종 정무수석과 현정권의 박지원 공보수석이 그런 경우였다. 정권의 ‘스핀 닥터(홍보의)’였던 셈이다. 하지만 <중앙일보> 사태는 이를 계기로 제도적인 언론 개혁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과 함께, 정권 홍보와 언론을 정권 유지의 도구로 여기는 당국자들의 언론관도 바뀌어야 한다는 교훈을 던지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