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 가족 상봉 "차근차근, 오래오래"
  • 朴晟濬 기자 ()
  • 승인 2000.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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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안주가 고향인 안성호씨(80)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4 후퇴’ 때(1951년) 어머니·부인·아들·딸 등 일가족 4명을 남겨두고 고향을 떠나왔다. ‘잠시 떠난다’는 마음으로 집을 나설 때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는, 가족 사진 한 장 없이 나왔다.

휴전이 이루어지고 분단이 고착화함에 따라 안씨는 귀향을 단념하고 이남에서 가정을 다시 이루어 자식을 여럿 낳았다. 그 사이 전기 사업으로 돈을 번 그는 서울 시내 고급 주택가에 100평이 넘는 집을 마련할 정도로 기반을 든든하게 닦았다.

하지만 안씨에게 이남에서의 반 세기 가까운 시간은 말 그대로 인고의 세월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경제적 여유가 더하면 더할수록 북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뼈에 사무쳤던 것이다.
정상회담후 신청 건수 폭발적 증가

그의 북녘 가족은 북한 처지에서 보자면 ‘남쪽으로 내려간 반동의 가족’이었다. 이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안씨는, 섣부른 수소문이 행여 북녘 가족에게 불이익이나 해를 안기지 않을까 걱정해 최근까지 ‘생사 확인’조차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안씨 태도는 최근 며칠 사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분단 역사상 최초로 만난 정상회담에서 ‘이산 가족 상호 교환’에 합의한 뒤 굳게 손잡는 모습을 지켜보고서 ‘이제야말로 안심하고 가족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마음을 놓은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그 자체가 분단 시대 최대의 고통이었던 이산 가족 문제가 급류를 타고 있다. 이북5도청과 대한적십자사 등 관련 기관은 줄을 잇는 실향민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최근 이북5도청내 가족찾기 신청서 접수 창구인 서울 구기동 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를 방문하는 사람은 하루 평균 3백~4백 명. 남북 정상회담 전의 방문객 30~40명과 비교하면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여주는 수치이다.

접수 창구를 찾는 사람은 대개 허리가 구부러지고 머리가 허연 70~80대 노인이다. 이들은 현재 1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 ‘이산 1세대’(1953년 7월27일 이전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사람과 남한 지역에서 납북 또는 월북한 사람의 당시 가족) 가운데에서도, 오는 8월15일 있을 이산 가족 상봉 때 최우선 상봉 대상으로 꼽히는 고령자들이다.

이들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몸소 접수 창구를 찾는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짐작할 법하다. 그만큼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하는 간절한 가족 상봉의 꿈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와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다. 서울 영등포에서 전철을 갈아타고 물어 물어 센터를 찾아왔다는 김덕현씨(72)는 “7년 전 중풍이 온 뒤에는 ‘이대로 눈을 감는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이미 파주 오두산 부근에 묘자리까지 봐두었는데, 이런 일이 생전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고 말한다.
같은 시각 접수 창구에서 신청서를 쓰고 있던 김영수씨(73)도 마찬가지. 황해도 벽성이 고향인 김씨는 ‘다녀오겠다’는 한마디 인사말을 마지막으로 가족과 생이별했다. 열여섯에 결혼해 월남할 때 이미 다섯 살 난 아들을 두었던 김씨는 “부모님 만나뵙기는 글렀고,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은 아들과 집사람을 꼭 만나 보고 싶다”라고 부푼 꿈을 말한다.

정서적으로 보나, 인도적 견지로 보나 남북이 함께 최우선으로 풀어야 했을 이산 가족 문제는 최근 남북 두 정상간 합의로 극적 전기를 맞기 전까지 결코 쉽게 풀 수 없었던 난제였다. 남북간 입장 차가 워낙 컸고, 이산 가족 문제가 당국간 대화의 주요 의제로 제기된 이후에도 숱한 변수와 돌발 사태에 의해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산 가족 문제가 제기된 것은 1971년 8월 남한이 ‘천만 이산 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을 북한측에 제의한 것이 처음이다. 이후 이산 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남북한 논의는 30년 가까이 되풀이되어 왔지만, 1985년 9월 ‘남북 이산 가족 고향 방문 및 예술 공연단’ 교환 때 딱 한 차례를 빼고는 제대로 성사된 적이 없다(22쪽 연표 참조). 남한의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선 해결’ 제안에 대해 북한측은 ‘정치 공세’라는 논리로 맞섰던 것이다.
개념 규정·보폭 조절 ‘산 넘어 산’

하지만 북한측이 이산 가족 문제를 회피해온 실제 이유는, 1970년대 이후 남북한 간에 격차가 벌어지면서 양측 주민의 만남 자체가 엄청난 체제 위협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편지 왕래 등 제한적인 이산 가족 접촉은 1990년대 말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이 때문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이산 가족 상호 교환에 합의해준 사실에 대해 전문가들조차 놀라고 있는 상황이다. 동국대 강정구 교수는 “두 정상 간에 어느 정도 합의가 있을 것으로는 예상했지만, 막상 저쪽이 남한내 이산 가족의 북한 방문까지 허용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깜짝 놀랐다. 현시점에서 이산 가족의 북한 방문은 여전히 체제 위협적인 측면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두 정상간 합의로 일단 물꼬는 터졌지만 이산 가족 상호 교환 작업은 산적한 숙제를 안고 있다. 일단 이산 가족의 개념 규정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정부는 이산 가족을 ‘1945년 9월 이후 동기 여하를 불문하고 남북한 지역에 분리된 상태로 거주하고 있는 사람과 그들의 자녀’로 규정하고 있다.

이산 가족 범위도 논란거리다. 이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대체로 부부, 부모와 자녀, 조손, 형제, 자매를 원칙으로 할 것을 제안하고 있지만, 방계 혈족과 처가·외가까지 넣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이산 가족 현황에 대한 체계적인 통계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 점에서 연유한다. 흔히 ‘천만 이산 가족’으로 통하는 이산 가족 수는 현재 당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2·3 세대를 포함해 약 7백67만 명에 이른다.

하지만 이같은 수치에 거품이 끼어 있다는 견해도 있다. 남북한이 체제 대결을 거듭하는 사이 남한에서 의도적으로 부풀린 이산 가족 인구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인구학자 가운데에는 실제 이산 가족 수를 1백50만 명 정도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 설명이다.

설혹 실제 이산 가족이 1백50만 명이라 하더라도 이들이 한꺼번에 상봉의 기쁨을 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부는 이미 남북 합의가 있기 전 이 부분에 대해 ‘고령자 우선 상봉’이라는 원칙을 세워 놓았다. 아울러 정부는 오는 8월15일 있을 이산 가족 상봉이 ‘1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 1985년에 있었던 ‘고향 방문단’ 예를 참고로 하여 이산 가족 상봉을 상설화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월 100명씩 상봉케 할 것과, 월 1회 양측 3백명씩 생사·주소 확인을 위해 명단을 교환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부측 방안은 오는 7월부터 있을 적십자 회담과 당국 회담에서 본격 논의되는데, 현재 당국은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산 가족 상봉 규모와 속도에 ‘절제’를 주문하고 있다. ‘기왕 오랜 세월을 기다려 이루어진 일인 만큼 북한에 무리한 요구를 해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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