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조에서 JP까지 ‘비계좌 뿌리’ 줄줄이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5.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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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희 전 검사, 93년 내사 때 비자금 족보 확인…“1억원 이상 관련자만도 부지기수”
이원조씨 비계좌 추적에서 재미있는 것은, 6공 시절 이원조씨가 노태우 대통령뿐 아니라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도 우호적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이씨 비계좌에서 나온 돈이 5공 시절 국무위원을 지낸 인사들의 모임인 ‘○○○회’ 회원 비계좌에서 발견되는 데서 간접 확인되었다. 당시 함검사는 ○○○회 회원들로부터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세배하러 갔다가 이 돈을 받았다”는 진술을 확보했으나 사건 기록에 첨부하지는 않았다.

6공 시절 이원조씨가 전두환 전 대통령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원조씨 비계좌에서 나온 돈이 한 음대 교수의 계좌에서 발견된 사실로도 확인이 된다. 함검사는 이원조씨 비계좌에서 나온 2천만원이 이 음대 교수의 계좌로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처음에는 이원조씨가 이 교수의 계좌를 빌려 비자금을 숨겨둔 것이 아닌가 하는 쪽으로 의심했다. 그러나 음대 교수로부터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세배갔다가 받은 것”이라는 진술을 받고 의심을 풀었다. 통이 큰 전씨가 이원조씨가 건네준 수표를 금융기관에 넣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가 그대로 세뱃돈으로 내준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원조씨 기소하려 하자 곳곳에서 압력이

동화은행 사건 수사 당시 함검사는 안영모씨로부터 2억원을 받은 것을 근거로 삼아 이원조씨를 알선 수재 혐의로 기소하려고 했다. 그러자 곳곳에서 압력이 들어왔다. 이 무렵 김영수 민정수석은 기자간담회를 통해 “증거 없는 수사는 안된다”고 말했는데, 김수석의 이러한 발언은 93년 5월21일자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함변호사는 90년 한미은행의 고위 인사가 뇌물을 받은 사실을 확인했으나 상부 지시로 구속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한미은행의 고위 인사와 동창 관계였던 법무부장관이 ‘보고도 하지 않고 수사에 착수한 것은 수사 절차상의 잘못’이라며 검사장을 야단치는 바람에 없었던 일로 돌리고 말았다.

함변호사는 “과거 몇 번이나 대형 비리 사건에 접근했다가 물러나면서 언젠가 가장 큰 거악을 상대로 일생일대의 승부를 걸어보겠다고 다짐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이원조씨에 대한 내사를 종결하라”는 상부 지시를 따르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해외에 체류하던 이원조씨가 귀국한 것은 대전지검 서산지청장으로 나가 있던 함검사가 사표를 낸 지 꼭 10일째 되는 지난해 10월이었다. 이씨가 귀국한 지 만 1년이 막 지난 지금 이현우 전 경호실장의 3백억 통치 자금 보유가 사실로 확인되었다. 2년 전 이미 이현우씨의 비계좌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검찰이 과연 한 발짝 더 나아가 이원조씨 비계좌를 조사할 수 있을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대검찰청 중수부는 지난 10월22일 이현우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차명 예치된 3백억원은 노태우 대통령 재직 당시 통치 자금의 일부다”라고 밝히기 훨씬 이전에, 이현우씨가 상당한 규모의 6공 정치 자금을 관리하고 있는 사실과 이원조 전 은행감독원장의 비계좌가 발견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검 중수부가, 이씨가 관리하는 비자금을 구체적으로 파악한 것은 93년 3월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을 수사할 때였다. 단서는 함승희 검사가 당시 안영모 동화은행장의 가명 통장을 발견하고 이 계좌에서 나온 돈을 하나하나 추적하다 안행장 가명 계좌에서 나온 수표가 이원조 전 은감원장, 이용만 전 재무부장관,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의 비계좌로 연결된 것을 확인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시 함검사는 이 세 사람에게 전달된 동화은행의 비자금 총액이 13억5천만원이고, 이 중 이원조씨에게 간 돈은 수표 2억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함검사는 변호사 개업 후 <월간조선>(95년 6월호) 인터뷰에서 이씨를 모 실력자로 지칭하며 이렇게 말했다. “동화은행에서 나간 수표 2억원이 모 실력자의 비계좌에 들어갔는데, 그 계좌에는 2억원뿐 아니라 다른 돈이 수십억에서 수백억원까지 들어가 있었다. 이 돈은 실력자가 재산 공개 과정에서 신고하지 않은 돈이었다. 또 그는 기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 돈은 분명 부정한 돈임에 틀림없다.”

함변호사는 이 인터뷰에서 “실력자(이원조씨) 비계좌에 들어온 돈을 따라가자 대기업의 비계좌와 정치 실세들의 비계좌가 드러났다. 1억원 이상 받은 사람만 잡아넣으라 해도 숱한 사람을 잡아넣을 정도로 많은 사람의 혐의가 잡혔다. 차관 이하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함변호사는 이현우씨의 비계좌가 이원조씨 비계좌와 연결되었는지, 아니면 이용만·김종인 씨의 비계좌와 연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당시 함검사가 이러한 내용을 보고하자 검찰 총수는 “동화은행 비자금에 대한 수사는 하지 말자. 안영모 동화은행장이 거액을 대출해주고 커미션을 받은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하자. 그러면 당신의 출세를 보장하겠다”고 제의한 사실도 함변호사의 주변을 취재하자 확인되었다. 그러나 당시 검찰 총수이던 박종철씨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는 질문에 대해 “나는 일체 모르는 일이다”라고 대답했었다.

전씨, 세뱃돈으로 수천만원씩 듬뿍

함변호사는 최근 “동화은행 수사 당시 상부 보고의 90% 이상을 구두로 했다”고 밝혔다. 상부 보고를 문서가 아닌 구두로 한 것은 그가 최근에 펴낸 저서 <성역은 없다>에도 나와 있다. 함변호사는 동화은행 사건 수사 당시 구두 보고를 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특히 정치력이 있는 사람을 구속하려고 품신할 경우 상급자와 구두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심한 경우에는 말소리가 나는 것도 꺼려서,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서 특정 인사의 구속 여부를 품의했다. 구두 보고나 손가락 글씨 보고를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문서 보고를 하면 주임검사에서 부장검사, 검찰총장, 그 윗선으로 올라가면서 결국 정보가 새어 나간다. 정보가 새면 구속 당사자로 거론되는 사람으로부터 강력한 로비가 들어온다. 이럴 경우 이 인사를 구속하기로 결정하는 라인에 섰던 사람들이 다칠 수가 있다. 구두 보고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문서가 남아 있지 않아야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런 결정을 한 사실이 없다’고 발뺌할 것 아닌가.”

함검사의 구두 보고를 통해 대검 중수부와 검찰 수뇌부는 이현우 전 경호실장의 비계좌 윤곽을 대략 파악했다. 그러나 문서화된 자료가 없어 이우근 전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장의 차명 계좌 발언이 있기 전까지는 구체적인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화은행 사건 수사 당시 검찰 수뇌부가 문서 보고를 받지 않은 것은, 함변호사가 변호사 개업을 하고 난 직후 검찰 간부 한 사람이 함변호사를 찾아와 ‘한 야당 대표’에 대한 자료를 요청했던 데서도 드러난다.

그 뒤, 백억원 비계좌의 소유주로 구설에 오른 이 야당 대표는 동화은행 사건 수사 당시 여권 2인자로 있다가 지난해 야당 대표로 변신한 자민련 김종필 총재로 지목되었다. 함검사는 이원조씨의 비계좌에서 입·출금된 돈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수십억원이 들어 있는 이 야당 대표의 비계좌를 발견했다. 그러나 함검사는, 당시에는 이 인사가 여권의 거물이라서 그의 비계좌에 들어 있는 수십억원이 부정하게 받은 것인지 여부는 검증하지 못했다.

이 야당 대표의 자료를 달라고 함변호사를 찾아온 사람에 대해 함변호사는 아직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러나 주변을 취재한 결과 당시 함검사와 함께 대검 중수부에 근무하다 현재 서울지검의 부장검사로 있는 김 아무개씨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함변호사는 김씨에게 자료를 넘겨주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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