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빗장 푸는 두 밀사, 최수진·전용만
  • 북경·하얼빈·연길/丁喜相 기자 ()
  • 승인 1995.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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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진씨, 쌀회담 성사시킨 막후 중재자… 전용만씨는 남북 해상교역 견인차
중국 북경에서 제3차 남북 쌀회담이 열리고 있던 지난 9월28일 밤 12시 <시사저널> 취재반은 북경호텔 17층을 찾았다. 17층 방 7개가 전금철 단장을 비롯한 북한 대표단의 숙소였다. 북측 대표단이 머무는 방들은 이튿날 회담을 위해 일찍 잠을 청한 듯 적막에 싸여 있었다. 맨 오른쪽 방에만 불이 켜져 있었는데 입구에 민족경제개발총공사 북경지사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사무실 주인은 이 회사 총경리(회장)인 조선족 기업가 최수진씨(46)였다. 그는 지난 4월부터 남북한 쌀회담을 막후에서 중재해 오고 있는 북한측 ‘밀사’이다.

밤 늦은 시각에 <시사저널>과 단독 인터뷰에 응한 최수진 총경리는 바로 옆방이 전금철 대표단장의 숙소임을 의식해서인지 조심스레 사무실 문을 안으로 걸어 잠갔다. 그는 “50년 분단 체제의 골이 이렇게 깊은 줄 몰랐다”라는 탄식조로 말문을 열었다.

회담 이틀째인 이 날 낮 남북 양측은 우성호 즉각 송환(남측)과 조건 없는 쌀 지원(북측) 주장이 팽팽히 맞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다음날 회담을 속개하기로 하고 휴식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 사이에 최수진 총경리는 남북 대표단 사이를 오가면서 상황을 진전시키기 위해 설득 작업을 벌이다가 방금 숙소로 들어온 참이었다.

“오늘 회담 후 이북 대표단을 만났더니 정치 문제를 떠나서 경제 문제를 통 크게 해보려 했는데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방금 남측 대표단에 찾아가 설득을 벌이고 오는 길이다. 이남 정부도 여론과 국회 때문에 고초가 말이 아니더라. 나는 양측 대표단에 ‘한 걸음 물러서면 하늘은 더 높고, 바다는 너 넓게 보인다’는 중국 속담을 인용해 설득했다. 남측이 강력히 요구하는 우성호 송환 문제는 곧 풀린다. 북측도 실은 그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전금철 단장을 비롯한 3차 회담 북측 대표단이 이 문제를 꺼낼 수조차 없는 북한 체제의 특수성을 한국측이 이해해 주지 않고 밀어붙이기만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평양에서는 해당 기관에서 회담과는 별도로 ‘무리없이 송환해 주자’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는데, 이처럼 복잡한 이북 체제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처한다는 것이다.

최수진은 누구인가

최씨와의 인터뷰 내용은 그가 지난 4월 막후 밀사가 되어 남북 쌀회담을 성사시킨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겪은 우여곡절과 말 못할 고충으로 이어졌다(37쪽 인터뷰 참조).

이튿날 새벽 3시까지 계속된 인터뷰에서 그가 한국측 전제 조건들에 대해 시종 섭섭함과 안타까움을 드러낸 것에서 이번 3차 회담이 그늘지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내일 모레 이틀을 더 봐야겠지만, 이런 분위기라면 이번 회담에서 돌파구는 열리지 않을 것 같다. 연말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리라 본다”고 전망했다.

불안스럽게 전망한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이틀 후인 9월30일 한국측 대표단장인 이석채 재정경제원 차관은 회담 장소를 한반도 안으로 옮기고, 양측 대표단도 당국자급으로 공식화하자고 제의해 3차 회담은 별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95년 남북 관계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남북 쌀회담을 막후에서 성사시키고 중재해온 최수진이라는 인물은 국내에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쌀회담 중재자이기 이전에 이미 중국 사회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사업가, 그것도 조선족 사업가라는 점에 비춰볼 때 국내에서의 낮은 인지도는 다소 의아스런 감도 없지 않다.

<시사저널> 취재반은 ‘공존 공영’ 논리를 내세우며 남과 북, 해외 동포, 주변국들을 매개하고자 하는 최수진 총경리의 사업 본고장 흑룡강 성 하얼빈 시를 찾았다.

하얼빈 시내에서 만난 조선족들은 하나같이 최수진씨를 ‘민족 기업인’이라고 불렀다. 하얼빈 시 중심가 송화강변에 우뚝 솟은 22층짜리 민족호텔은 최수진씨가 ‘민족 기업’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건물이다. 이 호텔 4층이 그가 경영하는 흑룡강성민족경제개발총공사(흑민경) 본사이다.

최수진씨가 흑민경을 설립한 것은 85년으로,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큰 물결에 올라탄 때였다. 그 때까지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북한에 코크스 탄을 공급하고 북한산 강철을 받아오는 방식의 구상 무역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방 정책으로 국가간 무역이 끊기면서 북한에게는 새로운 무역 상대가 필요해졌다. 이 때 최수진씨는 중국 정부로부터 이 무역을 인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최수진씨의 무역에서 북한이 95%를 차지하게 됐다. 북한 처지에서 보면 대외 무역의 3분의 1을 최씨에게 의존한다.

최씨는 92년부터 4년째 코크스 탄을 북한에 보내고 그 대신 강철을 받아 중국·러시아 등에 수출한다. 연간 2억달러 규모에 해당하는 이 무역량에 힘입어 북한의 김책·황해 제철소, 남포제련소·신흥화학·승리화학 등 기간 산업 공장이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북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연간 1백50만t을 받아야 하는 강철을 최근에는 80만t밖에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북한이 최수진씨에게 진 빚만도 5천만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이밖에도 아연 정광을 북한에 보내주고 전기 아연을 받아오는데, 이 전기 아연은 한국의 럭키금성상사(현재의 LG 상사)와 전량 거래해 왔다. 이런 방식으로 그동안 1억5천만달러어치의 북한산 전기 아연이 럭키금성상사를 통해 수입되고, 이것은 다시 고려아연에서 가공되어 한국에서 사용되었다. 최씨는 이런 무역을 북한 경공업부와 봉화총국 3국과 연결해 진행하고 있다.
하얼빈→나진·선봉→서울 관통 철도 제안

경공업부 부장이 김정일 여동생인 김경희라는 점 때문에 최씨에게는 대북 진출과 관련해 줄을 대려는 한국 기업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최수진씨는 “원래 나는 남북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경제만 하려 했는데 대립과 갈등이 계속되는 한 경제도 안될 것 같다는 판단에서 회담 중재자 역도 맡게 되었다”고 말한다.

최수진씨는 지난해부터 한국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거창한 제안을 내놓았다. 중국 하얼빈→도문→북한 남양→나진·선봉→휴전선→서울을 관통하는 ‘38선 철도 개설’ 방안이 그것이다. 이런 제안은 민족 공존 공영 논리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 민족이 일본보다 유리한 점은 대륙과 바다를 동시에 겨냥할 수 있다는 점이지만, 분단 때문에 이 장점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민족의 경제적 출로는 동북아시아 대륙 지역 경제 체제를 하루빨리 넓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휴전선으로 가로막힌 철도를 복구해야 한다. ‘국제련운’ 식(철도의 국경을 없애는 방식)으로 출발하면 이북 입장에서도 체제에 위험이 없으니까 긴장을 풀 것은 물론이고, 통과 수수료를 받아 오히려 이득이다. 이남 처지에서도 흑룡강 성을 비롯한 동북 3성의 무진장한 원유·목재·식량·철강 등 원자재를 싸게 사갈 수 있다. 현재 흑룡강 성 광물은 대련을 통하고 다시 바다를 거쳐 이남에 들어가는데, 만약 휴전선을 잇는 철도가 성사되면 산지에서 대련으로 나가는 길과 포항까지 나가는 길이 같은 거리가 된다. 복선 철도를 건설한다면, 이북은 나라 전체가 국유지이므로 땅값 문제가 없고 군대라는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체제이므로 한국에서 원자재만 대준다면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가능하다.”

최씨는 이런 구상을 북한에 이미 전달했다며 한국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자기가 북한은 물론 흑룡강 성을 움직이는 데 발벗고 나서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역 경제의 중심 축을 두만강개발지구로 보고 있다. 한국의 자본과 기술력, 북한의 노동력, 동북 3성의 원자재가 맞닿는 이곳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재도약할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최근 자기를 찾아온 삼성그룹 대표단과 만나 나진·선봉에 함께 들어가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현재는 대표단 구성을 추진하는 단계이다. 민족 공존 공영 논리를 바탕으로 한 그의 야심찬 외침이 앞으로 남북한 당국은 물론 기업들에게도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전용만씨, 나진-부산항 정규 항로 개척

남북한을 비중 있게 매개해 오고 있는 조선족 기업인은 최수진 총경리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다. 연변 항운집단공사 전용만 회장(48)이다. 최수진 총경리가 대북 무역을 기반으로 한국 기업과 함께 북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하는 데 비해 전용만 회장은 남북한·동북 3성(연변 중심)의 물류 수송 사업을 수단으로 삼아 상호 이익을 꾀한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남북한과 관련된 실제 사업을 통해서 비극적인 민족 분단 현실을 타개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활동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취재반이 전용만 회장의 주요 사업 근거지인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 시를 찾은 것은 9월24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무실에 없었다. 이틀을 기다린 끝에 9월26일 오후에야 가까스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9월21일 서울에서 나웅배 부총리 면담, 22~24일 북경에서 북한대외경제위원회와 유엔개발계획(UNDP)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투자설명회 참석, 9월25일 평양에 보낸 북한 실무진의 업무 확인…. 그의 일정이 이랬으니 취재반으로서는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행운이었는지 모른다.

한국 기자를 맞아 그가 풀어놓은 첫마디는 이랬다. “한마디로 남북 관계인데, 금년에 쌀회담이 잘 시작됐다가 우성호 사건으로 묶여 버렸다. 엊그제 북경에서 열린 국제회의(유엔개발계획과 북한대외경제위원회 투자설명회) 분위기로 봐서는 북측도 이전과 달리 경제를 열어야겠다는 열기가 읽혔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우성호 안 풀면 안하겠다는 입장이라서 참 걱정이다.”

이어서 그의 얘기는 남북을 어렵사리 설득해 막 성사시킨 사업으로 넘어갔다. 그 사업은 만주 지역 화물 1억t을 북한과 한국을 매개해 운송하려는 그의 꿈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가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끼운 첫 단추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나진에 조선나진항만해운공사를 설립해 종합 물류 수송업으로 첫 비준을 받고 나서 나진·부산 사이의 상설 해상 항로를 만들기 위해 한국 특수선주협회와 50 대 50 지분으로 동용해운을 설립했다. 그 다음 동용해운에서 나진항에 5백만달러 상당의 기중기와 항만 시설, 컨테이너 시설을 갖추는 데 조선(북한)측의 동의를 얻었다. 이 투자는 한국의 승인도 필요했기 때문에, 만주 짐(화물)과 한국 짐 거래라고 설득해서 겨우 승인을 얻었다. 사실이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의 도로나 철도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길게 가면 남북 경협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한마디로 북한 나진항을 통해 연변·훈춘 지역과 한국이 교역하는 물품·화물·원료 들을 수송할 정규 항로의 물꼬를 텄다는 내용이다.
북한 정부, 파격적 ‘협조’

전씨는 수송 규모 및 나진항 개업식 준비와 관련해 “원래 9월28일이 첫 출항 예정일이었는데 나진에 크레인이 없어 중국에서 1백10t짜리 크레인을 임차해 목포·부산을 돌아 나진항에 옮기느라 다소 늦어졌다. 연변에서 한국으로 나가는 컨테이너 15개 분량을 실어 보내고, 다시 부산에서 짐을 실어 연변에 들어오는 식으로 1주일에 한 항차가 가능하다. 원정리 세관도 열렸으니까 일부는 나진항에서 육로로 가져오고, 일부는 철도로 가져올 것이다. 갑을방직·쌍방울 등 한국 회사에서 첫 짐을 싣기로 했다”고 전한다(이 항로로 나진항을 출발한 화물선이 10월4일 부산에 첫 입항해 하역한 뒤 10월6일 다시 한국 짐을 싣고 나진항으로 떠났다).

그러나 여기에도 장애가 없지 않다. 원정리로 빠져나가는 도로 수송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막대한 화물을 도로로 다 뺄 수가 없으므로 철도를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나진항에서 두만강변을 따라 중국 도문으로 이어지는 북한 철도는 국경을 넘을 때 ‘조선·중국 국제련운 승인’이라는 규정에 따라 이용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승인 항목 가운데 컨테이너 규정이 없을 뿐 아니라 양국 간에 화물 차량은 넘어갈 수 있어도 기관차 차량은 넘어갈 수 없게 규정돼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북한과 연변 자치정부를 설득해 컨테이너 운송 협의를 성사시키고, 화물차만 국경을 넘는 대신 양국 기관차가 넘겨주는 방식을 취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전용만 회장의 걱정은, 화물차 8량에 컨테이너가 30~40개씩 실리는데 북한의 화물 수송 기관차는 아직 증기 기관차여서 앞뒤 2 대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 사정이 어려운 북한 실정으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북한도 적극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한의 북방철도국(북한 철도부의 나진·선봉·청진 지역 담당) 부국장이 평양에 가서 문제 해결을 꾀하고 있다고 한다.
“21세기 ‘동해의 장보고’ 되겠다”

전용만 회장은 남북 3차 쌀회담과 오는 10월10일 연변에서 열리는 유엔개발계획 투자설명회를 남북 경협의 큰 분기점으로 보고 있었다. 특히 유엔개발계획 투자설명회는 그가 주제 발표자로 나서기로 되어 있어 의욕도 컸다. “유엔개발계획과 중국 중앙 정부가 주최하는 이번 설명회에는 세계 각국 회사 5백22개가 참여하는데, 그 중 1백50여 개가 한국 기업이다. 나를 포함해 아시아은행 총재와 홍콩 대표 등 5명이 발표하기로 되어 있는데, 사전에 내가 구상하는 수송 문제 얘기를 하니까 유엔개발계획 아시아지역 위원장이 적극 후원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남북회담이 팽팽히 가면 걱정이다. 일본·미국은 한국만 지켜보는 처지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북경에서 열린 남북 3차 회담은 그가 우려한 상황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지난 2년간 북한을 뛰어다니며 일을 풀어나간 과정의 고충을 예로 들어 한국 정부와 기업에 끈기와 인내심을 발휘해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시장 경제를 아는 사람은 이북과 일을 하다 보면 국제법과 국제 경제 질서라는 개념이 없다고 느끼게 된다. 나도 처음에는 그것 때문에 따지고, 어떤 때는 책상까지 치면서 항의했다. 그러나 그러면 반발만 커지고 일이 안됐다. 엉터리가 많아도 이북에게는 알려주면서 편하게 해나가야 한다. 그러니까 풀리더라.”

84년까지 자치주 정부 간부를 지내다 우연히 미국을 방문하고 나서 미국의 번영에 놀라 인생을 사업으로 전환했다는 전용만 회장은, 앞으로 운송 서비스 업종인으로서 남북 화해와 통일의 길을 뚫는 데 기여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동해라는 뱃길에서 다른 어느 나라보다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발휘하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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