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성 불씨 여전···구조 조정만이 살길
  • 장영희기자(ijazz@e-sisa.co.kr) ()
  • 승인 2000.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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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성 위기' 불씨 여전 ··· 확실한 구조 조정 없으면 침몰할 수도
거함 현대호는 위기에서 탈출하고 있는가. 현대 위기의 진원지인 현대건설은 7월 29일 일단 최악의 위기 상황을 벗어났다. 현대건설측은 7월 말이라는 최악의 위기 상황을 넘김으로써 연말까지는 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건설이 몇 개월 시간을 번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발등에 떨어진 불만 껐을 뿐,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

우선 채권 금융기관들의 태도가 언제 어떻게 변화할지 매우 유동적인 상황이다. 7월 25일 '쪽박을 깨는 행동을 하면 반드시 상응하는 책임을 묻겠다'는 이헌재 재경부장관의 엄포로 일단 은행권은 자금 회수를 멈추었다. 회사채와 기업 어음(PC)도 만기를 연장해 주고 있다. 하지만 신규 대출은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소극적 의미의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인데, 이들이 만에 하나 적극적 회수로 돌아선다면 현대건설은 다시 치명적인 위기 상황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

연이어 시장에 충격 던진 '월말 괴담'

현대건설은 5~7월 3개월 동안 무려 1조4천억원을 금융기관들로부터 회수당했다. 현대 채권 금융관들이 현대가 위험하다고 보고 서둘러 발을 빼려 한 것이다. '이렇게 많은 돈을 겨우 두세 달 사이에 회수당하면 대한민국 어느 기업도 유동성 위기를 맞지 않을 수 없다'는 현대건설측의 항변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는 자금회수에 나선 금융기관들을 '저만 살겠다고 약삭빠르게 행동한 쥐새끼'로 비난하기 전에 스스로 위기를 불러들인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대건설 김윤규 사장은 7월 28일 "현대건설을 음해하는 세력이 유동성 위기설을 퍼뜨렸다"라며 음모론을 제기했다. 이 주장은 정당한 것일까.

현대그룹 위기설은 이미 지난해 6월 정부가 대우 워크아웃 방침을 결정한 때를 전후해 증권가에 끈질기게 나돌았다. '대우 다음은 어디?' 증권가가 지목한 재벌은 현대였다. 7월 5일 노무라증권이 '현대그룹의 구조 조정이 가장 미흡하고 경영 실적이 투명치않다'는 보고서를 내놓자 이 풍문은 더욱 퍼져나갔다. 이어 미국의 유력 경제 잡지<포천>이 현대가 구조 조정을 회피하고 사업 확장에만 몰두한다는 기사를 내보냈고, 지난해 8월께 주한 미국대사관이 '현대의 대북사업은 정부의 지원이 필수이나 최근 정부와의 관계가 악화하고 있어 조심스런 접근이 요망된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미국 상공회의소에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외 금융기관들은 현대를 부쩍 수상쩍게 보기 시작했다.
이런 부정적 시각이 급격한 유동성 위기로까지 번지지는 않았지만, 여권 핵심부는 현대 수뇌부에 강도 높은 구조 조정 계획을 내놓으라며 압박했다. 정부의 복안은 동반 위기가 일어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소그룹별 분리. 물론 현대는 정부의 의중대로 지난해 10월 5개 소그룹 분리 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현대는 지난해 말 부채 비율을 200% 이하로 낮추었으며, 올 3월 김대중 대통령 유럽 순방때 다른 재벌들보다 많은 2백억 달러 가까운 외자를 유치하는 등 나름대로 구조 조정에 열심인 모습을 보였다.

가까스로 현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돌려놓으려던 바로 그 때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이 발발했다.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 경질 인사를 둘러싸고 MK(정몽구 회장)와 MH(정몽헌 회장) 진영 간에 극심한 반목이 노출된 것이다. 14일간 여론의 귀와 눈을 온통 잡아두었던 형제간 경영권 다툼은 정주영 명예회장이 MH 손을 들어줌으로써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관망 태도를 보여온 국내외 금융기관 및 신용평가기관들의 의구심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현대의 사실상 구심점인 정명예회장의 판단력과 현대의 위기관리 능력에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4월 들어 현대에 돈을 꾸어준 금융기관들은 현대 자금 관계자들에게 '현대측의 설명은 잘 알겠지만 자금 회수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통보하는 일이 잦아졌다. 일본계 금융기관들은 국내 금융기관들보다 한 발짝 앞서 움직였다. '설마 우리를' 하던 현대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4월 중순 이후 구조조정본부 경영전략팀은 1일 자금 동향을 점검하는 등 비상 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현대는 시장 관계자들이 '월말 괴담'이라는 말을 붙일 정도로 한 달이 멀다고 시장에 큰 충격을 주는 악재를 터뜨렸다. 4월 말에는 현대투자신탁 부실 처리 건으로 정부와 현대가 대치하더니, 급기야 5월 말에는 현대건설이 1차 부도에 몰리는 사태를 제어하지 못했다. 결국 현대는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겠다며 구조 조정 계획을 내놓았고, 여기다 3부자 퇴진이라는, 예상을 크게 웃도는 초강수를 쓰면서 위기 타개에 나섰다.

물론 3부자 퇴진 카드는 현대를 일단 다시 한번 믿어보자는 여론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현대는 이런 믿음을 저버리는 행태를 계속했다. 현대 구조 조정의 시금석으로 여겨진 현대차계열 분리 건이 좋은 예. 현대는 약속 시점인 6월 말까지 공정위가 요구한 계열분리 요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정부, 오너 사재 출연 ·가신 축출 압박

결국 현대는 다시 제2차 유동성 위기를 맞고 있다. 건설에서 발화한 불길이 다른 계열사로 번져간다면 그룹 전체의 위기로 삽시간에 비화할 수밖에 없다. 이미 몇몇 계열사로 옮겨붙는 징후도 나타나고 있다. 그룹 전체의 위기로 비화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정부와 주채권 은행은 5월처럼 적극 진화에 나서며 이번에도 어김없이 현대는 대우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현대는 업계1등 계열 기업이 없었던 대우에 비해 수익성이 양호한 재벌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 차이가 크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최근 발표한 결합재무제표(총수가 경영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계열사를 하나의 기업군으로 간주해 작성한 재무제표)에서도 잘 드러난다. 현대는 지난해 부채 비율(296%)이 당초 관측(350~400%)보다 크게 낮았지만, 예상을 빗나간 것은 또 있었다. 당기순이익이 2조원에서 7백45억원으로 추락한 것이다.

대우에 비해 지배 구조가 복잡한 것이 또 다른 위험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는 지적도 많다. 3월 MK와 MH의 경영권 다툼이 시장 불신을 야기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익히 알려진 얘기다. 최근 현대중공업이 현대전자와 현대증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도 형제간 복잡한 후계 구도와 무관하지 않다. 현대중공업의 대주주이자 고문인 정몽준 의원이 이 소송의 배후에 있다고 벌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세 형제간 알력에 이익치 회장이 고리가 되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는 점이다. 정몽준 의원은 좋은 관계를 유지해온 몽헌 회장에게 타격을 입히더라도 이회장을 축출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현대의 한 관계자는 '정몽준 의원이 지난 5월 말 있었던 왕회장 지분 정리 과정에서 이회장이 정몽헌 회장에게만 유리하게 상황을 만들었으며, 무엇보다 이회장이 전횡을 일삼아 현대를 작금의 위기로 몰아넣는 데 한몫 한 것으로 보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 때 정명예회장이 소유한 현대중공업 지분 11.56% 가운데 11.05%가 정몽헌 회장 계열인 현대상선에 넘어간 것은 사실이다. 정몽준 의원의 지분율은 8.06%로 변동이 없지만 자기 몫으로 믿었던 중공업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익치 회장 측근은 정반대 주장을 폈다. "정의원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회장은 지분 정리 과정에서 전혀 역할을 하지 않았다. 지난 2월 왕회장이 지분을 정리해야겠다는 의중을 몽헌 회장에게 비치자, 몽헌 회장이 정의원을 만나 양해를 구했고 정의원도 흔쾌히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 와서 정의원이 이러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설령 제아무리 이회장이 힘을 쓴다 해도 그는 전문 경영인일뿐 오너의 재산 관계나 지분 정리에는 입도 뻥긋할 수 없는 처지이다."

이 관계자는 기업 대 기업의 문제로 법리 논쟁을 벌여야 할 현대중공업 소송 건이 일부 언론과 MK진영에 의해 이익치 등 이른바 '가산 3인방 때려잡기'로 급속히 변질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지난 5월 말 반짝 나돌았던 가신 3인방 책임론이 최근 다시 불거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가신3인방이란 이회장을 비롯해 김윤규 사장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을 지칭하는 것으로, 정명예회장과 오랫동안 동고동락해온 이들은 모두 공교롭게도 정몽헌 회장 사람들로 알려져있다.

MH진영은 요즘 바짝 긴장하고 있다. 가신 축출 주장이 적진(정몽구 회장 진영)에서 유포되는 것이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 이런 주장이 주채권 은행을 통해 현대에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MH진영은 가신 축출론을 정권 핵심부의 의중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정부 내에 이런 기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금융감독원 역시 현대중공업 건과 관련해 이회장 소환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전문 경영인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금감위의 한 관계자는 "이들은 현대 오너들의 경영권 다툼을 부추겨 시장의 불신을 자초했으며, 무엇보다 구조 조정을 지연시키는 역기능을 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현대 과녜자로부터 3부자 퇴진 카드와 역계열 분리 발상 역시 이들의 작품 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삼성의 한 관계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3부자 퇴진 건은 정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이 경영 실패 책임을 벗어나는 절묘한 카드였다. 가신들 역시 동반 퇴진의 폭풍 속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현재 정부가 현대에 대해 공식으로 강도 높은 구고 조정을, 비공식으로 오너 일가의 사재 출연과 가신 축출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 재계 관계자는 "현정권은 현대 문제를 잘못 다스리면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다. 이번만은 현대로 인한 경제 불안 요인을 확실히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사재 출연이나 가신 축출이 과연 현대의 희생에 도움이 되는 정당한 요구일까. 이에 대해 한 경제학자는 "현대 오너들은 대주주로서 현대를 살리기 위해 최대한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다. 문제가 있는 전문 경영인 역시 책임을 묻는 것이 옮다"라고 지적했다.

물론 현대 위기를 해결하는 정공법은 구조 조정이다. 한 경제 전문가는 "현대가 구조 조정을 확실히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알짜 자산 매각은 물론 실사를 해서 회생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계열사는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건설도 예외일 수 없다. 자동차뿐 아니라 중공업도 빨리 계열 분리를 하도록 압박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정부 일각에서 는 증권과 전자 등 핵심 계열사 매각도 요구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없지 않다.
"위기 관리 시스템 거의 작동 안한다"

정부는 늦어도 8월 15일 전까지는 현대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재계에서는 정부가 현대 문제 사령탑을 이용근 금감위원장과 이기호 경제수석에서 이헌재 장관과 전윤철 공정거래위원장으로 교체했다고 보고있다. 원칙론자인 이장관이나 전위원장을 앞세워 현대 문제를 신속히 마무리하려 한다는 것이다. 최근 정부가 사정기관까지 동원해 재벌을 압박하고 있는 것 역시 1차 표적은 현대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래저래 현대는 전방위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김대통령이 7월 11일 이건희 회장을 독대한 것도 관찰 포인트. 현대가 대북 사업을 수행하기가 어려워질 것을 예상해 삼성을 주요 파트너로 삼으려 한다는 것과, 현대 사태 해결에 삼성의 도움을 요청했다는 관측이 재계에 나돌고 있다.

외환은행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지금 현대에서는 그룹의 전체적인 조정 및 위기 관리 시스템이 거의 작동하지 않고 있다. 왕자의 난 이후 현대 최고 경영진 사이의 분열상이 심각한 지경이다. 구조조정본부는 있지만, 여기서 최소한의 조정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후문이다. 심지어 침몰 직전의 대우에서 볼 수 있었던 말기 현상이 현대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거함 현대호는 어디로 가는가. 과연 회생을 위해 항로를 제대로 잡을 수 있을 것인다. 역시 선장 역할은 정몽헌 회장이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그는 한달째 일본에 체류 중이다. 현대호의 위기는 현대 신화가 무너진 지금부터가 시작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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