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익 음모론’의 과녁은 누구인가
  •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
  • 승인 1998.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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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클린턴 4인방’·우파 언론인·공화당 의원 등 다수 겨냥…“백악관측이 주도한 정치 승부수”
지난 1월27일 미국 3대 방송사 가운데 하나인 NBC의 인기 쇼 프로 <투데이>. 며칠 전부터 모든 언론이 ‘탄핵론’과 ‘사임론’까지 들먹이며 르윈스키와의 성 추문에 연루된 클린턴을 궁지로 몰아넣던 상황이어서 이 날 프로는 특히 대단한 관심을 모았다. 과거 남편이 정치적 위기를 겪을 때마다 구원자로 나섰던 힐러리 여사가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프로에 출연하려고 전 날 뉴욕의 윌도프아스토리아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그는 당일 아침 5시에 일어나 록펠러 광장에 있는 NBC 방송국으로 향했다. 그를 동행한 측근에 따르면, 차 안에서 힐러리는 무척 답답해 하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진행자 메트 로어와 마주앉은 힐러리는 프로가 시작되자마자 이번 사건을 맡은 케네스 스타 검사는 말할 것도 없고 연일 ‘소식통’에 근거한 추측성 보도를 쏟아낸 언론에 대해서도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수천만 시청자가 지켜본 이 날 대담의 하이라이트는 대담 중간에 그가 꺼내든 ‘우익 음모론’이었다. 진행자가 “측근들에게 ‘이번 일은 (클린턴에게)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며 어느 한쪽이 결딴날 것’이라고 말했다는데요?”라고 묻자, 힐러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번 수사는 남편이 취임한 직후부터 꾸며져 온 거대한 우익의 음모(right-wing conspiracy)이다”라고 대꾸했다. 특히 그는 스타 검사를 가리켜 ‘우익과 결탁한, 정치적 동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맹비난했다. 스타 검사는 힐러리의 비난을 ‘난센스’라고 일축했으나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실제로 스타 검사는 과거 폴라 존스 성 추문과 관련해 클린턴의 결백 주장을 공박하는 변론서를 한 보수 여성단체를 위해 써준 ‘전력’이 있다.

백악관 진영에 ‘전열 정비’ 계기 제공

힐러리의 우익 음모론은 특히 보수 논객들의 강한 반발을 불렀다.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이자 대표적인 보수 논객인 조지 윌은 1월28일자 칼럼에서 힐러리의 발언이 흡사 50년대에 좌익 음모론을 펼쳤던 조셉 매카시의 주장을 연상시킨다며 ‘남편의 결점을 우익 음모론으로 몰고감으로써 미국 정치의 편집광적인 행태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라고 꼬집었다. 독설가로 유명한 <뉴욕 타임스>의 우익 칼럼니스트 윌리엄 사파이어는 1월29일자 칼럼에서 ‘이제는 부부가 합세해 과거에 해왔던 대로 사실에는 침묵으로, 혐의 내용에 대해서는 우익 음모론을 제기하며 부인하는 것으로 대응하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물론 힐러리는 우익 음모론을 제기하기 앞서 손익 계산을 면밀히 검토했던 것 같다. 예일 대학 법대 출신 변호사인 그가 남편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자신의 발언이 사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았을 리 없다. 결론은 음모론 제기 쪽으로 기울었다.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마지막 카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힐러리의 전략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이 음모론이 제기된 뒤 지금까지 ‘르윈스키와의 섹스 및 위증 교사 여부’를 중심으로 맴돌던 가십 수준의 논의가 정치 차원의 논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미국 사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보수 우익(공화당 세력)이 스타 검사와 결탁해 클린턴을 백악관에서 쫓아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국민의 관심을 클린턴의 성 추문 자체로부터 정쟁 차원의 논쟁으로 돌려놓았다. 실제로 공화당 지도부는 이번 사태에 개입할 경우 자칫 당파 싸움으로 비칠까 봐 모든 당원에게 함구령을 내리기도 했다.

우익 음모론이 제기된 뒤 그 효과는 여러 모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적절한 대응 방법을 찾아 우왕좌왕하던 백악관 진영을 확실한 전선으로 재결집하는 효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다. 또 다른 효과는 온갖 소문과 추측을 근거로 ‘클린턴 때리기’에 나선 신문·방송 기자들까지 우익 편으로 간주함으로써 언론의 예봉을 무디게 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힐러리가 제기한 우익의 음모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힐러리가 음모론을 펼친 데는 정치적 계산과 함께 남편이 주지사 선거 시절부터 끊임없이 시달려온 우익에 대한 피해 의식이 작용한 것 같다. 클린턴이 74년 아칸소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을 때 보수 우익 인사들은 그가 동성연애자인데다 마약 중독자라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또 92년 주지사 선거 때에도 그는 자신의 성생활을 선거 쟁점으로 몰고간 우익 인사들 때문에 큰 곤욕을 치렀다. 특히 텔레비전 전도사로 유명한 우익 인사 제리 팔웰은 클린턴을 코카인 중독자로 묘사한 비디오 테이프를 제작해 대량 유포했다.
보수 논객들에게도 화살

이런 사건과 관련해 힐러리가 가장 먼저 염두에 둔 우익 인사로는 스타 검사, 모니카 르윈스키 양과 전화로 주고받은 내용을 녹음한 린다 트립, 녹음을 권유한 책 출판업자 루시안 골드버그, 폴라 존스와 그의 변호사 등 이른바 ‘반클린턴 4인방’이 꼽힌다. 모니카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트립은 공화당의 부시 행정부에서 일한 경험이 있으며, 골드버그는 클린턴의 사생활을 샅샅이 밝혀내 이를 책으로 엮고 싶어 안달하는 자칭 ‘클린턴 혐오자’로 알려져 있다.

물론 우익 음모론의 대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클린턴이 92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 나설 때부터 터지기 시작한 성 추문을 집요하게 캐내는 데 앞장서온 일부 우익 언론도 그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 백악관 공보실이 지난해 클린턴 흠집 내기와 관련한 각종 기사를 묶은 3백32쪽짜리 두툼한 책자를 배포하면서 ‘상업주의적 음모에 기인한 기사들’이라고 공격한 것도 이같은 음모론의 연장선에서 나온 조처라 볼 수 있다.

현재 클린턴 때리기의 선봉에 나선 우익 매체로는 <아메리칸 스펙테이터>와 인터넷을 통해 연일 클린턴의 비리를 폭로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매트 드러지의 ‘드러지 리포트’가 있다. <아메리칸 스펙테이터>의 편집장인 애미트 타이럴은 클린턴 탄핵론을 줄기차게 제기해온 대표적인 극우 인사. <클린턴 탄핵>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얼마전 <워싱턴 포스트>와의 회견에서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이야말로 지적으로 나태한 사람이 찾는 마지막 피난처’라며 힐러리를 맹공격했다. 이 잡지는 93년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 시절 많은 여성과 성 관계를 가졌다는 기사를 터뜨려 클린턴 부부에게는 늘 눈엣가시처럼 여겨져 왔다. 또 보수 논객으로 CNN과 ABC 시사 대담 프로에 곧잘 출연해 영향력이 높은 빌 크리스턴과 그가 만드는 <위클리 스탠더드>도 힐러리가 혐오하는 잡지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잡지의 강력한 후원자가 갑부로 소문난 우익 인사 리처드 스카이프라는 점이다. 그가 발행인으로 있는 <피츠버그 트리뷴 리뷰>는 과거 클린턴의 절친한 친구로서 화이트워터 수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자살해 의문을 낳았던 빈센트 포스터와, 비행기 사고로 순직한 론 브라운의 사인(死因)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를 많이 연재해 왔다. 그가 지원하는 우익 단체에는 보수파 두뇌 집단인 헤리티지 재단도 끼어 있다.

런던에서 발행되는 <선데이 텔레그래프>의 발행인이자 클린턴 비판가로 이름 높은 앰브로스 에번스 프리처드 역시 힐러리의 공격 대상이다. 이 신문의 기자들이 쓴 ‘클린턴의 비행’ 기사들은 보수주의 신문에 속하는 미국의 <워싱턴 타임스> <뉴욕 포스트>, 심지어 존경받는 보수 권위지인 <월 스트리트 저널>에까지 곧잘 인용되어 왔다.

일부 정계 인사도 우익 음모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공화당 출신으로 상원 외교위원장인 제시 헬름스 의원과 역시 공화당 출신으로 노스 캐롤라이나 주 상원의원인 로치 페어클로스가 그들이다. 이들은 94년 화이트워터 사건 수사에 미적거리던 로버트 피스크 검사를 스타 검사로 교체하라고 요구한 바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힐러리의 우익 음모론이 클린턴의 직무 수행에 대한 높은 지지도와 과열 보도에 대한 역작용 등과 겹쳐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그 논리적 근거가 약하다고 평가한다. 우선 이번 사건에 대한 보도는 <월 스트리트 저널>과 같은 보수 언론이 아니라 <워싱턴 포스트>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타임> <뉴스 위크> ABC 등 비교적 진보적 색채인 언론에 의해 대서 특필되었다. 게다가 이번 사건의 경우 단순한 성 추문이 아니라 대통령의 ‘위증 교사’여부가 걸린 중대한 사건이어서 모든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우익 음모론은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백악관 참모진이 일련의 전략 회의를 거친 뒤 힐러리의 입을 통해 제기한 고도의 ‘정치적 승부수’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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