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과 사실 사이, 고뇌하는 언론
  •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
  • 승인 1998.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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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언론들, 과열 경쟁 자제 움직임…보도 수위 놓고 자성론 일어
‘대통령의 위기’‘백악관의 스캔들’ ‘대통령 수사 착수’. 이른바 클린턴의 지퍼게이트 사건이 터진 뒤 미국의 주류 언론들이 내보낸 특집 보도물의 제목들이다.

선정적인 대중 매체는 물론이고 주류 언론인 ABC·NBC·CBS 등 3대 방송사와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타임> <뉴스 위크> 등 영향력 있는 권위지에 이르기까지 미국 언론은 지난 1월21일부터 온통 클린턴의 성 추문 캐내기에 매달렸다. 그뿐 아니다. 제리 레노·데이비드 레터맨 등 심야 텔레비전 토크쇼 진행자들, 러시 람보우와 고든 리디 등 전국적인 청취자를 확보한 라디오 프로 진행자들까지 이 대열에 합세했다.

또한 과거 워터게이트 사건을 폭로해 닉슨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봅 우드워드 기자가 부편집장으로 있는 <워싱턴 포스트>도 워싱턴 지국 기자는 물론 뉴욕 본사의 지원팀까지 합세시켜 보도 경쟁에 뛰어들었다. ABC의 고정 시사 대담 프로 <나이트 라인> 앵커인 테드 카펠과 CBS의 메인 앵커인 댄 래더는 때마침 교황의 역사적인 쿠바 방문을 생중계하기 위해 쿠바 수도 아바나에 갔다가 이 `‘선정 보도’를 위해 급거 귀국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같은 광적인 보도 경쟁은 클린턴 대통령이 연두 교서를 발표한 지난 1월27일을 고비로 급속히 수그러들고 있다. 집권 1, 2기 동안 자신이 이룩한 업적을 강조하며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이 연설이 나간 뒤 클린턴에 대한 지지도는 레이건 전 대통령 이후 최고인 73%까지 치솟았다.

CNN도 과열 보도 문제점 다룬 생방송 방영

언론이 과열 보도를 자제하는 움직임이 이같은 여론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영향을 받은 것만큼은 틀림없는 것 같다. 한 차례 광적인 보도 경쟁이 휩쓸고간 뒤 과열 보도에 대한 자성론이 주류 언론을 중심으로 일고 있다. <뉴욕 타임스>의 베테랑 칼럼니스트인 러셀 베이커는 자신의 고정 칼럼 <옵서버>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소식통에 근거한 보도 때문에 언론 사회가 ‘아마겟돈 상황’에 빠져들었다고 꼬집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명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로더는 대통령의 인격은 ‘성적인 순결’뿐 아니라 다른 덕목도 요구한다면서 ‘대중은 이제 끊임없는 성 추문 보도에 신물이 났다’라고 공격했다. 과열 보도의 선두 격이라 할 CNN도 과열 보도의 문제점을 차근히 따져보는 3시간짜리 특별 생방송을 내보냈다.

이같은 자성론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은 보도하지 않는다’는 보도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지 못한 데 따른 고민에서 연유한다. 사실 이번 사건에 관한 보도는 99% 이상이 확인되지 않는 각종 소문과 천차 만별의 소식통에 근거한 것들이었다.

물론 주류 언론조차 확인되지 않은 보도를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어 보인다. 우선 방송과 신문은 CNN처럼 24시간 뉴스를 내보내는 뉴스 채널이나 인터넷 등 분초를 다투는 전파 매체와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악조건에 놓인 지 오래다. <뉴욕 타임스>의 제니 스콧 기자는 “이번 과열 보도는 최근 몇 년 새 급속히 떠오른 케이블 뉴스와 인터넷 뉴스와의 경쟁이 더욱 뜨거워진 데도 원인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저명한 언론 분석가인 팀 로젠스틸 씨도 최근 <뉴욕 타임스>와 회견하면서 “뉴스 공급 환경이 근본적으로 바뀐 상황에서, 오늘날 언론 사회에서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어 보도가 불가함’이라는 규칙이 무의미한 상황에 이른 것 같다”라고 진단했다.

현단계에서 클린턴 스캔들은 확인되지 않은 `‘설’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언론의 관심은 현재 이 사건을 ‘보도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보도하되, 얼마나 하느냐’에 쏠려 있다. 바로 여기에 주류 언론의 본질적인 고민이 숨어 있다는 것이 언론 전문가들의 평가다. 특히 칼럼니스트 러셀 베이커가 지적한 대로, 만일 ‘설’을 근거로 한 주류 언론의 클린턴 때리기가 자칫 힐러리가 제기한 `‘우익 음모론’과 연계된 것으로 일반 대중에게 비칠 경우 지금껏 쌓아온 언론의 신뢰는 크게 손상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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