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북한 경수로 협상의 전모
  • 南裕喆 기자 ()
  • 승인 1995.05.0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베를린 3차 경수로 협상 결렬됐지만, 세부사항은 거의 합의…한국 기술자 북한 진출 ‘난망’
독일 베를린에서 북한과 미국의 경수로 협상이 열리기 약 2주 전인 지난 3월말 미국의 발전설비 업체인 스탠턴그룹 찰스 워든 부사장이 서울을 방문했다. 그는 그 전에 직접 평양을 방문해 화력발전소 건설 및 정유공장 가동을 위한 협의를 북한측과 막 끝낸 참이었다. 서울 리츠 칼튼 호텔에 투숙한 그는, 외교·안보 관련 고위 당국자들과 국내 재벌그룹 임원들을 만나 곧 재개될 경수로 협상에 대해 견해를 피력했다고 한다. 그를 직접 만난 한 국내 인사에 의하면, 하버드 대학 경제학박사 출신인 워든 부사장은 “한국형을 고집하는 것이 반드시 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경수로 자금을 혼자서 다 대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워든 부사장은 <시사저널>의 공식 인터뷰 요청에는 응하지 않았다).

‘웨스팅하우스사 원전 모델 검토’ 사실로 확인

스탠턴 그룹 최고위 간부들이 서울을 방문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던 때에 미국 정부도 ‘한국형 포기’를 설득하기 위해 한국 정부에 다각도로 외교적 압력을 가하고 로비도 벌이고 있었다. 민자당의 한 중진 의원은 공개적으로 “미국이 주한 미대사관을 통해 국회 통일외무위원회 소속 일부 여야 의원들을 상대로 ‘한국형 명칭에 집착하지 말라’고 집요한 로비를 벌이고 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이즈음 한국 정부도 미국 유력 언론사 특파원들에게 적당한 특종거리를 주면서 ‘한국형을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강경 입장을 워싱턴에 ‘홍보’하고 있었다. 이 때가 바로 미국이 웨스팅하우스의 원전 모델을 고려했었다는 보도가 일부 외신에서 흘러나온 시점이다. <시사저널>은, 미국이 한국형(Korean Standard)에 대한 대안으로 검토했던 미 웨스팅하우스 원전 모델은 웨스팅하우스사가 스페인에 제공한 ‘반델로스(Vandellos)’형임을 최근 확인했다. 동시에 한국은 북한에 가까워지는 미국을 외교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외교적 연대를 강화하는 일련의 움직임들을 보이기 시작했다(20쪽 기사 참조).

지난 4월13일 한국 정부는 북한과 친교를 유지해 온 이집트와 대사급 수교를 성사시켜 북한에 (그리고 미국에) 외교적 압력을 가했다. 한·이집트 수교는 북한에게 상당히 치욕스런 일이었을 것으로 한국 정부 관계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유력한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당시 북한은 이집트에 식량 30만t을 긴급히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북한의 군량미가 바닥 났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정보 분석이었다. 이집트 정부가 북한의 요청을 거절하자 다급해진 북한은 다시 ‘5만t이라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한국과 대사급 수교를 앞둔 이집트 정부는 이마저 단호히 거절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외교 소식통은 “북한이 그렇게 간절하게 이집트 정부에 부탁한 적은 일찍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베를린 협상을 앞두고 외교적 압력까지 받는 상황에서 자존심 강한 북한이 원자로 모델에 관해 양보할 리 없었다. 이런 전후 사정을 간파한 미국은 제3차 베를린 전문가 협상이 시작도 되기 전에, 4월21일은 목표 시한(target date)이지 마감 시한(deadline)이 아니라는 점을 거듭해서 강조했다. 미국은 김영삼 대통령이 지방자치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대북 문제에 크게 양보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한국형 명기 사수’라는 원칙을 가지고는 협상에 진전이 있을 수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은 이때 이미 고위급 정치회담을 통해 경수로 공급계약 회담을 돌파한다는 전략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북한과의 협상안이, 대북 강경 자세를 고수하고 있는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로 넘어가면 제네바 기본 합의가 물거품이 된다는 사실을 클린턴 대통령은 잘 알고 있다. 아이티와 보스니아 등 외교 문제에서 살얼음판을 걸어온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과의 협상이 어그러질 경우 재선이 어렵게 된다. 정부 고위 인사들의 움직임에 정통한 한 국내 유력 소식통은 “김대통령의 7월 방미가 협상의 대단원이 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제3차 베를린 경수로 협상은 결렬되었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좀더 시간을 두고 협의하자는 한국·미국·북한 3자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회담의 형식적 결렬보다는 세 차례에 걸친 경수로 회담에서 미국과 북한이 의견 접근을 본 사항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국내 언론들이 최대 쟁점 사항인 ‘한국형 명기’ 여부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쏟아 경수로 회담 전체가 전혀 진전이 없는 것으로 비치는 경향이 있지만, 경수로와 관련한 주요 소식통들은 그동안 미국과 북한이 합의점을 찾은 부분이 많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사저널>은 최근 공개할 수 없는 취재 경로를 통해 미국과 북한은 경수로 건설 위치, 준공 시한, 건설 경비 상환 방법, 기술진 신분 보장 및 법적 처우 등 경수로 지원을 둘러싼 구체 안에 대부분 의견 접근을 보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세부 사항은 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특히 민자당 이세기 의원이 국회에서 우려를 나타냈던 문제인 중유 공급 책임이 미국에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로 이관된 것이 사실로 확인됐다. 미국은 제3차 베를린 협상 때 북한에 협상용으로 제시한 공급계약서 초안에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는 경수로 1기가 완성될 때까지 난방·발전·상업용으로 사용할 중유를 제공하는 것을 보장한다’는 조항을 삽입했음이 확인됐다.

미국은 제네바 합의문에서 영변 핵시설 동결로 인한 에너지 손실에 대한 대가로 북한에 중유를 최고 연 50만t까지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올해 1월 미국은 1차분 5만t을 북한에 이미 제공했으며, 올 10월까지 5만t을 추가로 공급하고, 내년에는 50만t을 공급할 예정이다. 1차 선적분 대금을 지급한 미국 정부는 지난 1월5일 ‘2,3차 선적분부터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가 공급 비용을 부담하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밝혀 국내 보수층 여론의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경수로를 건설할 제1차 선정 지역은 북한이 요구한 함경남도 신포시로 합의됐다. 신포시는 북한이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원전을 짓다 중단한 지역으로, 북한은 협상 초부터 이 지역을 선호해 왔다고 한다. 북한은 자유무역지대인 나진·선봉과 가깝고, 한국이나 평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 때문에 이 지역을 고집해 왔다는 것이 국내 전문가들의 유력한 분석이다. 부지 적합성 여부는 독립적인 조사기관이 하고, 부적절 판정이 나올 경우에만 2차 후보지를 물색하는 것으로 미·북한 양국은 의견 접근을 보았다.

기술자 신분문제, 고위급 정치회담 최대쟁점 될 듯

미국과 북한은 경수로 2기 건설을 2003년까지 마친다고 제네바 합의서에서 발표했으나, 1기의 구체적인 준공 시한은 알려지지 않았다. 베를린 경수로 협상에서 미국과 북한은 경수로 1기의 준공 ‘목표 시한’을 2001년 말로 잠정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경수로 건설 비용 상환은 무이자에 10년 거치 기간을 두는 방안이 검토되었고, 상환 기간은 ‘15년’안과 ‘30년’안 두 가지가 협의되었다. 북한은 국제 차관 조건 중 가장 좋은 ‘무이자에 10년 거치 30년 상환’을 요구해 왔다. 특히 현금이 아닌 현물로도 상환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북한의 요구에 대해서는 한·미 양국 모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상태이다.

베를린 2,3차 협상에서 한국형 명기보다 더 큰 쟁점이 됐던 조항은, 경수로 건설을 위한 기술진의 신분 보장에 관한 문제이다. 미국은 북한에게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나 그 하청업체 직원들에게 외교면책권을 부여하고, 경수로 건설을 위해 이 기구가 파견한 모든 요원에 대해 북한 당국이 신변 안전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은, 외교면책권은 북한과 외교 관계가 있는 나라의 국적 소유자로 제한하고, 신변 안전은 북한과 영사 관계가 있는 나라의 국적 소유자로 제한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이러한 요구는, 한국이 경수로 건설의 중심 역할을 맡는 경우에도 한국 국적의 기술자가 유입되는 것을 최대한 저지하겠다는 의도로 분석된다. 한국 국적 기술자 신분 문제와 실질적인 한국형 채택 여부가 앞으로 열릴 미·북한 고위급 정치회담의 최대 쟁점 사항이 될 전망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