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정권 실세 ‘부통령급’ 없다
  • 崔 進 기자 ()
  • 승인 1998.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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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권 ‘실력자 구도’ 복잡·다층·애매모호
김홍일은 힘 센 실세…이수성은 잠복 실세

이 가운데 대외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뛰는 사람은 한화갑 총무. 동교동계에서 보기 드문 전략가로 통하는 그는 직선 총무로서 대통령과 직통 라인을 열어놓고 가장 분주하게 움직인다. 권노갑 전 부총재, 한화갑 총무와 함께 동교동 3총사 가운데 한 사람인 김옥두 위원장은 당내에서 드러나지 않게 힘을 발휘하는 실세로 통한다.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권노갑 전 부총재의 경우 쉽사리 재기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국민회의 안에서 쌓아놓은 그의 기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대통령의 부름만 있으면 언제든지 당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권씨이다. 다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다시 불러들일 것이냐가 김대통령 몫으로 남아 있다. 한편 혈연주의가 중요한 정치 현실이므로 대통령 장남인 김홍일 의원도 실세 반열의 상위에 올려놓아야 할 것이다.

동교동계와 다른 차원에서 당의 공식적인 실세는 조세형 총재 권한 대행이다. 대선 직후만 해도 ‘원외 얼굴 마담’이라는 얘기마저 들었으나, 광명 보궐선거에서 이기고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힘을 실어 주면서 그의 당내 입지는 한층 탄탄해졌다.

청와대에서는 단연 김중권 실장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현정권에서 가장 화려하게 떠오른 인물을 꼽는다면 김실장이라고 할 만큼 그는 김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많은 얘기를 하는 사람이다. 동교동계인 박지원 공보수석과 이강래 정무수석은 김실장과 함께 청와대 트로이카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대통령과 가장 자주 접촉하고 있는 세 사람은 배경이 달라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과제다. 게다가 청와대와 당의 협조 체제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대선 이후 김중권 실장 못지않게 빠르게 떠오른 사람이 이종찬 안기부장이다. 구주류측과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온 그는 요즘 ‘총풍’으로 정신없이 바쁘다. 한편 이수성 평통 수석부의장도 언젠가 전면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는 잠복 실세로 꼽히고 있다.

권력이 있는 곳에 실세 있다면, 실세 있는 곳에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동교동계인 박지원 공보수석은 신·구 주류간 갈등설에 대해 “모두 똘똘 뭉쳐 도와도 부족할 판이어서 갈등을 빚을 시간적 여유조차 없다”라고 부인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시간이 흐를수록 갈등의 소지는 생겨나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 갈등을 얼마나 최소화하고 잘 극복하느냐가 과제일 뿐이다. 그것은 대통령 몫이고 현정권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사안이다.
권력이 있는 곳에 실세가 있게 마련이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움직이는 실세는 존재했고,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이 그랬듯이 김대중 정권에서도 권력을 에워싸고 있는 실세가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커다란 울타리를 형성하고 있지만, 울타리 안에서는 서로 제휴하거나 팽팽하게 견제하면서 공생하고 있다. 요컨대 전략적 공생이다.

그렇다면 김대중 정권의 실세는 누구인가. 그리고 실세들 간의 역학 관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김대통령이 지난해 12월18일 대선에서 승리한 순간부터 모든 언론과 정치권이 두 눈 크게 뜨고 추적했던 관심사가 바로 누가 실세인가 하는 것이었다. 실세들 가운데에서도 누가 더 힘이 센가, 어느 쪽에 붙어야 더 유리한가를 놓고 대선 직후부터 ‘줄 대기 현상’이 계속되어 왔다.

역대 정권 실세보다 힘·정보 현저히 적어

최근 아태재단 주변에서 일어난 몇 가지 사칭 사건은 줄 대기 현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 예로 얼마 전 자기를 아태재단 부의장이라고 사칭하며 한 유력 대기업을 상대로 사기를 치려던 인사가 경찰 특수수사대에 체포된 경우가 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은 아태재단에 부의장이라는 자리 자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전화 한 통화로 곧장 확인할 수 있는데도 대기업 간부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뻔했다는 사실이다.

이 외에도 아태재단이 실시하는 강좌의 수강생 가운데 은근히 재단 이름을 들먹이며 위세를 과시하려고 한다는 얘기가 재단 관계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래서 한때 아태재단은 아태아카데미 강좌 자체를 폐지하는 문제까지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태재단 주변에서 일어난 이 촌극들은 현정권이 지닌 권력의 생리와 관련해 두 가지 점을 시사한다. 우선 현정권의 실세 판도가 과거 정권에 비해 뚜렷하지 않다는 점이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는 두말할 여지도 없었지만 YS 정권 때만 하더라도 권력 중심은 단연 민주계였다. 국민이나 정치권의 눈으로 볼때 ‘실세=민주계’였다. 이들의 서열도 비교적 단순했다. YS를 오랫동안 따라다녀 밥그릇 수가 많을수록, 즉 상도동 ‘성골’일수록 힘도 강했다. 정권 초기에는 최형우·서석재·홍인길·김덕룡 등 상도동 1세대가 강했고, 나중에는 이원종·강삼재 등 2세대가 뒤를 이었다.

여기에 비하면 김대중 정권의 실세 구도는 복잡한 다층 구도이다. 우선 집권 공신인 동교동계의 경우 임명직을 맡지 않겠다는 대선 공약에 따라 청와대 비서실과 내각에서 제외되어 모두 당에 모여 있다. 게다가 동교동계 맏형인 권노갑 전 부총재는 국민 여론을 의식해 사면 복권된 이후에도 아무런 활동을 못하고 미국에 머물러 있는데다, 김중권 비서실장과 이종찬 안기부장 등 이른바 신주류층이 형성되어 구주류와 거리를 두고 있는 형국이다. 현정권 실세들이 누구인지는 충분히 알려졌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호한 측면이 있다. 아태재단 사칭 사건은 이처럼 실세 구도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인 것이다.

아태재단 사칭 사건이 보여주는 또 다른 시사점은 많은 사람이 아직도 ‘실세를 통하면 안되는 일도 된다’는 실세 만능주의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과거 정권 때는 권력 실세들이 많은 정보를 보유했고, 무리를 무릅쓰고 밀어붙여 일을 관철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이원종 전 정무수석은 정치 전반에 걸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해 ‘부통령’으로 불릴 정도였다. 기자들도 민주계 실세들을 밀착 취재하면 특종을 많이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들어 많이 달라졌다. 실세들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안기부·검찰·경찰 등 공안 기관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지도 않다. 정치권에 사정 바람이 한창 몰아칠 때도 동교동계 의원들 사이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대통령을 도울 것 아니냐”는 불만이 나올 정도였다.

이런 현상은 청와대도 마찬가지. 김영삼 정권 시절 청와대 행정관만 해도 상당히 깊은 내용들을 알고 있었지만, 현정권의 청와대 참모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안기부나 경찰이 보내오는 정보 수준이 예전에 비해 턱없이 낮아져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사석에서 불만을 터뜨리는 청와대 참모들이 적지 않다.

이처럼 실세 구도가 뚜렷하지 않을 경우 소수 실력자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을 방지한다는 장점이 있다. 몇몇 실력자가 권력을 행사할 경우 이들 사이에 힘 겨루기가 벌어져 국정 난맥을 초래할 수 있고, 개개인이 검은돈의 유혹에 빠질 우려 또한 있다. 하지만 실세 집단이 모호할 경우 권력의 구심력이 약해 최고 통치권자의 기반이 약해지는 현상을 초래하는 단점도 발생한다. 이런 장단점을 적절히 조절해 국정 운영력을 극대화하는 것은 최고 통치권자의 역량에 달려 있다.

이처럼 복잡한 ‘실세학’에도 불구하고 현정권에서도 실세는 당연히 있다. 권력의 생리상 현정권의 실세는 누가 뭐래도 권력을 창출한 동교동계다. 이들은 외형상 권부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지만, 김대통령과 공동 운명체이며 나름으로 지지 세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만만치 않다. 현재 국민회의는 사실상 동교동계가 장악하고 있다. 한화갑 원내총무, 김옥두 지방자치위원장, 남궁진 제1정책조정위원장, 설 훈 기조위원장, 윤철상 조직위원장, 그리고 아태재단 후원회장을 맡고 있는 최재승 의원까지 요직에 동교동계가 포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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