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사정·동서 화합·내각제 극복
  • 崔 進 기자 ()
  • 승인 1998.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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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사정·TK 민심 얻기·내각제 극복 ‘발진’
천신 만고 끝에 정권을 잡은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8개월 동안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그리고 ‘제2 건국’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넘지 않으면 안될 고비는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김대통령의 입장은 신중하면서도 단호하다.

지난 10월17일 오후 4시 청와대 본관에서 가진 <시사저널>과의 특별 인터뷰에서 김대통령은 ‘환골 탈태의 자기 개혁’ ‘엄정한 법 집행’ 같은 강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정치 개혁은 중요한 과제이다. 반드시 성공적으로 추진하겠다”라고 다짐했다. 다만 지난 8개월의 국정 운영 평가에 대해서는 “아직 성급한 것 같다. 나름의 성과가 있었으나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라는 간접 화법으로 대신했다. 아닌게 아니라 김대통령이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 즉답을 피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국은 하루도 쉬지 않고 급류를 타고 있다.

김대통령 앞에 놓여 있는 가장 험난한 산은 두말할 것도 없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라는 고봉(高峰). YS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불행한 유산은 김대중 정권을 초반부터 어렵게 만들었고 앞으로 더욱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IMF 정국을 잘 활용하면 국면을 돌파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제난은 위기의 칼인 동시에 기회의 칼이기도 하다.

김대통령은 인터뷰에서 “개혁이 잘 진행되어 대외 신뢰도가 높아지고 외적 요건도 나아지고 있어서 내년부터는 경제가 호전될 것이다”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어쨌든 IMF 정국은 김대통령이 5년 내내 짊어지고 가야 할 가장 무거운 짐인 것만은 분명하다. 경제 문제가 중요하면서도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면 정치 문제는 매일매일 국민의 눈길을 끌면서 파장을 곧장 일으킨다는 점에서 ‘보이는 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보이는 손들 가운데 현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손은 정치권 사정과 TK 민심, JP의 내각제 공세라는 것이 정가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김윤환 구속으로 정치권 사정 대미 장식할 듯

먼저 정치권 사정은 궁극적으로 대야 전략, 나아가 정계 개편 전략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여권 핵심부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여권은 지난 석 달 동안 편파 수사·표적 시비에도 불구하고 주로 한나라당에 대한 사정의 날을 세우고 있다. 10월20일 현재 구속되었거나 구속될 대상은 김윤환·서상목·이부영 등 대부분 야당 인사들이고, 특히 지난 9월17일 언론에 통째로 유출된 현정부의 사정 대상 2백여 명 명단 중에서 정치인 19명 가운데 18명이 야당 사람이었다는 점은, 여권 핵심부의 사정 의지가 얼마나 강하고 한나라당에 대한 공격 의지 역시 얼마나 확고한지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었다.

이 대규모 사정의 대미는 아무래도 허주가 장식할 것 같다. 10월18일 사정 당국의 고위 관계자는 “다른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김윤환 의원에 대해서도 정치적 판단을 하지 않겠다”라며 김의원이 계속 출두를 미룰 경우 사전 구속 영장을 청구하는 강공책도 불사할 것임을 시사했다. 허주를 구속하는 것은 이회창 총재의 당내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고 여당의 TK 전략과 직결되어 있어서 여권에 상당한 위험 부담이 따른다.

그런데도 허주를 치겠다는 것은, 이회창 총재를 계속 몰아붙이고 TK에 대해 정면 돌파 전략을 구사하는 동시에 앞으로 허주가 DJ와 JP 사이에서 내각제 꽃놀이패 역할을 할 가능성에 일찌감치 쐐기를 박는 3중 효과를 기대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처럼 허주 처리 문제는 정계 개편과 TK 공략, 내각제 등 여권 핵심부가 사활을 걸고 있는 사안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DJ 입장에서는 허주라는 산을 어떤 형태로든 넘지 않고는 다음 사안으로 넘어갈 수 없다. 이 단계에서 여권은 허주를 버리기로 한 것 같다.

문제는 허주를 비롯한 한나라당 때리기를 바라보는 여론의 향배이다. 그동안 여론조사 결과는 ‘정치인 사정은 해야 한다’면서도 ‘편파성이 있지 않느냐’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균형추를 어느 쪽에 기울어지게 하느냐에 따라 정국 추이가 달라진다. 여야가 한 치 양보 없이 공방을 벌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DJ 동진 전략의 끝은 신당 창당?

이 과정에서 여권 핵심부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켜보는 것은 TK 민심이다. 여권의 한 고위 관계자는 10월18일 “여론조사 결과 영남에서도 허주 사법 처리에 찬성하는 사람이 40%, 반대는 20%에 불과했다”라는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았지만, 허주 문제와는 무관하게 TK 민심이 잔뜩 틀어져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동교동계에서 드물게 영남 출신인 설 훈 기조위원장이 10월15일 김인규 마산시장 구속에 따른 현지 민심을 확인하러 10월15일 현지에 급파된 것도 여권 핵심부가 TK 동태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여권의 TK 공략 작전은 김대통령의 동서 대화합론·정계 개편 구상과 직결된다. 김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동서 대화합을 강조해 왔고, <시사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도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국민 화합과 국력 결집을 이룩해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김대통령은 동서 대화합을 이룩하기 위해 영남 지역으로 파고들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칠 것은 과감히 치는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하는 것 같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그동안 TK 지역의 구 여권 인사들 영입을 둘러싸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여 왔다. 국정 감사 와중에도 국민회의는 장영철·권정달 의원 등 TK 입당파의 막후 활동에 힘입어 대구·경북에서만 의원 5명 정도를 끌어들일 계획이고, 최근 영입 작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자민련은 지난 10월14일 권해옥·황윤기 전 의원을 영입하는 성과를 올렸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자민련 박태준 총재의 외아들이 정주영가(家)와 사돈 지간인 강원도의 유력 철강업체 부회장의 딸과 오는 11월20일 결혼을 하게 됨으로써 동진 전략에 일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정가에는 김대통령의 동진 전략이 궁극적으로 영호남 대화합을 기치로 내건 DJ 신당을 지향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특히 여권이 최근 야심적으로 결성해 활동하고 있는 민화협이나 제2건국위 등은 신당으로 가는 징검다리일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물론 김대통령은 이런 의구심에 대해 <시사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 단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거기에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면 그렇게 많은 사회 저명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겠는가”라고 일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권의 동진 정책은 국민 대화합의 깃발 아래 적어도 내년 5월 전당대회 전까지는 가열차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DJ가 넘어야 할 ‘험난한 산’ JP

김대통령이 동진 전략을 성공리에 완수했더라도 최종적으로 넘어야 할 산은 JP다. 그가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는 내각제 개헌 문제는 김대통령과 언젠가 담판을 벌여야 할 최대 난제로 꼽힌다. 김대통령은 줄곧 “약속은 지킨다. 다만 경제가 어려우니 내년에 논의하자”는 총론적 지지 입장을 견지해 오고 있지만, 이를 확신하지 못하는 김종필 총리와 자민련은 틈만 나면 ‘내각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김종필 총리는 최근 사석에서 “5·16 할 때 심정으로 (내각제를 추진) 하겠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죽음을 각오하고 밀어붙이겠다는 뜻이다.

김총리는 10월16일 부산 동의대 강연에서도 “새 정부 들어 나름대로 지역 감정 해소와 동서 대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지역 감정의 벽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들린다. 명약은 역시 내각제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가 하면 자민련은 10월14일 김용환 수석 부총재를 포함한 내각제 추진위원회 위원 12명에게 임명장을 수여해 내각제 호(號) 발진을 재촉했다. 요즘 김대통령 처지가 어려운 줄 뻔히 알면서도 김총리가 침묵을 깨고 내각제론을 공개적으로 끄집어냈다는 것은 다분히 공세적인 성격이 짙다.

원래 권력자에게는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이다. 마찬가지로 김대통령에게도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 같은 외부의 적보다 김종필 총리의 자민련을 필두로 하는 내부의 적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더욱 어려운 과제다. 더구나 자민련은 지난 9월4일 사정 정국의 한복판에서 이회창 총재가 내각제 수용 검토론을 내비쳤을 때 쌍수를 들어 환영함으로써 내각제를 위해서는 누구와도 손잡겠다는 이른바 ‘내각제 흑묘백묘론’을 공개 표명한 셈이다.

따라서 내각제 개헌을 둘러싸고 김대통령과 김총리가 충돌할 소지는 다분하다. 사실 대통령이 시퍼렇게 건재해 있는 상태에서 권력 구조를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고, 설령 내각제 개헌을 추진한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방법과 절차 그리고 개헌 이후 권력 구조를 둘러싸고 마찰할 소지가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정가의 지배적인 관측은 국민회의가 최대한 세력을 확대한 뒤, 현행 대통령 중심제 고수 쪽으로 밀어붙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자민련은 역시 최대한 힘을 강화해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려고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양측의 힘 겨루기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그래서 요즘 국민회의와 자민련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영입 경쟁을 대통령제 고수파 대 내각제 개헌파의 물밑 신경전으로 보기도 한다.

취임 8개월째를 맞이한 김대통령을 바라보는 민심은 여전히 기대와 긍정적인 평가가 많지만, 비판의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김대통령이 <시사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후세에 영원히 기억되는 국민의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 개혁과 동서 대화합, 권력 구조 개편이라는 높고도 험한 산을 무사히 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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