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계 "우리는 뒤통수 맞았다"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7.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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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1차 폭로에 대우·쌍방울 거명되자 충격…2차 폭로 강행에 “뒤통수 맞았다”
신한국당 강삼재 총장이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의 비자금 문제를 처음 폭로한 이튿날인 8일.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가 증권거래소를 방문했다. 총재 취임 이후 처음으로 경제 현장을 방문한 것이다. 이총재는 이 자리에서 주식 시장을 회복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치면서, 동시에 자신과 신한국당에 대한 지지율이 높아져야 주가도 높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묘한 얘기였다. 이 발언이 역효과를 냈던 것일까. 상황은 정반대로 되었다. 주가가 14포인트나 폭락하면서 연중 최저치를 갱신한 것이다. 과거에도 여권 대통령 후보를 비롯한 거물 정치인들이 증권거래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이는 대개 호재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회창 대표가 증권거래소를 방문한 뒤 주가가 폭락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부분의 증시 전문가들은 이 날의 폭락이 비자금 폭로에 대한 기업인들의 불안감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했다.

신한국당의 1차 비자금 폭로는 실제로도 재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전직 대통령 비자금 파문이 재연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 때문이었다. 재계는 당시 재벌 총수 7명을 비롯한 기업인 23명이 법정에서 실형을 선고받는 초유의 경험을 한 바 있다. 1차 폭로 역시 전직 대통령 비자금 파문처럼 확대될 가능성이 다분해 보였다. 비자금 실명 전환에 연루된 두 그룹이 실명으로 거론된 데다가 신한국당이 김총재의 비자금 조성에 기여한 기업을 추후 공개하겠다고 예고했기 때문이다.

경제 단체, 비공식 채널 통해 정부에 우려 표명

1차 폭로 당시 김총재의 비자금 40억원을 불법 실명 전환해 준 것으로 지목된 대우그룹은 무엇보다도 이 폭로가 그룹 총수 소환 조사로 이어질 것인지를 우려했다. 김우중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지난 개천절에 사면·복권된 상태였다. 대우그룹 비서실 관계자는 “맨 먼저 회장단을 이끌고 폴란드를 방문 중인 김회장에게 소환 여부에 대한 나름의 전망을 보고했고, 며칠 후에는 일부 경영진이 직접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라고 당시의 다급함을 전했다.

비자금 폭로를 둘러싼 재계의 초기 반응 가운데는 김총재 비자금에 대한 여권의 공격을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는 것도 있었다. 전직 대통령 비자금 파문 이후 줄곧 여권이 김총재의 비자금 내역을 파악하고 있다는 풍문이 유포되어 왔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정치 자금을 제공한 일시·장소·업체가 적시된‘김대중 총재의 비자금 내역’이라는 2쪽짜리 출처 불명 자료가 나돌기도 했다. 이 리스트에는 첫 폭로에서 거론된 쌍방울그룹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9일 폭로된 기업들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정부 감독기관들이 동화은행을 비롯한 일부 금융기관에 있는 김대중 총재 관련 인사들의 계좌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언들이 나오기도 했다. 예를 들어 김총재의 처조카인 이형택씨의 동화은행 계좌와 차남인 김홍업씨의 신한은행 계좌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가 금융권에 유포된 것이다.

한 기업 조사 담당자는 “재계에서는 그동안 여권이 김대중 총재의 비자금 내역을 면밀하게 조사해 자료 형태로 갖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1차 폭로 직후부터 증권가에서는 아예 11개 기업의 리스트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1차 폭로에 대한 경제계의 반응이 부정적으로 나타나자, 신한국당 일각에서는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해 추가 폭로를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더구나 일부 기업인들은 다수 기업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추가 폭로에 대해 크게 걱정한다는 뜻을 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실의 한 관계자는 “전경련을 포함해 경제 단체가 공식으로 전달해 오지는 않았지만, 비공식으로 그런 말을 들었다”라고 밝혔다. 이는 각종 채널을 통해 신한국당 지도부에까지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재계가 추가 폭로에서 기업 이름이 등장하는 일이 없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쌍방울, 비난 여론 힘입어 최종 부도 모면

그럼에도 신한국당은 지난 10일 기습적으로 2차 폭로를 감행했다. 김대중 총재가 92년 대선 당시 10개 기업으로부터 1백34억원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재계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여권의 상황이 그만큼 절박함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진짜로 여야가 뒤바뀐 느낌이다.” 비자금을 건넨 기업으로 지목된 한 회사 임원의 촌평이었다.

그러나 2차 폭로는 1차 때와 달리 재계의 입장을 세심하게 배려한 흔적이 엿보였다. 여권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폭로라는 비난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금난에다가 1차 폭로에서 실명이 거론되는 바람에 최종 부도가 확실시되었던 쌍방울그룹이 좋은 예였다. 이 회사로서는 추가 폭로가 오히려 호재가 되었다. 여권 처지에서는 쌍방울그룹이 하필 추가 폭로가 있던 날 부도 처리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당일 90억원대 어음을 쌍방울에 돌렸던 BOA(뱅크 오브 아메리카)는 특별한 이유 없이 어음을 회수해, 쌍방울은 최종 부도를 면했다.

11일 열린 신한국당 의원총회 결의문에서는 거명된 기업이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도 2차 폭로에 대한 재계의 민심 이반 현상은 진정되지 않았다. 전경련을 포함한 일부 경제 단체들은 무절제한 폭로를 자제하도록 공식 요청할 것을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신한국당 중진 8명이 회동한 지난 12일의 모임에서도 기업을 실명으로 거론한 것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거론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는 추가 폭로 다음 날인 11일의 주가도 1차 폭로 다음 날처럼 폭락할 것인가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가졌다. 상황은 정반대. 근래 보기 드물게 10포인트나 올랐다. 1차 폭로 이후 쏟아진 비난 여론을 의식한 정부와 여권의 눈물 겨운 노력 덕이었을까. 토요일인 이 날 증시에서는 정부가 이 날 증시안정화대책을 발표하리라는 풍문이 나돌았다. 아니면 투자자들이 신한국당의 김대중 총재 비자금 폭로에 대해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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