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표밭, 지킬 수 있을까
  • 文正宇 기자 ()
  • 승인 1997.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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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거부감 ‘위험 수위’…YS와의 관계 설정이 관건
이회창 후보가 21일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는 순간 영남의 한 대의원은 ‘이로써 동군은 완전 전멸했다’는 표현을 썼다. 이번 15대 대선에서 동쪽 출신, 즉 영남 주자가 주요 당의 후보로 나서지 못하게 된 것을 빗댄 말이다. 야당에서도 이미 호남 출신인 DJ와 충청도 출신인 JP가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마당이다. 그런데 여당에서도 선대의 고향이 충청도이며 서울에서 주로 성장한 이회창이 후보 자리를 따냄으로써 이번 대선은 ‘서군의 잔치’로 끝나게 생겼다는 얘기이다.

더군다나 이번 신한국당 경선에서 영남 출신 후보들이 거둔 성적을 들여다보면 초라하기만 하다. 경남 출신의 박찬종 후보는 중도 사퇴했으며, 경북 출신의 이수성 후보는 5위에 그치고 말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 등장 이후 34년 동안 자기 고장 출신의 대통령을 배출해온 영남 유권자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영·호남 대결’ 사슬 끊었지만

덕분에 한국 정치는 이번 대선에서만큼은 ‘영·호남 대결’이라는 사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지만 이회창 후보 본인은 무거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과거 여당 후보들이 누렸던 가장 큰 프레미엄이자 여권의 전통적인 지지 블럭이었던, 영남의 몰표를 기대하기 힘들게 된 것이다.

그에 대해 영남의 유권자들이 결코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조짐은 신한국당 경선장에서 이미 나타났다. 그는 1차 투표 때 42.12%를 득표해 다른 후보들을 압도했지만 영남 지역 대의원의 투표함을 개표할 때만큼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는 부산·경남 지역에서는 이수성 후보에게 확실히 뒤지고,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이수성 후보와 박빙의 승부를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개표장 주위에서는 한때 그의 영남 지역 득표율이 너무나 저조한 것으로 나타나자, 선관위 관계자들이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판단해 다른 지역 투표함과 섞어 개표했다는 얘기마저 나돌았다.

여당의 대의원들이 대세에 민감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에 대한 영남 지역 대의원들의 거부감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부산·경남 지역 대의원들이 그에 대해 가장 큰 반감을 표출했다는 점은 앞으로도 계속 그에게 큰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야당 후보들은 김영삼 정부의 실정(失政)에 초점을 맞춰 정권 교체를 기치로 내걸 것이 뻔하다. 그가 그런 야당 후보들과 맞서려면 때로는 김대통령을 ‘밟고 넘어가야 할’ 필요도 있는데 그때 부산·경남의 유권자들이 이해해 주겠느냐는 문제가 생긴다.

그가 김대통령을 계속 감싸면 현 정부와 자신이 앞으로 꾸리려는 정부를 차별화하지 못하고 대선 기간 내내 야당의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을 것이다. 반면 그가 김대통령과 자신의 고리를 차단하려 하면 부산·경남의 유권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가 여당 경선 과정에서 줄곧 1위 자리를 고수하자 이수성·박찬종 등 영남 출신 후보 진영에서는 은근히 영남 후보 대망론을 유포해 왔다. 이회창 후보가 경선에서 최후 승자가 되면 영남 유권자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고장 출신 후보를 내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일 것이고, 그럴 경우 탈당해 신당을 꾸릴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두 후보 모두 지금은 경선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상황이 언제 바뀔지 알 수 없다. 특히 후보 사퇴를 하며‘아주 짧은 기간에 화려하게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한 박 후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이회창 후보는 경선에서 승리한 뒤 당내 화합을 내세우며 두 사람을 끌어안으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지만 경선 과정에서 갈등의 골이 깊어져 관계가 쉽사리 복원될지 의문이다.

영남표는 여당에 가게 마련이고, 여당에서 뛰쳐나온 주자는 유권자들에게 외면당한다는 것이 그동안 정치권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후보에 대한 영남 유권자들의 거부감이 ‘위험 수위’이고, 자기 고장 후보를 내지 못한 상실감도 커 그런 상식은 깨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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