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과 천운이 만든 ‘이회창 신화’
  • 吳民秀 기자 ()
  • 승인 1997.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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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상대로 이회창 후보가 집권 여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거머쥐었다. 재검표 등 우여 곡절 끝에 1차 결선에서 2위로 올라온 이인제 후보는 2차 결선 투표에서 ‘반 이회창 4인 연대’ 측의 몰표를 엮어내는 데 실패해 이회창 후보에게 큰 표차로 패했다. 여당 후보가 대권을 잡는다는 한국 정치의 ‘깨어지지 않은’ 관행으로 볼 때,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이회창은 대권으로 가는 지름길에 성큼 들어선 셈이다.

물론 경선 막판까지 가슴 졸였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경선 전날 전격적으로 반 이회창 4인 연대가 엮어지자 이회창 캠프는 경선일 내내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의 공세도 대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헌정 사상 처음 열린 집권 여당의 자유 경선은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 드라마틱했지만, 경선 초기에 굳어진 ‘이회창 대세’는 단 한 차례의 반전도 허용하지 않았다.

탈당 0순위로 꼽혔던 이회창

애초부터 정치권에서는 이회창이 무난하게 당선되리라는 관측이 많았다. 각종 여론 조사 등을 통해 확인된 대세가 쉽게 뒤집어지겠느냐는 상식에 근거한 논리였다. 그러나 이변을 허용하지 않은 이회창의 승리는, 역설적이게도 그 자체로서 한국 정치사 최대 ‘이변’으로 기록되고 있다. 정치학자들은 혁명이나 쿠데타라는 극단적 상황을 제외하고는, 정치 초년병이 정계에 투신한 지 1년6개월 만에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 노장들을 제치고 집권당을 장악한 사례는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라고 입을 모은다.

더욱이 이회창은 말 그대로 혈혈 단신이었다. 3당 합당 당시 민주계 의원 30여 명을 이끌고 ‘호랑이 굴’에 뛰어든 YS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비교되는 대목이다. 즉 YS에게는 똘똘 뭉쳐 발군의 기량을 발휘한 응집력 강한 정치 세력과 부산·경남이라는 탄탄한 지역 기반이 있었지만, 이회창은 완벽하게 혼자였다.

드라마의 시작은 YS의 삼고 초려였다. 총선 승리를 위해 ‘구원 투수’가 필요했던 YS는, 94년 총리직 권한 행사 문제로 자신과 결별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더욱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던 이회창을 영입했다. 96년 1월, 이회창의 신한국당 입당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이회창은 곧바로 신한국당 선거대책위 의장을 맡아, 전국을 돌면서 4·11 총선에서 당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회창 대망론’은 일단 순탄한 출발을 보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세력은 전무했다. 전국구 황우려 의원이 이회창을 보필하는 유일한 현역이었다.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 앞에 놓인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총선 이후 정치권에서는 이회창을 둘러싼 두 가지 판이한 전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언론의 여론조사 등을 통해 드러난 민심의 흐름으로 볼 때 이른바 ‘이회창 대세론’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오는가 하면, 그가 당내 세력이 취약할 뿐더러 YS로부터 낙점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이유에서 ‘이회창 불가론’ 또한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이회창 대세론이 주로 언론 등 민심을 반영하는 ‘외곽’에서 흘러나왔다면, 이회창 불가론은 당시까지만 해도 정권을 쥐고 흔들던 민주계의 시각이었다.

심지어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회창이 신한국당 탈당 가능성 0순위라는 관측까지 나왔다. 요컨대 이회창의 활용 가치는 총선으로 끝났다는 얘기였다. 퇴임 후 안전 보장을 염려하는 YS로서는 이회창의 원칙주의가 부담스럽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적절한 기회가 오면 그를 ‘방출’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실제로 이회창은 총선 뒤 한동안 관심 밖으로 밀려났었다.

‘이회창 대세론’ 몰고온 킹 메이커 김윤환

대중적 인기는 높지만 당내에 세력을 만들지 못했던 이회창에게, 허주(虛舟) 김윤환의 등장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96년 여름 바다 건너 하와이에서 터져나온 허주의 ‘영남 후보 배제론’은 영남권 주자들의 즉각적인 반발을 받으며 정치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지만, 장기적으로는 이회창 대세론으로 몰아가기 위한 노련한 포석이었다. 실제로 허주는 이때부터 막후에서 정치 신인 이회창에게 훈수를 두며 방향타 노릇을 했고, 자신이 이끌던 일부 민정계 계보원을‘전량 투입’해 이회창 사단의 몸집을 키워갔다.

허주는 언론의 평가대로 이회창 승리의 1등 공신이다. 대세 읽기의 귀재라는 허주가 이회창을 선택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방향 감각을 상실한 부동층 원내외 위원장들에게 ‘풍향계’ 구실을 톡톡히 한 셈이다. 또한 그는 경선 국면에 돌입하자 막후에서 민정계 중심의 나라회를 구성한 뒤 민주계의 정치발전협의회(정발협)를 중심으로 한 반이회창 전선을 교란하는 노회함을 보였다. 정발협의 지지를 기대했던 이수성 후보가 이회창·허주 콤비를 가리켜 ‘假李眞金’(이회창은 허수아비이고 김윤환이 실세라는 뜻)이라고 공박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물론 정치 신인 이회창이 당내파를 물리친 데에는 백전 노장 허주의 공이 컸지만, 근본적으로는 기성 정치에 염증을 느낀 ‘민심’이 상대적으로 신선한 이미지의 이회창에게 유리하게 움직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또한 이회창에게는 고비고비마다 행운도 잇달았다. 천운(天運)이 이회창에게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실제로 이회창 진영의 핵심 측근들은 ‘천운’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지난해 말부터 모든 일이 순조로운 쪽으로만 작용했다.

지난 연말 신한국당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는 이회창의 트레이드 마크인 ‘소신’과 ‘대쪽’ 이미지에도 다소 타격을 주었지만, 정치권의 계산법으로 따지면 ‘김심’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알려진 이홍구 대표가 완전히 무너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회창은 ‘대쪽 어디 갔냐’는 여론의 따가운 비판을 들었지만, 이홍구라는 부담스러운 경쟁자가 자연 탈락하는 행운을 얻은 셈이다.

노동법 파동이 채 수습되기도 전에 터져나온 한보 사건도 마치 이회창의 승리를 위한 전주곡 같았다. 연두 기자회견 때만 해도 자신만만해 하던 YS는, 한보 사건이 불거지자 국정 장악력을 상실했다.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인 김현철씨 비리 문제가 거침없이 폭로되었고 민주계 중진들은 줄줄이 쇠고랑을 찼다. 이때부터 이회창 대세론의 가장 강력한 장애물인 집권 세력 민주계가 구심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것은 3월13일 이회창의 대표직 임명을 전후한 일련의 사건들이다. 3월11일 당내 반 이회창 흐름을 주도하던 민주계 좌장 최형우 고문이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대표직 물망에 오르던 이한동 고문은 마지막 순간에 미끄러졌다. 결국 YS는 기나긴 한보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이회창을 대표 자리에 앉혔다. 이회창 대세론이 급속하게 확산되는 순간이었다.

본선에서도 천운이 따를 것인가

이때부터 7월1일 대표직을 내놓기까지 여권에서는 사실상 ‘두 개의 태양’이 공존한 셈이었다. 정발협을 축으로 한 반 이회창 연대의 집요한 대표직 사퇴 공세가 있었지만 이회창은 이를 묵살했다. 그리고 대표 프리미엄을 다 챙겼다고 판단한 7월1일 YS와의 마지막 주례 보고에서 대표직을 내놓으며, 정발협 해체를 요구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이로써 그때까지 ‘김심’ 논란의 진원지였던 정발협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회창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미 대세를 굳힌 이회창에게 경선 전날 이루어진 4인 연대는 지나치게 늦은 반전 모색이었고, 따라서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했다.

이처럼 이회창의 경선 승리는 △기성 정치권을 불신하는 민심 △허주를 필두로 한 구 여권 세력과의 결합 △YS와 민주계의 급속한 몰락이라는 ‘천운’이 어우러지면서 빚어낸 한 편의 드라마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새로운 얼굴’이 주연을 맡았다는 점에서 일단 국민들의 호기심을 끌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검증 받지 않은 연기력 때문에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 소지도 없지 않다. 대표 재임 시절 이회창은, 반 이회창 세력과의 대표직 사퇴 공방으로 별다른 지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회창은 이제 겨우 1차 관문을 통과했을 뿐이다. 본선 무대에는 그가 당내 경선에서 뛰어넘은 당내파보다 훨씬 노련하고 지역 기반이 튼튼한 야당의 두 김씨가 버티고 있다. 야당과의 싸움에서도 당내 경선 때처럼 ‘천운’이 뒤따를지는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탈락한 경쟁자들을 어떻게 다독거리느냐 하는 점도 과제이다.

‘정치 신인’ 이회창은 한국 정치사에 신기원을 이룩했다. 그러나 당내 화합을 성공적으로 끌어내는 정치력을 발휘하는 데 실패하면, 그의 대권 가도의 가장 큰 걸림돌은 ‘내부의 적’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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