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법 해일 덮치자 ‘빈 배’는 갈 곳을 잃어
  • 崔 進 기자 ()
  • 승인 1995.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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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 대표, 망망 대해의 일엽편주 처지…백의 종군할 수도
허주만큼 ‘싸우지 않고 이기는’ 손자병법의 화전 전략을 충실히 이행해온 정치인도 드물다. 그는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쟁다운 전쟁 한번 치르지 않고도 항상 승자로 남았다. 그러나 비자금 전쟁에서만은 제대로 싸움 한번 못하고 제일 심한 부상자가 될 위기에 몰렸다. 마침내 ‘빈 배’는 침몰하는가.

노태우 비자금 정국 초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빈 배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YS의 칼날이 노씨와 그 주변부만을 겨냥한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자금 정국의 불길이 갈수록 번지자 ‘혹시 허주까지…’ 하는 의구심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YS가 당명 개칭을 지시하고 이틀 만에 5·18 특별법 카드를 뽑아들자 상황은 급변했다. ‘구세력과 손을 끊겠다’는 최고 통치권자의 의지가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여기저기서 ‘이제 허주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라는 말이 들렸다.

YS가 허주에게 당명을 바꾸라고 지시한 것은 11월22일. 공교롭게도 그 날 검찰은 상무대 비리에 대한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91년에 일어난 상무대 사건은 허주가 개입했다는 설이 나도는 사건이다. 당 간판을 바꾸라고 지시한 날 당의 얼굴인 허주의 아킬레스건을 꼬집은 격이다. 허주의 약점은 또 있다. 92년에 발생한 가락동 연수원 부지 매각 사건이다. 하지만 이 와중에서도 허주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강삼재 총장, 당 주도권 장악

그런 김대표로부터 마지막 남은 웃음마저 완전히 빼앗아가 버린 사건이 11월24일 일어났다. 김대통령은 5·18 특별법 제정 문제를 최종 협의하는 과정에서 김대표를 철저히 따돌린 것이다. 청와대의 모든 길은 사무총장으로 통했다. 정국을 뒤흔드는 혁명적 카드를 내놓으면서 대표를 소외시켰다면, 그 대표의 불안한 미래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 때부터 눈치 빠른 언론은 빈 배의 침몰을 거의 기정사실로 하면서 일찌감치 침몰 시기를 예측하고 들어갔다. “차라리 내쫓으라지.” “바꾸고 싶으면 사람만 바꾸지 뭣하러 지도 체제까지 바꾸나.” 허주 진영에서 노골적인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다.

사실 빈 배에 결정적인 구멍을 뚫은 전위부대는 민주계,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민주계 소장파다. 이들은 그동안 일관되게 “허주 체제로는 15대 총선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며 지도체제 개편을 주장해 왔다. 이들은 개혁만이 살 길이라며 민주계 주도론과 개혁 지상주의를 내세웠다. 결과만 보자면, 민주계 소장파의 5,6공 단절 시나리오는 현재까지 거의 그대로 맞아떨어진 셈이다. YS의 5·18 카드가 나오기까지 여야 정면 대결의 선봉에 섰던 사람은 모두 민주계 소장파였다.

우선 강삼재 총장과 손학규 대변인은 여야 전면전과 DJ 죽이기의 최일선에서 백병전을 치렀다. 특히 강총장은 겉으로는 김대표를 깍듯이 모시면서 실제로는 당의 주도권을 한 손에 쥐고 흔들었다. 민정계가 노태우 비자금 관련자 31명 명단이 적힌 괴문서를 살포했다고 지목한 김운환 의원도 대표적인 민주계 소장파다. 당명 개칭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는 박종웅 의원 역시 YS를 18년 보좌해온 민주계 신세대다.

민주계 중진들의 목소리가 서로 조금씩 다른 데 비해 이들 소장파의 목소리는 거의 일치한다. 민자당의 얼굴·몸통·팔다리 전부를 개혁 체질로 바꾸지 않는 한 15대 총선에서 백전백패한다는 것이다. 5,6공 세력과의 어정쩡한 화해나 타협으로는 문민 정부의 개혁 이미지를 살리지 못할 뿐더러 보수 표마저 제대로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 민주계 소장파의 정세 판단이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당 간판만 바꿔 달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당연히 그에 걸맞게 알맹이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불과 한달 전 허주 체제의 위세에 눌려 숨죽여 지내던 소수파가 아니다. 5,6공 싹쓸이에 나선 친위 쿠데타 주역의 당당한 모습이다.

과연 빈 배의 운명은? 내년 1월로 연기된 민자당 전국위원회는 허주의 정치 생명을 공식으로 결정짓는 운명의 장이다. ‘탈당이냐 잔류냐’. 허주의 위상 하락을 기정 사실로 못박은 성급한 세인의 이목은 벌써부터 극단적인 가능성에 쏠려 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제 허주 시대는 갔다”고 말하면서도 그를 내쫓는 데 대해서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을 뛰쳐나간 순간 정치적으로 더 힘을 얻었던 JP 신드롬 때문이다. 만약 김대표가 민자당을 떠나 JP와 손을 잡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DJ까지 여기에 가세할 경우 여권으로서는 사면초가에 몰리게 된다.

민주계 “김대표, 탈당하지 않을 것”

그래서 나오는 방안이 김대표를 수석 부총재로 하고 부총재를 4~5명 두는 복수 부총재안이다. 허주의 체면도 적당히 살려 주면서 YS 직할대, 또는 민주계가 당을 이끌어 가는 절충안인 셈이다. 청와대의 한 고위 인사는 “대표 1명이 당을 끌고 가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고, 계파 갈등이 엄존하는 민자당의 현실을 감안하면 복수 부총재제가 가장 무난하다고 본다”면서 복수 부총재안을 들먹였다.

그러나 당 간판을 바꾸는 마당에 당의 얼굴을 그대로 놔둘지는 의문이다. 청와대의 한 고위 인사는 “설사 허주가 대표 자리를 내놓는다고 해서 팽 당했다고 한다면 곤란하다. 정치인이란 때와 상황에 따라 부침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말해 김대표가 백의 종군할 가능성도 있음을 시사했다. 강총장에 따르면, 대표를 교체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미증유의 사태에 직면해 역사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지엽적 사안’일 뿐이다. 필요에 따라 대표를 얼마든지 교체할 수 있다는 뉘앙스다.

민주계는 김대표가 먼저 당을 박차고 나갈 여지는 그리 크지 않다고 내다본다. 5,6공에 대한 여론이 최악인 데다, 김대표 역시 가락동 연수원 사건이나 상무대 비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허주를 밀어줄 민정계의 입지도 줄어들 대로 줄어든 상태다.

앞으로 허주는 어떤 자리에 있든 더 이상 실세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망망 대해 위의 빈 배가 생애에서 가장 큰 해일에 휩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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