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곡 바꾸는 ‘재벌의 나팔수’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8.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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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승희·공병호 씨, 최근 저서 <진화론적 재벌론>·<기업가> 통해 파격 논리 전개
재벌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동안 재벌 자신이나 그들의 이해를 대변한 경제학자들이 되풀이해 온 논리를 간단히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제발 가만히 내버려 둬라(laissez-faire). 그러면 해결될 것이다.’

이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논리였다. 비록 한국 현실과 다소 동떨어지기는 하지만, 경제학 교과서의 기본 정신에 가장 충실한 명제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재벌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 국제 경쟁 시대에 접어들어 투자 규모가 커지면, 재벌 총수 호주머니에서 투자액을 모두 충당하기가 어려워진다. 유·무상 증자를 해 자금을 조달하면 총수의 지분율이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재산을 나누어 형제에게 물려주는 한국 특유의 상속 전통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형제끼리 그룹을 나누어 갖게 되면 재벌 문제도 자연히 줄지 않겠느냐 하는 논리였다.

이런 분석은 빗나가고 말았다. 지난해 외환·금융 위기를 불러들인 재벌 그룹의 연쇄 부도 사태가 그 근거이다. 기존의 분석은 재벌 그룹의 덩지가 커지면 경제 측면에서뿐만이 아니라 정치·사회 면에서도 영향력이 증대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다. 재벌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배경으로 하여 부족한 투자 자금의 대부분을 금융기관으로부터 빌려 충당했다. 당초 예상했던 것처럼 재벌 그룹이 형제간 소그룹으로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았다. 현대그룹의 경우처럼, 상호 지급 보증과 내부 거래로 그룹 전체의 계열사 수는 꾸준히 늘기만 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재벌들은 예전의 논리를 고수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최근 들어 재벌과 재벌 논객들의 논리가 미묘하게 바뀌고 있다는 징후가 보이기 때문이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KERI) 원장과 공병호 자유기업센터(CFC) 소장이 각각 출간할 예정인 <진화론적 재벌론>과 <기업가>라는 책이 좋은 예이다(한국경제연구원과 자유기업센터 모두 전경련 부설 연구기관이다).

<진화론적 재벌론>은 재벌의 모습이 어떻게 바뀔지를 다룬 책이다. 이런 점에서는 재벌 문제가 저절로 풀릴 것이라던 기존 시각과 일맥상통하지만, 과거처럼 막연한 가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시장 상황상 불가피한 측면을 부각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재벌 처지에서는 듣기에 따라 섬뜩한 얘기일 수도 있다. 이 책은 국제통화기금이 한국 기업에 요구하는 조건들, 특히 거의 전면적인 시장 개방이 재벌의 운명을 결정할 것으로 본다. 국제통화기금의 요구에 따라 수입선 다변화 제도를 비롯해 마지막 보루처럼 남아 있던 수입 장벽들이 사라지면, 제품과 서비스로 승부를 걸지 못하는 업체 가운데 상당수는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병호 소장, 재벌 2세 체제 신랄히 비판

이런 주장은 80년대 초반 이후 10여 년 동안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정책 기획과 개발을 담당하다가 최근 한국경제연구원에 합류한 그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평소 시장 기능과 자율을 중시해온 그는 규제 위주의 정부 방침에는 잘 맞지 않았고, 그렇다고 재벌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맥락은 다르지만 공병호 소장이 쓴 <기업가> 역시 예전의 목소리가 아니다. 자유 기업을 옹호한 하이에크의 신봉자로서 지난 10년 동안 정부와 맞서 왔던 그는, 이 책의 일부를 재벌 2세 체제를 신랄히 비판하는 데 할애했다. 공소장은 최근 몰락의 길을 걸어온 재벌 2세들의 의식과 행태를 꼬집으면서, 창업주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진정한 기업가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여기에는 뜻하지 않게 맞게 된 외환·금융 위기 당시 느꼈던 그의 정신적 충격과 고민의 일단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한국 경제를 일으키고 또 한국 경제를 위기에서 구할 것도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인데, 과연 지금의 재벌 체제가 이에 걸맞는 것인지를 따져볼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 재벌 논객의 글에는 국제통화기금 시대를 맞은 재벌의 두려움과 자기 반성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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