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국의 비극 장기 양심수
  • 김 당 기자 ()
  • 승인 1995.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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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명씨 등 장기 복역자 전국에 74명…“이번 8·15 사면 때는 석방돼야”
김선명(45) 안학섭(43) 한장호(39) 윤용기(37)…. 위에 쓰인 괄호 안의 숫자는 이들의 나이나 출생 연도가 아니다. 그것은 이들이 각각 감옥에서 보낸 세월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아직도 감옥에 있다. 하나같이 분단된 조국의 현실이 만들어낸 ‘희생양’들이다. 하나같이 젊은 날 북의 편에 섰다는 ‘죄’로 죽을 때까지 ‘벌’을 받는 무기수들이다. 하나같이 한 평도 안되는 독방에서 수십 년을 혼자 사느라 병들고 노쇠한, 더러는 말을 잃어버린 이들의 남은 희망은 ‘통일된 조국’에서 눈을 감는 것이다.

대전 교도소 15사는 살아 있는 분단의 상징

동양 최대의 중구금 교정 시설임을 자랑하는 대전교도소 제15사에는 이같은 ‘초장기수’ 17명이 있다. 이들은 모두 이른바 ‘비전향’ 또는 ‘미전향’ 장기수들이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는 7년 이상 수형자는 장기수, 20년 이상 수형자는 초장기수로 분류한다. 7년이라는 기준은 과거 국가보안법 위반죄가 통상 7년 이상의 금고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전국 교도소로 범위를 넓히면 20년 넘게 징역을 살고 있는 초장기수는 27명, 이들을 포함한 장기수는 74명이다. 이 가운데 비전향(미전향) 장기수는 33명이다.

이들 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씨(71·무기)이다. 그는 지금 45년째 감옥에서 ‘살아’ 있다. 최근 남아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한국을 다녀갔다. 그가 남아공 백인 정권의 인종 차별 정책과 맞서 싸울 때 국제 사회는 그를 ‘세계 최장기수’라 불렀다. 국제 사회는 한 양심수를 27년이나 가둬놓고 있는 한 국가의 폭력과 야만에 분노했으며,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그가 석방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끈질긴 생명력에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김선명씨는 만델라보다 18년이 더 많은 세월을 0.75평짜리 독방에서 살아 가고 있다. 만델라가 ‘세계 최장기수’일 때 김씨의 ‘세계 최고 기록’이 국제 사회에서 ‘공인’받지 않았을 뿐이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김씨는 세계 최장기수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국내외 인권단체들의 석방 노력과 유엔의 빈 세계 인권대회(93년) 등을 계기로 그는 지금 오히려 국내에서보다 국제 사회에서 더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빈 세계 인권대회에 보고된 김씨의 초장기 구금 사례와, 사진조차 없는(공안 당국은 사진을 포함해 비전향수의 신상에 관한 모든 것을 보안 기밀로 분류하고 있다) 그의 초상화와 걸개 그림(32쪽 사진 참조)을 본 외국 대표들은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니” 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또 유엔 인권위원회 51차 정기회의(95.3)에서도 김씨의 사례는 각국 참가자들로부터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큰 일”이라는 반응과 함께 큰 관심을 끌었다.

그 관심은 이제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27년 수형 기록을 가진 만델라를 ‘양심수’로 선정하지 않았던 국제사면위원회는 93년에 김씨를 양심수로 선정했다. 국제사면위원회는 또 지난해 김선명씨 사례를 유엔 인권위 산하 ‘자의적 구금 실무위원회’에 보고서 형태로 알렸다. 유엔의 자의적 구금 실무위는 중대하고도 지속적으로 인권을 침해 받은 당사자 또는 국제 비정부기구(NGO)로부터 통보 받아 이를 심사해 당사국에 시정을 요청한다. 곧 국제사면위원회는 김씨에 대한 한국 정부의 구금이 적법한 구금이 아닌 ‘자의적 구금’이며 당장 시정되어야 할 ‘중대하고도 지속적인 인권 침해’ 사례라고 보는 것이다.
국제사면위원회는 또 최근 8·15 광복 50돌을 앞두고 김씨를 석방시키기 위한 국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세계 수십 나라의 회원들이 보낸 석방 촉구 편지와 엽서가 하루에도 수십 통씩 청와대와 법무부장관, 민가협 등에 도착하고 있다. 바야흐로 지금 그의 석방 문제는 국제적인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 사회는 왜 그를 주목하는 것일까. 유엔 인권위에 보고된 그의 행적은 이렇다.

김선명은 1925년 일제 식민지 시절 경기도 양평에서 7남매 중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민족 의식이 강하여 일본의 식민 통치에 반대했다. 그는 열 살에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혹독하게 구는 일본인 교장이 싫어 열다섯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가 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다 스물한 살에 광복을 맞아, 그 시기의 다른 많은 청년들처럼 청년운동을 하다가 한국전쟁이 나자 9·28 수복 때 북으로 갔다.

의용군이던 그는 51년 10월14일 인민군 31사단 정찰대 소속으로 중부전선 철원지구를 정찰하다가 10월15일 새벽 4시께 유엔군에게 붙잡혔다. 그는 서울 영등포 포로집결소에 수용돼 있다가 52년 6월 국방경비법 32조(부역죄)로 기소되어(48년에 제정된 이 법은 65년에 폐지됨), 같은 해 8월15일 서울고등군법회의에서 단심 재판으로 15년형이 확정되어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대로 징역을 살았다면 그는 늦어도 66년에 석방되었어야 했다.

오랜 독거 생활로 심신 쇠약

그러나 53년 4월 서울고등군법회의에서 재취조를 받던 그는 갑자기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고, 대구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취조가 다시 시작되었다. 취조관들은 그를 전기 고문, 물 고문과 함께 야전침대 받침(각목)으로 구타하면서 “인민군 정찰대가 아니고 간첩부대인 526군부대에서 남파되었다”고 허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그는 변호인도 없는 재판정에서 “강제로 백지에 무인을 찍히고 고문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호소했으나 휴전 직전인 53년 7월25일 국방경비법 33조(간첩죄)가 추가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런데 54년 2월 한 국선 변호인이 사형집행 대기중인 그를 찾아와 “당신은 너무 억울하니 사형을 면하게 청원하겠다”고 말한 후 2월27일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대전교도소로 이감돼 지금껏 갇혀 있다(법무 당국은 이때 전국의 좌익수들을 대전교도소로 이감했다).

현재 김씨의 옥중 생활은 바깥 세상과 철저히 격리돼 있다. 그는 44년 동안 겨우 네 사람과 여섯 번의 면회(95년 7월31일 현재 5명, 일곱번)가 허락되었다. 53년과 80년에 그의 당숙이 면회를 했고, 89년과 91년에 동생의 처가가, 89년에 출소한 지인이, 92년에 헌법소원 담당 변호인(임종인 변호사)이 전부였다(그후 94년 6월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그를 만난 것이 마지막이다). 김씨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시달리고, 그에 대한 피해 의식(50년 그가 월북하자 아버지와 누이가 총살당함)이 커 그와 연락을 끊고 있다. 김씨는 장기 구금과 고문 후유증으로 신경통·고혈압·백내장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백내장이 심해 가까이 앉은 사람의 얼굴도 못볼 지경이다. 몸무게가 45kg인 그는 오랜 독거 수용으로 말할 기회가 없어 말까지 잃어버렸다.
그가 바깥 세상의 관심을 끌자 교정 당국은 직계 가족말고는 면회를 금지하고 있다. 89년에 얼굴도 몰랐던 제수가 면회를 와서 90세가 넘은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어머니는 김씨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으니, 교도소에 있다는 사실이 혹시 외부인을 통해 어머니한테 알려지지 않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와 함께 복역하다가 출소한 이종환씨(74)는, 그때 그가 근 40년 만에 가족과 면회하고 나서 15사로 돌아와 한 말과 생기찬 눈빛을 잊지 못한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대.” 좀처럼 말이 없는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첫마디이다. 스물일곱 살 총각 때 구속되어 일흔 살이 넘은 지금, 아내도 자식도 없는 그의 마지막 소원은 살아서 어머니를 만나는 것과 조국 통일을 보는 것이다.

유엔 인권위에 보고된 그의 행적은, 그에 대한 법 적용의 타당성과 이 사회의 인도주의적 포용력의 한계에 대한 의문과 함께 ‘도대체 대한민국은 양심과 사상의 자유가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광복과 좌우 이념 대립, 동족상잔 등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속절없이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인 그를, 반 세기 전에 전쟁에서 남쪽과 반대편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영원히 감옥 안에 가둬 놓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하는 물음이 이 문제에 대한 민가협 등 인권단체들의 기본적인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들의 의문은 그러한 역사적·인도적 관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어쩌면 최초의 ‘조작 간첩’인지도 모른다.” 장기수 문제를 7년째 붙잡고 있는 민가협 남규선 총무의 말이다.

“인도적·법적으로도 석방 근거 충분”

지난해부터 이 문제에 대한 법적 해결을 꾀하고 있는 조용환 변호사(덕수합동법률사무소)는 “그는 전쟁중에 반대편 군인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으므로 휴전과 함께 이뤄진 포로 송환 절차에 따라 처리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간첩’으로 규정하여 재판하고 감옥에 가둔 것 자체가 문제이다. 또 그를 재판하고 형을 선고한 ‘국방경비법’이 법률의 효력을 갖추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그 법률에 의해 이뤄진 재판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단지 반대편에 섰다는 이유로 무턱대고 공산주의자로 재단해 놓고 ‘전향’하지 않으면 석방할 수 없다는 정부 당국의 논리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헌법 상의 자유민주주의 기본 원칙이 오늘 이 땅에서 도대체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한다”라고 지적했다. 김씨는 인도적·역사적 관점에서는 물론 법적인 측면에서도 당연히 석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줄 사형, 뒷줄 무기…’ 라는 식으로, 그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고 감옥에 가두는 데 이용된 국방경비법에 따라서 수감된 장기수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접근 방식은 ‘원천 봉쇄’되고 있다. 조용환 변호사는 지난해 5월 대전교도소를 찾아가 김씨와의 접견을 신청했다. 김씨와 또 다른 장기수 안학섭·한장호 씨 등 3명이 위임한 소송을 맡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교도소측은 이들로부터 받은 위임장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접견을 거부했다. 그 후 조변호사는 이들의 서명을 받기 위해 위임장을 접수시키려 했으나 교도소측은 그것마저 거부했다. 이들에 대한 감옥 바깥 세상의 접근 자체가 물리적으로 봉쇄돼 있는 것이다.
“변호사 접견 위해 소송해야 하는 것이 한국 현실”

조변호사는 지난해 12월에 원고 자격으로 대전교도소장을 상대로 접견 신청 거부 처분 취소를 청구하는 행정소송(소송대리인 백승헌 변호사)을 대전고법에 제기했다. 그러나 결심 공판까지 끝나 7월28일로 기일이 잡힌 이 소송의 선고 공판은 이 날 피고측에 대한 재판부의 변론 재개결정으로 돌연 연기되었다. 교도소측의 변론을 더 들어 봐야겠다는 것이다.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법을 잘 아는 법무 당국이 무엇 때문에 ‘법을 어겨 가며’(형사소송법 제34조는 ‘변호인 또는 변호인이 되려는 자는 신체 구속을 당한 피고인 또는 피의자와 접견하고 서류 또는 물건을 접수할 수 있다’고 못박고 있다) 재심 청구를 위한 변호인 접견이라는 첫걸음마저 못 떼게 막는 것일까. 조변호사는 “변호사가 도움을 원하는 재소자를 한번 접견하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소송을 해야 하는 것이 오늘 한국의 현실이다. 그들은 아마 그 사이에 김선명씨가 죽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헌법과 법률을 따지기에 앞서, ‘어디 할테면 해봐라’는 식의 정부 당국자들의 태도 앞에서 법률가로서 절망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변호사의 절망감에도 불구하고 법무 당국의 ‘무법’은 역설적으로 그가 이번 8·15 사면에서 석방되리라는 근거가 된다. 김씨에 관한 행정소송 심판을 뚜렷한 이유 없이 8·15 이후로 연기한 것은 사면의 기준과 대상을 결정하는 법무 당국이 소송에서 법적으로 공세에 몰리기보다는 ‘인도주의’를 내세운 석방 쪽으로 가닥을 잡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법적 해결 노력이 사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7월24일 부산지법 형사4부(재판장 김태우 부장판사)가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조작 간첩’ 사건으로 알려진 ‘신씨 일가 간첩사건’에 대한 재심 청구를 받아들인 것이 그것이다(28쪽·30쪽 상자 기사 참조). 법원이 간첩단 사건을 포함해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해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린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이번 결정은 재심 청구를 준비하고 있는 다른 많은 ‘조작 간첩’ 사건 판결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재야 법조계는 재판부가 이 사건에서 재판 기록을 정밀 검토해 ‘수사기관에서 한 자백에 임의성과 신빙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재판부는 신귀영(58)·신춘석(57)·서성칠(89년 옥사)씨 등 3명이 80년 2~3월 부산 시경 대공분실에 연행된 뒤 같은해 5월3일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 40~70여 일간 영장 없이 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수사 기록을 보면 연행한 이후 4월11일까지 피고인들을 조사한 기록이 일절 없다가 4월11일 작성된 첫 자술서부터 피고인들이 일제히 그리고 동시에 범행을 자백한 것으로 되어 있다”라는 청구인 변호인 측의 주장에 주목했다.
이같은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는, 93년부터 조작 간첩 사건의 진상을 조사해온 천주교인권위원회(위원장 김형태 변호사)와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조성제 신부) 그리고 이 사건을 의뢰 받은 문재인 변호사(30쪽 인터뷰 참조)가 네 번에 걸친 일본 현지 답사와 증거 보강 작업을 한 것이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특히 재판 당시 증인 신문이 이뤄지지 않은 간첩 행위 ‘지령자’ 신수영씨(69·신귀영의 형)의 진술서 및 녹화 비디오 테이프와 관련 증거를 확보해 재판부에 제출했는데, 재판부는 이를 “무죄를 인정할 만한 명백한 증거로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81년 대법원이 확정한 원심의 범죄 사실 요지는, 피고인들이 일본에 거주하는 조총련 간부 신수영의 지령에 따라 잠입, 간첩, 국가기밀 공여, 군사상 기밀 누설, 금품 수수 등의 범죄 행위를 했다는 것이나 재판부는 정작 장본인인 신씨에 대한 사실 확인 조사는 하지 않았다. 수사기관이 간첩단 사건에서 한번 ‘공작 지도부’로 찍으면 법원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관례이다. 또 그동안의 재심 판례는 원심 당시 증인의 불출석에 수사 기관의 강제성(증언 방해)이 없는 한 나중에 재심 청구 때의 증언은 새로운 증거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신수영씨 또한 자신이 간첩 지령자로 되어 있어 체포될까 두려워 귀국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일본 등 해외 동포 간첩 사건에서 조작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민가협, 8·15 앞두고 양심수 465명 명단 작성

재심 개시 결정이라는 희망에도 불구하고 신씨 일가족이 받은 상처는 치유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28쪽 상자 기사 참조). 10년형을 살고 90년에 출소한 신춘석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거의 폐인이 되었으며, 15년형을 살고 지난 6월17일 출소한 신귀영씨 또한 심신이 황폐해지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이들은 살아 남았지만 서성칠씨는 10년 만기를 1년 앞둔 89년에 고문 후유증으로 대구교도소에서 한을 품은 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구 인권위원회는 서씨에 대한 진료와 적절한 치료를 거부하고 수차에 걸친 가족의 병보석 신청을 불허한 교도소장 등을 직무유기 및 살인방조죄로 고발했으나 책임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승훈 신부와 김형태 변호사 등 ‘천주교 조작간첩 진상규명 대책위’와 인권위 대표들은 최근 안우만 법무부장관을 만나 윤공희 주교 등 주교 5명을 포함한 4백여 사제·수도자가 서명한 조작간첩 진상조사 자료와 ‘광복 50주년 기념 양심수 석방 건의서’를 건넸다. 이들은 특히 일본 관련 사건의 강희철·이헌치 등 일본 및 재일교포 사건 장기수 12명과,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수감중인 서경원 전 의원, 박노해 시인, 은수미씨 등 천주교 신자 3명 그리고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안학섭(66·무기) 씨 등 양심수 17명을 석방해 달라고 건의했다.

그 가운데 강희철씨(37·무기) 사건은 최근 그의 상고심 재판부 주심이었던 박우동 변호사(전 대법관·31쪽 인터뷰 참조)가 자신의 회고 에세이집(<판사실에서 법정까지>)에서 이 사건에 대한 ‘공소 사실 조작성’을 고백해 화제가 되고 있다(31쪽 상자 기사 참조). 또 천주교 인권위는 재심 청구를 준비중인 이장형(63·무기)·손유형(67·20년형)·이헌치(44·20년형) 씨 사건도 조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인권위 진상 조사에 따르면, 이헌치씨의 경우 북한에 다녀왔다는 기간에 일본의 대학연구실에서 함께 공부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교수나 동료 대학원생이 6명이나 나왔고, 김영삼 대통령이 야당 총재 시절에 이씨의 아들 성오군을 안아주면서 “이 다음에 아저씨가 대통령 되면 네 아버지를 석방시켜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었다고 한다.

민가협은 이번 8·15 사면을 앞두고 4백65명의 양심수 명단을 작성해 놓고 있다. 민가협은 8월 초 ‘45년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과 양심수 석방을 위한 캠페인’(8월7일~12일) 선포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양심수 전원 석방 및 사면복권, 수배 해제를 위한 1995인 선언 △45년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과 양심수의 고난에 함께하는 ‘하루 감옥 체험’ △‘양심수 어머니들의 고난 그리고 희망’을 담은 백번째 목요집회 등을 명동성당에서 개최한다. 이 기간에 명동 일대에는 온통 김선명씨의 초상화를 새긴 보랏빛 깃발이 나부끼게 된다.

올해는 민족 해방 50돌이자 민족 분단 50돌을 맞는 역사적인 해이다. 대전교도소는 바로 그 분단의 상징이다. 일제 식민통치, 해방과 분단, 동족상잔의 전쟁, 세계 유일한 분단국으로 이어진 민족의 아픔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이곳 동양 최대의 중구금 교도소 15사에는 김선명과 ‘또 다른 김선명’들이 갇혀 있다. 명동에서 깃발들의 나부낌은 곧 이 15사의 문을 활짝 열라는, 그래서 남북이 화해하는 통일 시대를 열자는 소리 없는 아우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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