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삼각 관계, 그 죄와 벌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8.10.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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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은·한성기·장석중 씨, 법률적 문제 많아 사법 처리는 ‘쥐꼬리’될 듯
오정은(46)·한성기(39)·장석중(48) 세 사람이 북한 대외경제위원회 소속 리철운(44) 등에게 15대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당선될 수 있도록 판문점 총격전을 요청했다는 사건은 왜 터져 나왔는가. 10월10일자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서울지검 공안1부는 세 사람과 배후 인물에게 ‘외환(外患) 유치죄’를 적용하겠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형법 제92조는 외환 유치를 ‘외국과 통모(通謀)하여 대한민국에 전단(戰端·전쟁을 일으키는 단서)를 열게 한 사건’이라고 정의하며 ‘이 죄를 범한 자는 사형이나 무기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정부 수립 후 최초 외환 사건으로 기록될지도 모를 이번 ‘총풍’ 사건에서, 세 사람은 어떤 행위를 했고, 이들에게 어떤 죄목이 적용될 수 있을까.

3인 중에서도 주역은 한성기씨다. 93년 민자당 소속 국회의원 ㄱ씨(현 무소속 국회의원)의 보좌관은 사무실로 찾아온 한씨를 만난 적이 있었다. ㄱ씨는 당시 삼성그룹과 가까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보좌관을 만난 한씨는 ‘한국탐험인협회 회장’이라는 직함과 ‘서울방송 TV 제작국’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함(사진)을 내밀며 이렇게 제의했다.

“나는 실크로드 탐사 프로를 제작해 SBS를 통해 방영하는 PD이다. 그런데 제작비가 부족하니 삼성이 제작비 조로 5억원을 협찬하도록 ㄱ의원께서 다리를 놔 달라. 그러면 그중 1억원은 ㄱ의원께 드리겠다.”

보좌관은 일단 ‘알겠다’고 한 후 돌려보내고 서울방송에 한성기라는 PD가 있는지 확인했다. 서울방송 직원은 “한성기라는 PD는 없다. 방송가 주변에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광고주까지 물색해서 방송국을 찾아오는 자칭 프리랜서 PD들이 있다. 한씨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 같다”라고 설명했다.

그후 ㄱ의원 보좌관은 한씨를 ‘정가를 서성이는 사기꾼’이라고 판단하고 만나지 않았다. 97년 박관용 의원이 한성기씨를 만났을 때도 한씨는 프리랜서에 가까운 서울방송 PD라고 자신을 소개했다(24쪽 <시사저널> 인터뷰 참조). 한나라당 국회의원 ㅇ씨도 97년 서울방송 PD를 사칭한 한씨를 만났으나, 그를 사기꾼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97년 봄 학기 동안 오정은씨와 한씨는 고려대 언론대학원을 같이 다녔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가깝지 않았다는 것이 오씨 부인의 설명이다. 두 사람은 언론대학원을 수료한 그해 가을부터 자주 만났다. 발이 넓은 한씨는 정가 뒷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이러한 뒷이야기는 정보 보고서를 써야 하는 청와대 민정비서실 행정관 오씨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시기에 오씨는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야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이회창 캠프에 대선 전략에 관한 보고서를 올렸다. 대선 결과 당선자는 김대중 후보였지만, 오씨의 대학 선배인 ㅇ씨(검사)가 상관으로 임명된 덕분에 청와대에 잔류할 수 있었다. 또 오씨는 지난봄 한씨가 학비를 대주어 고려대 정책대학원 최고위 과정에도 등록했다.

지난 4월 고려대 정책대학원은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을 초청해 특강을 가졌다. 이어 김대중 대통령 초청 특강도 성사시켰다. 고려대에서 이러한 이벤트를 추진한 이는 ㅎ교수였다. 그런데 한성기가 “내가 김대통령과 김실장의 고려대 특강을 성사시켰다”라고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한씨는 김중권 실장은 물론이고 김실장 동생과도 아주 친한 사이였다. 한씨가 김실장 동생과 어울려 청와대를 팔고 다니자, 대통령 친인척 문제를 담당하는 청와대 민정비서실이 긴장했다. 민정비서실은 김실장의 동생에 대해서는 ‘처신 잘하라’고 일침을 가하고, 청와대 하명 사건을 처리하는 경찰청 특수3과로 하여금 8월17일 한씨를 체포케 했다.
한씨 사기 혐의 조사하다 ‘총격 요청’ 드러나

특수3과에 체포되기 전까지 한씨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주치의였던 고창순 박사 명의로 된 추천서를 만들어 포스데이타 사에 제출하고 고문이 되어 월 2백만원씩 수령하고 있었다(총 금액은 2천4백만원 정도). 삼보컴퓨터 ㅇ회장이 관여하는 재단 일을 돕는 대가로 3천만원을 받은 사실도 있었다. 한씨를 넘겨받은 검찰은 한씨가 두 회사로부터 돈을 받은 것은 사기이고, 고창순 박사 몰래 추천서를 만든 것은 사문서 위조라고 판단하고 한씨를 구속했다.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은 한씨가 경찰청 특수3과→안기부 ○○국→검찰을 거치며 조사받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올해 초 안기부 ○○국 팀은 권영해 북풍 관련 사건을 조사해 관련 자료를 서울지검 공안1부에 넘긴 적이 있다. 그런데 자료가 잘못되어 일부 공소 사실이 무죄가 되고, 그 과정에서 안기부 존안 자료가 외부로 흘러나오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이 팀은 ‘감봉 처분’을 받았다.

안기부는 지난해 말 이미 판문점 총격 요청 첩보를 입수했었다. 97년 12월 베이징에서 한성기·장석중 씨가 리철운 등을 만난 후, 북측은 판문점 총격을 요청한 한씨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은밀히 탐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기 안기부 에이전트로 활동한 ㅂ씨도 총격 요청 이야기를 듣고 안기부에 알려주었다.

안기부 팀은 1차 북풍 사건 수사 때 구겨진 체면을 세우려고 한씨 조사에 진력했다. 한 소식통은 이 과정에서 판문점 총격 요청 사실이 <동아일보>에 유출되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가 보도를 준비하자 안기부는 <동아일보> 출신 안기부 공보관 ㅎ씨를 보내 보도 자제를 요청했으나 실패함으로써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오정은씨와 장석중씨는 5년 전 현대상사 ㅇ부장(현재 이사)이 소개해 처음 만난 사이였다. 장씨는 중국에서 수산물을 들여오는 일을 하다가 91년 2월께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한 김명주(사망)-서옥순의 아들인 김진송을 만났다. 김진송은 김일성을 독대할 수 있는 어머니 덕분에 북한을 내집처럼 드나들고 있었다. 93년부터 장씨와 김진송은 북한 조선용흥무역을 상대로 북한 수산물을 진송 1·2호(중국 국적선)에 실어 한국으로 가져오는 사업을 벌였다.

사업상 장씨와 문서를 주고받게 된 조선용흥무역은 장씨에게 한국 이름을 쓰지 말라고 요청해, 장씨는 북한과 교신할 때 ‘장백산’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95년 장씨는 안기부 협조로 ‘필립스 장’ 명의로 된 필리핀 여권을 만들어, 김진송과 함께 북한에 들어가 금강산 부근 철책선까지 돌아보고 귀국했다. 이러한 장씨가 북한 정보를 물어다 줄 때마다 안기부는 천 달러 내외의 경비를 지원했다(장씨는 안기부로부터 매달 2천 달러를 받는다고 오정은씨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장씨 덕분에 민정비서실에 근무하던 오씨는 매우 정교한 북한 정보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97년 초 장씨는 북한산 황복어 14t을 들여와 현대그룹 계열인 금강개발에 납품했는데, 모두 썩어 버리는 바람에 현대측에 1억3천만원을 빚지게 되었다. 다급해진 장씨는 북한이 슈퍼 옥수수 개발자로 유명한 김순권 박사의 도움을 원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장씨는 김박사의 방북을 성사시킨 후 북한에서 옥수수 재배권을 얻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오씨에게 “이 사업이 성사될 때까지 현대측에 진 빚을 유예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오씨는 정·재계에 발이 넓은 한씨를 장씨에게 소개했다.

97년 12월10일 김순권 박사 방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장석중·한성기 씨는 베이징에서 리철운 등을 만났다. 두 사람은 검찰에서 이때 리철운 등에게 한국 대선 상황을 이야기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총격전 요청에 대해서는 서로 진술이 달랐다. 한씨의 변호인 강신옥 변호사는 한씨가 판문점 총격전을 요청했다고 말했으나, 장씨는 “그런 사실이 없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한씨가 북한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라고 진술했다.

3인과 배후 인물 모두 ‘外患’죄 적용 어려워

그런데 한씨에 대한 공소장과 오씨와 장씨에 대한 구속 영장 청구서에는 판문점 총격 요청 부분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검찰은 왜 세 사람에게 외환죄를 적용하지 않는 것일까. 형법 제93조에 규정된 외환죄는 ‘외국과 통모하거나 적국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항적(抗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문제는 ‘외국(外國)’과 ‘적국(敵國)’이라는 단어이다. 우리 사법계에서는 북한을 ‘나라(國)’가 아닌 ‘반(反)국가단체’로 인정해 왔다. 법조 전문가들은 북한이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오씨 등 3인은 물론이고 배후자에게도 외환죄를 적용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국가보안법에는 반국가단체(북한)와의 회합·통신 죄가 있다. 그러나 오씨는 북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고, 장씨는 북한인 접촉을 승인받은 사람이어서 무죄 선고를 받을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보안법 위반 혐의는 승인 없이 북한 사람을 만난 한씨에게만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될 경우 ‘3인 외환 유치 사건’은 사라지고 한씨 혼자만의 국가보안법·남북교류협력법 위반 사건으로 축소된다. 여기에 한씨의 사기와 사문서 위조 사건이 덧붙는다. 오씨는 공무원 신분으로 이회창 후보를 도왔으므로 선거법 위반 혐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법률적인 면에서 본 총풍 3인 사건은 ‘한씨만의 범죄’로 축소되고 오씨는 별건(선거법 등)으로 다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온 국민을 놀라게 하고 정치판을 발칵 뒤집어 놓은 총풍 사건이 ‘태산명동에 서일필’ 정도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 검찰과 안기부의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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