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최악의 인물' 분탕질로 밤새운 사기꾼
정현준 · 진승현 벤처 악동
  • 권은중 기자 ()
  • 승인 2001.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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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에 '검은 그리자' 짙게 드리워
신용금고를 자기 주머니쯤으로 여기며 수천억원을 불법 대출해 기업 사냥을 하다가 구속된 MCI코리아 진승현 부회장(27)과 KDL 대표 정현준씨(32)는 대기업 평사원이나 대리급 나이이다. 이 젊은이들이 벤처업계는 물론 경제와 정·관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사고뭉치들 : 진승현(왼쪽)과 정현준은 신용금고 돈으로 머니 게임에 몰두하다 결국 몰락했고, 금고업과 벤처 기업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두 벤처 악동이 수천억원을 번 수법은 아주 단순하다. 주식 투자를 해 번 돈이나 사채업자의 돈으로 일단 기업을 합병한 뒤 다시 그 기업을 밑천 삼아 벤처 기업 사냥에 나섰다.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을 답습한 셈이다. 이들은 고려대 경영대 출신이라는 것말고도 머니게임의 밑천을 신용금고를 통해 조달해 피해자 수천 명을 낳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합병·매수(M&A) 전문가이던 정씨는 1998년 자신에게 합병을 의뢰한 KDL을 사채업자의 도움을 받아 인수한 뒤 주가가 폭등하자 벤처 재벌이 되겠다는 백일몽을 키웠다.

해외유학파인 진씨는 미국 나스닥의 성장을 지켜본 뒤 한국으로 돌아와 장외 시장 주식을 사모아 번 거액으로 부실 금융업체를 인수하거나 직접 투자했다. 금융지주회사를 만든 뒤 건설회사·벤처 기업을 인수하며 공격적인 경영 방식으로 수천억원을 주무르던 진씨는, 올해 8월 한스종금을 단돈 10 달러에 인수하려다 검찰에 덜미를 잡혔다. 특히 진씨는 3개월간 도피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든 구속을 피하려고 검찰과 국정원에 재벌 총수나 가능할 법한 구명 활동을 펼쳐 수사진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벤처 악동의 분탕질이 우리 사회에 미친 악영향은 막대했다. 이들은 거품 빠진 코스닥 붕괴를 부채질했고, 신용금고가 영업 정지를 당하게 만들어 나라 경제마저 휘청거리게 했다. 또 여당 실세들이 개입했다며 여야가 지루한 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정기국회가 파행으로 치달았다.

문제는 이런 정치·경제적 파행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고 도대체 어디서 멈출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이 정치 사건으로 재구성되는 까닭은 신용금고를 감독해야 할 금감원 실무자들이 너무도 느슨하게 관리 감독을 했고 그 대가로 억대 뇌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금감원은 동방금고나 열린금고가 자기 자본보다 몇 배나 많이 불법 대출을 했다는 사실을 적발하고도 별다른 처벌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진씨나 정씨는 마음놓고 그 돈으로 사업을 확장하다가 파국을 맞았다. 야당은 여기에 금감원뿐 아니라 정치인들이 개입했다고 본다.

열린금고와 동방금고 검사를 책임진 사람이 바로 동방금고 사건으로 자살한 장내찬 금감원 비은행검사 1국장이다. 장국장은 동방금고의 실제 경영자였던 이경자 부회장으로부터 동방·대신 금고 불법 대출 사건을 무마해 주는 대가로 정현준씨가 조성한 사설 펀드에 1억원을 투자하고 주식투자 손실보전금 3억5천만원을 챙기는 등 13억원을 수뢰했다.

장국장의 상급자인 김영재 부원장보도 이경자씨로부터 11억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으며, 한스종금과 관련해 4천9백만원을 수뢰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비리를 눈감아 주는 대가로 금감원의 어느 선까지 뇌물을 받았는지는 정·관계 로비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 장국장이 자살하는 바람에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제2, 제3의 정현준 사건 터진다"

검찰의 태도도 석연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검찰은 정·관계 로비 임무를 맡았던 유조웅 동방금고 사장과 호남 출신 오기준씨가 사건 초기에 미국으로 도피하는 것을 방관해 정·관계 로비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진씨가 여당과 야당 의원에게 총선 자금을 주었다든가, 정현준씨 펀드에 정치인이 가입했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지만 검찰은 증거가 없다며 팔짱만 끼고 있다. 한나라당은 이들이 발행한 수표의 번호까지 들이밀며 수사를 촉구했으나 검찰은 움직이지 않았다. 검찰의 미지근한 태도는 야당의 검찰총장 탄핵소추안 발의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런 소동이 일어나는 와중에 가장 가슴 졸인 이들은 벤처 기업가이다.<중앙일보>가 벤처 기업 최고경영자 4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무려 95%가 진승현·정현준 사건으로 벤처 기업의 이미지가 타격을 입었다고 응답했다. 또 75%가 이런 벤처 사기꾼이 계속 나올 것으로 내다보았고, 21%는 투자협상 실패 등 경영에 직접적인 피해를 보았다고 호소했다.

테헤란 밸리에는 지금도 어느 금고를 인수해 사업을 확장했던 누가 위험하다느니, 기술 개발은 하지 않고 머니 게임에 열중하다 수백억원을 빚진 누가 쓰러진다느니 하는 말이 무성하다. 제2, 제3의 정현준 사건이 터져 테헤란 밸리가 다시 휘청거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전자 상거래 솔루션을 개발하는 한 30대 벤처 기업 사장은 "수익 모델 창출과 기술 개발을 등한히 하고 묻지마 투자자들에게 주식만 팔아 먹으려고 했던 벤처 기업이 연쇄적으로 부도를 내고 있는 것은 업계를 위해 차라리 잘된 일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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