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회장 잃은 현대호, 어디로 가나
  • 이문환 기자 (lazyfair@e-sisa.co.kr)
  • 승인 2001.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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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개지는 현대그룹 운명/
중공업 탄탄, 자동차 '세계 경영' 숙제, 건설 '초토화'


한국 경제의 거목이 쓰러졌는데도 시장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전문가들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사망이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한다. 현대그룹 계열 분리와 구조 조정을 가속화하는 촉매가 되리라는 것이다. 애널리스트들이 구조 조정 수혜주로 매수 추천한 현대중공업·현대자동차 등은 주가가 오르고 있다.


반도체는 홀로서기, 금융 부문은 매각


피보다 더 진한 것은? : 정주영 명예회장이 사망함으로써 현대그룹 계열 분리와 구조조정에 더욱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앞으로 1년 안에 현대그룹은 5개 소그룹으로 쪼개진다. 4월1일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현대그룹과 별도로 '30대 대규모 기업집단'으로 지정될 정몽구 회장의 현대자동차 그룹(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인천제철)은 이미 지난해 9월 맨 먼저 계열 분리되었다. 오는 6월 말까지 '하이닉스 반도체'로 회사 이름을 바꾼 현대전자가 그룹에서 떨어져 나간다.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의 현대중공업 그룹(현대중공업·미포조선·삼호조선·울산종금)도 내년이면 '홀로서기'를 한다. 현대증권·현대투신 등 금융 부문은 이미 매각 방침이 결정되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따라서 기존의 현대그룹에서 남는 것은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이 이끄는 현대건설·현대상선·현대아산·현대엘리베이터 등 이른바 'MH그룹'뿐이다.

이렇게 그룹이 분할될 때 가장 큰 득을 보는 쪽은 현대중공업 그룹이다. 자산 규모 12조원으로 재계 9위인 이 그룹의 핵심은 현대중공업. 세계 최고·최대 조선업체인 이 회사는 지금까지 그룹 계열사의 부실을 도맡아 처리하는 '해결사' 노릇을 해 왔다. 2000년 당기순이익이 1999년에 비해 95%나 감소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열 분리가 끝나면 더 이상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느라 애면글면하지 않아도 된다.

대주주이면서도 현대중공업 고문만 맡고 있을 뿐 경영자로 나선 적이 없는 몽준(MJ)씨와 달리, 몽구(MK)·몽헌(MH) 회장은 앞으로 '아버지의 후광'에서 벗어나 경영 능력을 시험받게 된다. 지금까지는 MK 쪽이 합격점을 받고 있다. 법정 관리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기아자동차를 정상화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해 현대차는 매출 18조원·순이익 6천7백억원이라는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또한 경영권도 확고하게 다져놓았다. 인천제철과 현대중공업이 현대차 우호지분을 확보하고 있고, 현대차 지분 10%를 가진 다임러-크라이슬러로부터 'MK 체제를 10년간 지지한다'는 확약까지 받았다.

그러나 경영인으로서 MK의 도전은 이제부터이다. 지금까지 그가 거둔 성공은 정세영 전 회장이 이룩한 업적에 무임 승차한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현대차의 '효자 상품'은 여전히 소나타이다. 운도 따랐다. 기아차가 단시일 내에 재기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기아차의 주력 차종이었던 RV 차량 '붐'이 크게 작용했다.

엇갈린 운명 : MK가 이끄는 현대자동차 그룹은 지난해 사상 최대 흑자를 내며 질주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앞으로 MK가 풀어야 할 숙제는 '세계 경영'이다. 자동차 애널리스트들은 앞으로 전세계 자동차 업체 중 생산 능력이 연간 6백만대 이상인 '빅5'만 살아 남으리라고 본다. 대형 업체와 합종연횡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현대가 택한 파트너는 다임러-크라이슬러. 하지만 최근 다임러-크라이슬러는 현대차를 '왕따'시키고 또 다른 파트너인 미쓰비시와 밀월을 강화하는 모습이다. 1000cc 미만 자동차를 생산하는 월드카 사업을 미쓰비시와 둘이서만 하기로 했다. 지난 3월 초부터 다임러-크라이슬러가 미쓰비시 자동차 인수 협상에 들어가면서, 현대차와 함께 벌이기로 한 상용차 사업이 물 건너갔다는 말도 나온다. 게다가 다임러-크라이슬러는 지난해 4/4분기 13억 달러 적자를 내며 경영도 최악의 상황이다.

MK가 도전적인 상황을 앞두고 있다면 지난해 3월 '왕자의 난'을 거치며 명실상부하게 현대그룹 계승자가 된 MH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처지다. 무엇보다 현대의 '법통'을 잇는 현대건설과 현대아산이 위기에 처해 있다. 1998년 11월 출범한 아산은 자본금 4천5백억원을 모두 까먹었을 뿐만 아니라 자금 지원도 끊겼다. 지난 1월 현대아산은 외환·조흥 은행에 100억원을 긴급하게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수익성 없는 사업에 누가 돈을 빌려주겠느냐는 것이 은행권 관계자의 말이다.

오는 5월 영화회계법인의 실사 보고서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현대건설은 1조원 이상 결손이 발생해 자본 잠식이 불가피하다. 실사 결과에 따라서 최악의 경우 국내 부문은 청산될 수도 있다. 만약 청산을 피한다고 해도 감자는 피할 수 없다. 이미 채권단에 출자전환 동의서를 제출한 터라 앞으로 MH측이 경영권을 행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해 정부로부터 MH 계열사들이 회사채신속인수제와 같은 '파격적인' 지원을 받은 것도 정주영 명예회장 후광 덕분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분석이다. 따라서 MH에게 정명예회장의 죽음은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조문객을 배웅하기 위해 바깥에 얼굴을 자주 드러낸 MK나 MJ와 달리 장례 첫 날 MH가 빈소 안에서 두문불출한 것은 그의 어려운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엇갈린 운명 : MH의 현대그룹은 전자·금융 부문이 떨어져 나갈 뿐만 아니라 그룹 '법통'을 잇는 건설의 경영권마저 박탈당할 처지에 있다.
ⓒ시사저널 이상철

금융업도 MH의 손을 떠나게 될 듯하다. 현대증권과 현대투자신탁의 장래는 미국 AIG와 정부의 협상에 따라 판가름 날 전망이다. 이미 시장에서는 조건이 문제일 뿐 AIG측에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다는 견해가 나돌고 있다. '제2의 삼성생명'을 만들어 보겠다고 의욕을 보였던 현대생명은 재무 구조가 취약해 퇴출 위기에 몰려 있다.

빅딜을 통해 LG그룹측에 2조5천억원을 지불하며 확장한 반도체 사업도 MH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시티코프가 주도하는 외자 유치가 끝나면 계열 분리가 될 예정이다. 저부가가치 반도체 중심의 사업 구조를 가지고 있는 데다 추가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하이닉스 반도체의 앞날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도 있지만, 시티코프가 '하이닉스 반도체 살리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어 장래가 밝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그만큼 MH로서는 전자 부문 그룹 분리가 뼈아플 수밖에 없다.


"경영권 승계 늦어 현대그룹 위기 왔다"


투신권은 MH 그룹의 장래를 불안하게 본다. 투신사 대부분은 하이닉스 반도체·현대건설 회사채를 후순위채 및 하이일드(고수익) 펀드에 편입해 놓고 있다. 하이닉스 반도체는 반도체 경기만 좋아지면 사정이 나아질 수 있지만 현대건설은 뾰족한 대책이 없다. 올해 말 현대건설이 또다시 유동성 위기를 맞으면 지난해 대우그룹이 부도를 내면서 금융계를 강타했던 '대우채 사태'와 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수 있다.

전문가 중에는 현대가 처한 위기는 경영권 승계가 너무 늦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이도 있다. 금융연구원 정한영 연구위원은 "5∼10년 전 경영권 승계가 이루어졌어야 했다"라고 주장했다. 정명예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빨리 물러났더라면, 그의 후예들은 금강산 관광 같이 '가산을 탕진하는' 대북 사업을 벌이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결국 정명예회장은 맨주먹으로 현대그룹을 일으킨 창업자인 동시에 현대그룹을 기울게 만든 장본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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