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벤처' 정주영, 그 신화의 종언
  • 장영희 기자 (jjang@e-sisa.co.kr)
  • 승인 2001.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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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산 증인 정주영, '불굴의 도전 정신'
'정경유착' 폐해' 명암 남기고 역사 뒤안길로


정주영 신화에 마침내 마침표가 찍혔다. 그는 20세기 한국 경제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거인이었다. 그의 타계는 황제 경영과 정경 유착, 차입 경영과 같은 재벌 체제에 조종을 울리고 있다. 우리 시대의 경제 영웅 정주영이 남긴 빛과 그늘을 조명해 보았다.

인걸이 죽으면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진다고 했던가. 그러나 현대 창업자 아산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세상을 떠난 3월21일은 하늘이 온통 황사로 뒤덮여 별을 볼 수 없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는 까닭이 그날 할 일을 생각하면 즐겁고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설레어서라고 말했던 그는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향년 86세.

'영면' : 울창한 소나무 숲을 뚫고 그는 부모가 묻힌 경기도 하남시 검단산에 있는 가족 묘역을 향했다. 그의 앞에는 영정을 든 장손자가, 그의 뒤에는 두건과 행전, 지팡이·짚신 등을 제대로 갖춘 그의 여섯 아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시사저널 윤무영

3월25일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검단산 자락에 정회장이 나타난 것은 11시30분께였다. 그가 '산골을 흐르는 소리와 산기슭을 훑으며 오르내리는 바람소리가 좋은 터'라고 자랑하며 꼭 반평생을 살았던 인왕산 자락의 청운동 자택을 떠난 지 3시간 반 만이었다. 그는 집을 떠나와서도 곧장 이곳 검단산에 올 수 없었다. 우선 이승에서의 모든 연을 끊어야 했다. 평생 세우고 다듬은 현대 계동 사옥을 그는 5분여에 걸쳐 천천히 둘러보았다. 유가족과 현대 사람들, 추모객 7천여명이 운집한 서울중앙병원 영결식에도 그는 2시간 남짓 머물렀다. 곳곳에서 낮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지만 영정 속의 그는 웃고 있었다.

그가 임종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21일부터 25일까지 정주영 회장은 국민적인 애도를 받았다. 청운동에 3만7천여 조문객이 온 것을 비롯해 국내 71곳과 해외 40곳(북한 포함) 등 분향소 1백11곳을 30만명이 찾아 그의 타계를 슬퍼했다. 인터넷 조문을 포함하면 100만명이 넘었다. 검소한 고인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렀으나, 그의 장례는 국민장이나 진배없었다. 더구나 그는 남한 전·현직 대통령과 북한 지도자의 조문을 받았고, 그들이 보낸 조화에 둘러싸여 영면한 첫 민간인이었다. 뿐만 아니다. 중국이 정부 차원에서 애도를 표했고,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고인의 넋을 기리는 등 그가 떠나는 길은 세계의 눈길을 모았다.


산업화 시대의 상징으로 우뚝


ⓒ조천용

한국 국민 가운데 어느 누가 이토록 세계적인 관심과 주목 속에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이것은 그가 지닌 무게와 위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평소'보통 인생'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지만, 매우 특별한 자취를 남긴 사람이었다. 우선 그가 가진 역사성이다. 그는 20세기 한국사에서 가장 왕성하고 인상적인 기업(起業·企業) 활동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소 판 돈 70원을 종자돈으로, 도전 정신을 밑천으로 삼아 매출 100조원이 넘는 거함 현대그룹을 일구어냈다. 그는 해외 건설업계가 한국 건설업계를 '현대건설과 디 아더스(그밖의 회사들)'로 분류할 정도로 현대건설을 한국 최고의 건설 회사로 키웠다. 그는 또 1974년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 포니를 개발해 한국을 자동차 생산국으로 발돋움하게 했으며,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조선소를 만들었다. 그는'현대'를 통해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 그는 또한 외국 회사와 합작하거나 합병·매수 같은 손쉬운 방법을 거의 쓰지 않았다. 어떤 사업이든 땅에 말뚝을 박고 길을 닦은 후 그 위에 공장을 짓는 것이 정주영 방식이었다.

정주영의 기업가 정신을 연구했던 미국의 경제학자 조지 길더는 "기업인이 쏟아붓는 희생은 심해 속으로 사라지는 헛수고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마침내 산을 움직인다. 이것이 바로 기업인의 역사적 경험이며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기적이다"라고 역설했다.

그는 현대를 만드는 과정에서 수많은 '신화'를 창조했다. 우선 모두가 고개를 가로젓던 한국 경제의 동맥 경부고속도로를, 그것도 세계 최단 공기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완공했다. 1970년대 중동 건설 붐도 일으켰다. 조선소를 채 짓기도 전에 선박 수주를 해낸 일화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특히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나 1984년 서산 간척 사업의 물막이 공사는 신화의 백미이다. 당시 그는 20세기 최대 역사라고 불린 주베일 공사(9억3천만 달러)를 위해 울산조선소에서 만든 10층 빌딩 크기 철구조물을 조각 바지선에 싣고 수천km 떨어진 사우디아라비아에까지 끌고 갔다. 그는 서산 간척지 사업도, 최대 난관이었던 물막이 공사에 온갖 수문학적 공법을 동원해서도 못해낸 일을 폐유조선을 가라앉혀 물살을 약화시키는 이른바 '정주영 공법'을 감행해 성공시켰다. 지성보다 실천, 이론보다 체험, 논리보다 행동을 앞세운 '아산주의'의 승리였던 셈이다.

'햇볕 정책의 옥동자' : 1998년 10월 정회장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금강산 사업을 극적으로 타결했다.

그는 20세기에 태어난 두 세대의 한국인을 상징하는 대표 단수이기도 하다. 그 두 세대는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피폐와 참상이 무겁게 뒤덮인 이 땅에 산업화를 꾀하려 했고, 그들의 선두에는 늘 정주영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심지어 미국 오리건 대학 리처드 스티어즈 교수는 이렇게 단언하기도 했다. "정주영 같은 경영인이 없었다면 한국은 지금껏 농업 국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놀라운 성공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불도저 같은 도전 정신과 진취성, 타고난 부지런함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는 박정희라는, 개발 연대의 동력이자 든든한 후원자인 통치자를 만났다. 정구현 교수(연세대·경영학)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박대통령이 대표이사인 한국주식회사에서 기획실장과 건설본부장 역할을 수행했다." 그가 자신의 야망과 재능을 한껏 발휘할 기회를 얻은, 시대를 잘 타고난 인물이었다는 복거일씨의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서울대는 2학기부터 '정주영과 현대그룹'이라는 부제가 붙은 경영학 특강을 개설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경제와 기업 창업사의 마지막 산 증인이자 한국 사회의 마지막 영웅이라는 점에서 그를 학문적으로 다루게 되었다는 것이 조동성 교수의 말이다.


무모한 대권 도전…시련도 있고 실패도 있었다


'전위 예술' : 1998년 소떼몰이 방북에 나선 정주영 회장은 김대중 정부 햇볕 정책의 파트너였다. 그는 꿈에 그리던 고향 산천을 찾아가며 자신의 방북이 남북한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한 시대의 영웅은 늘 빛과 그늘을 동시에 드리우기 마련이다.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아산은 정경 유착이나 특혜란 말을 매우 싫어했다"라고 증언했지만, 그에게는 늘 정경 유착 기업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그런 그는 정경 유착을 넘어 한때 '정경 일치'를 꿈꾸기도 했다.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나라가 산으로 가든 말든 정쟁에 밤낮이 없고, 걸핏하면 세무 조사에 정치 자금에, 기업 처지에서는 엄청나게 무서웠다"라면서. 그러나 경제 권력이 정치 권력에 도전한 일은 참담한 실패로 귀결되었다.

그는 그 과정에서 현대라는 기업을 사유물화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현대의 돈과 사람을 기업 활동과 무관한 정치판에 끌어들인 것이다. 물론 그가 정치 권력에 뛰어들었다고 해서 현대라는 기업에 정치 보복을 자행한 YS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 자신도'기업은 규모가 작은 때는 개인 것이지만, 규모가 커지면 종업원 공통의 것이요, 나아가 국가 사회의 것'이라는 자신의 기업 철학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현대를 사지로 몰아넣는 원초적 잘못을 범했다.

심지어 그는 1997년 12월 재도전 의사를 보여 현대가 발칵 뒤집힌 적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 참여에 분열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1993년 서슬 푸르던 때 그는 이렇게 말하며 엎드렸다. "오판했다. 후회한다." 실제로 대통령선거법 위반 혐의로 법정에 불려다녔으며 '현대그룹 해체와 소유·경영 완전 분리'를 선언하고 회장 직을 떠나게 됨으로써, 현대나 그나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1998년 9월에는 그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후회는 무슨 후회. 국민이 (YS를) 잘못 뽑은 거지. (날 뽑았다면) IMF는 안되었을 거야. "

그의 노동자관도 논란이 분분한 대목이다. 그는 스스로를 '부유한 노동자'라고 불렀으며 그의 어록에는 '그들이 벌어서 나를 먹이는 것이지 내가 그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다른 재벌 총수와 달리 그가 유난히 노동자들과 씨름을 즐기고 노동 현장에서 동고동락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반면 그에게는 무자비하게 노동자를 탄압한 악덕 자본가라는 정반대 얼굴도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현대의 사업장이 몰려 있는 울산에는 노사 분규가 일어나지 않는 해가 없을 정도였다. 최근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부음 기사에서, 그를 노동자에게 재떨이를 던지고 발로 찬 경영인으로 묘사했다. 노동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지적한다. "현대에 거칠고 힘든 사업장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현대 노사 분규의 최대 원인은 노조를 적대시하는 노무 관리 때문이다. 이것은 경제적 손실을 비롯해 현대 자신은 물론 국가 경제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그의 경영 방식을 폄하하는 경영학자들도 적지 않다. 그는 현대 사람들에게는 물론 세인들에게 '왕회장'으로 불렸다. 왕회장이라는 호칭은, 적어도 1980년대까지는 미덕일 수도 있었다. 그는 신화를 만들어낸 창업자이자 정력적이고 재능 있는 경영자라는 점에서 현대를 통치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는 왕회장이라는 호칭이 의미하는 독단 경영이 더 이상 적절하지도, 긍정적으로 작동하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한국 특파원으로 활동해온 도널드 커크 씨는 〈현대 & 정주영〉이라는 책에서 그의 보스 기질을 이렇게 비판했다. '모든 사업에서 그가 내린 결정에 아무도 제동을 걸 수 없었다. 이런 독불장군 경영은 한동안 불가능이 없다는 신화를 창조한 힘이 되기도 했지만, 많은 비효율과 오류를 낳았다.'

그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는 1997년 경제 위기를 맞아 구조 조정을 서둘러야 했는데도 거꾸로 반도체와 투자신탁업을 인수하며 덩지를 불렸다. 차입 경영으로 이룬 양적 성장 모델은 1990년대에 이미 그 효력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경제 위기 이후에는 완전 용도 폐기되어야 할 운명에 처했는데도, 그는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읽지 못했다.

위기의 그림자가 점점 현대그룹에 드리우기 시작할 때 그는 또 다른 모험을 감행했다. 처음 방북한 지 9년 만인 1998년 6월 소 5백 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통한 방북길에 나선 것이다. 이것은 정주영의 또 다른 신화로 회자되었고, 세계인의 이목도 집중시켰다.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문명 비평가인 기 소르망조차도 "그는 감히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작품'을 창작한 전위 예술가와 다름없다"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필생의 사업으로 상정한 대북 사업은 애당초'주판알이 튀겨지지 않는' 사업이었다. 심지어 그가 현대가 금강산 사업을 독점하는 동안 북측에 1조원을 보장한다고 약속했다는 의혹마저 나돌았을 정도였다. 자본금이 바닥 나고 북한에 지불금을 못 줄 정도로 경영난에 빠져 있는 현대아산에 최근 북한은 6백만 달러짜리 '선물'을 주었지만, 가뭄을 해갈할 정도는 못된다.


영광과 좌절 함께 안긴 대북 사업


'외도' : 경제 권력의 정치 권력을 향한 도전은 실패로 끝났고 그 후 그와 현대그룹은 '정치 보복'을 받아 휘청거렸다. ⓒ시사저널 백승기

물론 대북 사업을 경제적 잣대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금강산 사업은 1998년 11월 역사적인 첫 출항 이후 본격적인 남북 화해와 협력에 물꼬를 튼 역사적 의미가 실로 컸다. 문제는 그의 대북 사업이 너무나 비경제적이며 개인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그의 대북 사업은 '고향과 아버지'를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구조 조정 지연과 무리한 대북 사업으로 국내외의 곱지 않는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을 때 현대에는 엎친 데 덮친 격의 사건이 터졌다. 2000년 3월 일어난 이른바 '왕자의 난'은 현대의 위기를 현실로 만들었다. '가장 겁나는 싸움이 돈을 앞에 둔 형제간 싸움'이라는 말이 있듯이, 형제간 경영권 다툼은 결국 현대를 풍비박산 내며 유동성 위기로 몰고 갔다. 1990년대 중반부터 현대 임원들이 물밑에서'MK'와'MH'계열로 편이 갈려 서로를 헐뜯고 암투해온 반목상이 급기야 표면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현대 경영권 분쟁의 최대 책임자는 정회장이었다. 경영권을 세습하지 않으면 모를까, 그는 너무나 오래 두 아들을 저울질했다. 그를 아끼는 경제인들조차 후계 구도를 분명히하고 그가 좀더 빨리 물러나야 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사실 대선 낙선 후 이미 급속히 심신이 쇠약해지고 있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에게 정치 실험이 실패한 것은 '죽음'과 비슷한 좌절을 가져왔을 것이다.

거목은 울창한 잎과 가지, 함께 살던 덩굴까지 송두리째 땅으로 데려간다. 정주영 같은 큰 사람은 한 시대의 지표 구실을 하게 마련이다. 자연인 정주영의 죽음으로 정주영 신화는 마침표를 찍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압축 고도 성장의 산물이자 황제 경영으로 대변되는 재벌 체제가 급속히 해체되는 시점에 세상을 등졌다. 정주영 신화와 재벌 시대가 동시에 종언을 고하게 된 것이다.

흔히 벤처 정신은 '모험과 도전 정신'으로 요약된다. 그런 점에서 정주영은 벤처 정신으로 근대화 시대를 앞당긴 아날로그 시대의 영웅이었다. 디지털 경제와 정보화 시대로 급속히 옮아가는 21세기는 결코 그의 시대가 될 수 없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디지털로 무장한 벤처 영웅을 요청하고 있다. 정주영 이후, 새롭게 쓰일 신화를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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