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 10명 중 4명
"이민 꿈꾼 적 있다"
  • 김은남 기자 (ken@e-sisa.co.kr)
  • 승인 2001.04.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7대 도시 1,009명 여론조사/자녀 교육이 으뜸 사유…
"해외 이주 준비한 경험 있다" 7.1%


너도나도 한국을 떠나지 못해 아우성이다. 교육 이민·탈출 이민·선진국형 이민. 분석도 진단도 제각각이다. 우리 사회가 최근 이민 열풍에 휩싸이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시사저널〉이 7대 대도시에 거주하는 중산층 1009명을 상대로, 이민 가고픈 속내를 캐물어 보았다. 미국·캐나다·호주·인도에서 날아온 생생한 '이민 보고서'도 함께 실었다.


우리나라 대도시 중산층 10명 가운데 4명 이상(43.3%)이 한국을 떠나 살고 싶었던 적이 있으며, 14명 중 1명(7.1%)은 실제로 이민을 준비해 본 경험이 있다. 〈시사저널〉이 지령 600호를 맞아 실시한 '이민에 대한 중산층 의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렇다.




이민은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 가운데 하나이다. 올 들어 주요 일간지나 방송이 이민 급증 현상과 관련된 기사를 경쟁적으로 내보낸 데 이어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마저 이민 문제가 이슈가 되었을 정도이다. '선진국형 이민' '중산층 이민' '교육 이민' '탈출 이민'처럼 이민의 주체·동기 별로 이민 현상의 성격을 규명하려는 시도 또한 활발하다. 사람들은 왜 한국을 떠나려 하는 것일까.


〈시사저널〉은 이민 돌풍을 일으킨 진원지로 지목되는 대도시 중산층을 대상으로 그 배경을 물어 보았다. 서울 및 6대 광역시(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울산)에 거주하는 30∼59세, 고졸 이상 남녀 1009명을 모집단으로 한 이번 조사는 여론조사 전문 기관인 (주)미디어리서치와 공동으로 진행했다.


"IMF 계기로 이민 생각" 27.5%


으뜸 사유는 역시 교육이었다. '교육 이민'이라는 신조어가 무색하지 않게, 이민을 떠나고 싶었던 적이 있다는 중산층의 절대 다수(43.5%)는 자녀가 받는 학교 교육이 불만족스러워 이민을 생각했다고 응답했다(복수 응답). 과도한 사교육비 부담 또한 주요 이민 희망 사유로 꼽혔다.


그러나 '교육 이민'이라는 표현 자체에 비판적인 이들은 이것이 허상이라고 꼬집는다. 유학을 떠나는 초중고생은 전체의 0.14%(1999년 교육부 통계)로 극히 일부인데, 일부 언론과 보수 기득권 세력이 이를 부풀려 '교육 엑소더스'가 대세인 양 선전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같은 해 통계에 따르면, 교육열이 가장 높다는 서울 지역의 경우 외국 유학을 떠난 중고생은 전체의 0.44% 남짓하다.


문제는 고학력 중산층이 교육 이민 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미나 교수(서울대·교육학)는 지적했다(3월30일 한국교육개발원 교육 정책 포럼). 이들 계층은 교육에 가장 열의가 높고, 교육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교육 여론 주도층'인 만큼, 이들이 발산하는 위험 신호를 현시점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흥미있는 것은, 생계형 이민을 떠나던 1960년대나 이른바 선진국형 이민을 떠나는 2000년대나 부모들이 똑같이 '자녀를 위해서'라는 표현을 앞세운다는 사실이다. 이미나 교수는 한국인이 자신의 행위 동기를 밝힐 때 '나'를 내세우기보다 주요한 타자를 경유하는 커뮤니케이션 코드를 동원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이는 상당 부분 '자녀와 부모 자신을 별개의 개체로 보지 않는 전통적 사고'에서 기인한다. 이교수에 따르면,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과 부모의 인생 성공을 동일시하는 사고는 일종의 문화 지체 현상일 수도 있다. 자녀의 행복은 자녀가 결정해야 하는데도 부모의 기대를 자녀에게 일방적으로 투사하는 것은 서로의 행복에 결코 보탬이 되지 않는다.


자녀를 통해 대리 욕망을 충족하려는 경우가 아니라면 중산층이 자녀 교육을 내세운 이면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설문 조사에서 중산층의 26.1%는 한국 사회의 지나친 경쟁 풍토가 싫어 이민을 생각했다고 응답했다. 직접적으로 직장에서의 미래가 불안해 이민을 떠올린 적이 있다는 응답자도 5명 중 1명꼴(19.0%)이었다. 특히 이민 희망자 4명 중 1명(27.5%)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계기로 이민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응답했다.


"IMF를 맞은 첫 1년 동안 전체 직원의 3분의 1이 잘려 나갔다. 나는 그래도 살아 남았다. 아둥바둥 몇 년 더 버티면 아마 부장까지는 진급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제는 나에게 휴식과 재충전할 기회를 주고 싶다"라고 캐나다 이민을 앞둔 김 아무개씨(36·광고기획사 차장)는 말했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미래조차 불투명한 것이 이번 여론조사에 나타난 현실이다. 응답자들은 자녀 교육이나 불안정한 일자리 이외에 한국을 떠나고 싶은 이유로 한국 사회의 부정 부패(37.5%), 정치권에 대한 혐오(24.9%), 환경 오염(9.6%) 등을 꼽았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공공 부문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이 아무개씨(35)는 "동료 50여 명이 이민을 떠났거나 현재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무능하고 간섭만 일삼는 공무원을 몇 년간 상대하다 보면 이 나라에 미래가 없다는 생각을 너나없이 굳히게 된다는 것이다.


희망 국가는 캐나다, 호주·뉴질랜드, 미국 순




3년 전 은행 퇴출과 함께 일자리를 잃었다가 벤처 기업 자금 담당 이사로 재취업했던 박진호씨(41)는 "교과서대로 업무를 처리했다가는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 찍힐 수밖에 없는 구조에 신물이 났다"라고 말했다. 그는 캐나다 밴쿠버 이민 예정자들의 모임인 '들녘 모임' 총무를 맡고 있다. 현정부의 잇단 실정(失政)은 이민 욕망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최근 인천 부평에서 경찰이 대우자동차 노조원을 잔혹하게 진압한 사실이 알려진 뒤 네티즌의 상당수가 보인 즉자적인 반응은 '이민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경제 규모에 걸맞지 않게 낙후한 사회 복지 제도도 이민자를 양산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고 있다. (38쪽 상자 기사 참조). 이번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가장 이민 가고 싶은 나라로 캐나다(41.2%), 호주·뉴질랜드(34.1%), 미국(14.0%)을 꼽았다. 이들 나라에 이민을 가고 싶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선진적인 사회 보장 시스템(49.7%)과 선진적인 교육 환경(49.4%), 깨끗한 환경(36.4%)이었다.


1998년 다니던 학교를 명예 퇴직한 전직 교사 황 아무개씨(65)는 나이나 다른 자격 조건이 맞지 않아 영주권을 얻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주공사의 설명에도 굴하지 않고 캐나다 이민을 3년째 추진 중이다. "캐나다에 한번 놀러간 일이 있는데 거기 사는 노인들이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돈 없다고 무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한국에 살면 주는 것 없이 상관만 하려 드는 사람이 너무 많다"라고 그는 말했다.


나이 많은 사람만 노후가 불안한 것이 아니다. '정부가 국민연금을 제대로 운용할지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었다'는 박진호씨는 40대 초반이지만 노후를 생각하면서 이민을 하기로 최종 단안을 내렸다고 했다.


이번 조사 결과 중산층은 최근의 이민 증가 현상에 대해 매우(7.4%) 또는 다소(48.9%)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이가 젊을수록 이민에 대해 긍정적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 연령대가 고르게 이민을 지지한 것도 특기할 만한 현상이었다. 이들은 개인마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54.2%), 세계화 시대의 자연스러운 추세(24.8%)이기 때문에 이민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민에 부정적인 사람도 적은 숫자는 아니다(41.0%). 이들 중에는 이민을 일종의 도피라고 생각한다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47.1%). 한 사회학자는 '기득권 재생산'이야말로 이민의 본질이라고 잘라 말했다.


따지자면 오늘날 현실적으로 '합법' 이민이 가능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3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이민 박람회를 찾은 20대 후반 남성은 전문대 출신은 캐나다 이민이 어렵다는 말을 듣고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직업이 좋거나(독립 이민), 돈이 많거나(투자 이민) 둘 중 한 가지 요건은 충족시켜야 대부분의 이민이 가능하다. 호주나 뉴질랜드 쪽으로 이민을 가려면 최소한 토플 500점 이상의 영어 실력은 갖추어야 한다.


한국 사회 미래에 대한 불안 반영


그렇지만 이민 문제를 지나치게 계급 환원론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권혁범 교수(대전대·정치학)는 지적했다. 이른바 '지방대' 교수인 그는 학생들에게 성공하고 싶다면 따지지 말고 이민을 가라고 직설적으로 충고하곤 한다. 한국 사회에서 비명문 대학·비명문 집안 출신이 성공에 이르기란 애당초 불가능에 가까우며, 그렇다면 자기가 노력하기에 따라 '나름의 성공'이나마 거둘 수 있는 사회로 이민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민=고급 두뇌의 사회적 책임 회피'라는 비판적 시각에 대해서도 그는 회의적이다. 개인에게는 사회적 문제에 맞서 싸울 자유 못지 않게 감당 못할 싸움을 회피할 자유가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미래에 대한 중산층의 시각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다. 곧 중산층의 절반 가량(47.4%)은 한국 경제가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4명 가운데 1명(24.2%)은 한국에서의 삶의 질이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육에 대해서는 더욱 부정적이어서, 한국 교육에 희망이 없다는 응답이 무려 39.1%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에게만 '애국적 선택'을 요구할 수는 없다. 이미나 교수가 비유한 대로, 너도나도 이민을 꿈꾸는 작금의 현실은 '잠수함의 토끼'가 내는 경고음을 연상케 한다. 우리 사회가 이를 변화의 계기로 삼지 못한다면 이민으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의 변종 해체 현상은 날로 가속화할 전망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