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천하, 불뿜는 '사극 대전'
  • 박성준 기자 (snype00@e-sisa.co.kr)
  • 승인 2001.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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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3사 각축, 방영 편수 사상 최고…
〈태조 왕건〉〈여인천하〉등 '극적 재미' 강화해 인기 폭발


안방 극장에서 사극 전쟁이 불을 뿜고 있다. '남성 사극' 〈태조 왕건〉이 붐을 주도하는 가운데, '여성 사극' 〈여인천하〉가 급부상 중이다. 방송 3사가 각축을 벌이는 바람에 사극은 사상 유례 없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최인호씨의 소설 〈상도〉가 극화할 예정이며, 송지나·김종학 명콤비도 사극 준비에 돌입했다. 오늘, 사극 붐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살이가 어려울수록 시청자는 사극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는데….




5월23일 SBS 인기 사극 〈여인천하〉의 경복궁 야외 촬영 현장. 오후 3시부터 촬영에 들어간 제작팀은 이 드라마의 초반 절정을 이루는 '조광조의 죽음'(37·38회분)을 찍기 위해 연출가 김재형씨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후 5시께 주인공 강수연씨(정난정 역)가 37회분 '엔딩 신'을 찍기 위해 교태전 뜰 앞에 서자, 촬영 현장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강씨는 사모관대 차림이었다. 조광조가 체포된다는 1급 첩보를 탐지한 정난정이 이를 문정왕후(전인화 분)에게 속히 알리기 위해 변복한 상태로 입궐하는 장면이었다. 대궐 앞에 당도한 강씨는 마침내 외마디 독백을 내뱉었다. "오늘 밤 대궐 안이 피로 물들 것이야…."


'대궐 안이 피로 물들 것'이라는 강씨의 마지막 대사, 그것은 드라마 〈여인천하〉의 상황 전개만을 암시하는 말이 아니다. 안방 극장에 활짝 열리고 있는 '사극 혈전'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데에도 손색 없는 대사이다. 그만큼 최근 방송가는 유례 없는 '역사 드라마 춘추전국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먼저 시청자들이 입맛대로 선택할 수 있는 가짓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SBS와 MBC는 월요일과 화요일 같은 시간대에 〈여인천하〉와 〈홍국영〉을 배치해 맞대결을 펼치고 있다. 주말에는 KBS 1TV에서 〈태조 왕건〉이 방영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KBS 2TV도 〈명성황후〉를 내놓았다. 방송사가 이처럼 동시에 사극을 쏟아내 자웅을 겨루기는 1960년대 방송가에서 사극이 제작되기 시작한 이래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사극에 대한 시청자의 호응도 폭발적이다. 〈태조 왕건〉은 궁예의 최후를 방영한 지난 5월20일 시청률 56.2%를 기록했다. 점유율은 75%. 이 시간대에 텔레비전을 켜놓은 가구의 75%가 〈태조 왕건〉에 채널을 고정시켰다는 뜻이다. SBS 〈여인천하〉, KBS 2TV 〈명성황후〉, MBC 〈홍국영〉도 시청률 경쟁에 가세해 판세를 달구고 있다.


송지나·김종학 콤비도 사극 준비 돌입




현재 상황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하 역사극들이 줄줄이 계획되고 있어 사극 전성 시대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MBC는 현재 방영하는 〈홍국영〉이 시청률 경쟁에서 밀리자, 〈상도〉 방영 시기를 앞당겼다. SBS는 〈여인천하〉 후속으로 〈대망〉을 준비 중이다. KBS에는 〈태조 왕건〉에 이어 고려의 개국 초기를 다룰 〈제국의 아침〉이 예정되어 있다.


방송사들은 저마다 최강팀을 구성해 벌써부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인호씨의 베스트 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상도〉는 사극으로서는 공전의 인기를 모았던 〈허준〉의 명콤비 최완규·이병훈 씨가 대본과 연출을 맡았다. SBS는 '모래시계 붐'의 두 주역 송지나·김종학 씨를 투입한다.


게다가 〈용의 눈물〉로 사극 붐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뒤 〈태조 왕건〉을 준비하다가 '뇌물 수수 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KBS를 떠난 연출가 김재형씨의 의욕도 사극 혈전에 또 한번 불을 붙일 전망이다. 그는 〈여인천하〉 제작을 지휘하는 틈틈이 자신의 필생의 대작이 될 〈연개소문〉(가칭) 준비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 작품으로 방송 생활을 영예롭게 마무리짓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같은 계획들은 각 방송사가 펼치는 사극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의 일이 될 것이다. 현재 상황은 〈태조 왕건〉의 독주 체제에 다른 방송사 드라마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끼어들고 있는 형국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여인천하〉의 분발이 눈길을 끈다.


작품 성격상 〈태조 왕건〉과 〈여인천하〉는 여러 모로 흥미로운 대조를 보이고 있다. 〈태조 왕건〉이 왕건·궁예·견훤 등 후삼국 시대 영웅 호걸의 이야기를 다룬 남성극이라면, 〈여인천하〉는 조선 시대 중종 때의 인물인 정난정·문정왕후·경빈·창빈·희빈이 앞에 나서는 여성극이다. 또 〈태조 왕건〉이 주 시청자층을 남성들로 잡고 있다면, 〈여인천하〉는 '페미니즘을 가미한 역사극'임을 내세워 여성 시청자를 겨냥하고 있다.


〈여인천하〉는 장희빈·장녹수와 함께 조선 시대 3대 요녀로 꼽히는 정난정의 1506년부터 약 60년 동안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린 사극이다.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지난 2월5일 첫 방영 때 17.9%를 기록한 이래 주인공 정난정이 등장하면서(11회분) 20%를 돌파했고, MBC의 〈아줌마〉가 끝나면서 30%를 넘더니 20회 이후부터는 34∼35% 대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50%대 시청률을 줄곧 유지해온 〈태조 왕건〉은 궁예가 몰락할 때 최고 시청률을 올린 이래, 극중 갈등의 축을 이동시키면서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왕건에 맞서는 쿠데타 세력의 발호와 견훤과의 대결 등이 이 드라마의 인기를 이끌고 갈 굵직굵직한 계기들이다.


〈여인천하〉와 〈태조 왕건〉은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직접 비교하기에는 무리한 부분도 여럿 있다. 먼저 제작비·규모 면에서 〈여인천하〉는 〈태조 왕건〉과 성격이 다르다. 게다가 〈여인천하〉가 주간 드라마인 데 비해 〈태조 왕건〉은 주말 드라마이다.


사극 탤런트 구인난…민속촌 쟁탈전도 치열




사극 전쟁이 달아오르면서 방송가에는 중견 탤런트 구인난, 민속촌 선점 경쟁 등 기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사극의 특성상 연기력 있는 배우 캐스팅은 드라마 성공의 관건이다.


하지만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극에 맞는 연기자도 한정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동안 KBS가 사극에 강세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사극 연기를 소화할 연기력 있는 중견 배우를 다수 확보하고 있었던 측면도 크다. 그런데 사극 붐이 일면서 일부 연기자들의 '몸값'이 치솟고 있는 것은 물론, 몇몇 연기자는 몸값에 관계 없이 아예 '모시고 싶어도 모시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KBS 윤홍식 주간은 사극 붐이 일면서 사극 연기를 할 수 있는 연기자가 총동원되는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야외 촬영 장소 쟁탈전도 뜨겁게 벌어질 전망이다. 방송사들은 사극을 찍기 위해 대규모 세트장을 짓기도 하지만, 대체로 장소 협찬을 받아왔다. 특히 '장소 협찬 민속촌'이라는 자막을 타이틀에 표기하면 거의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던 용인 민속촌에 대한 의존도는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최근 방송위원회가 드라마 본방 시간에 '장소 협찬 민속촌'이라는 문구를 삭제토록 조처하는 바람에 방송사가 대여료를 물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데다가, 그나마도 동시 제작하는 사극이 늘어나면서 민속촌 빌리기가 어려워졌다. 이미 〈여인천하〉와 〈홍국영〉 촬영팀은 매주 한 번씩 용인 민속촌에서 마주치고 있다.


사극이 근래 들어 크게 인기를 누리고 있는 까닭은 우선 극 자체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생동감 있고 극적 재미도 강화된 것이다. 역사극은 크게 정통 사극·통속 사극·시대극으로 나뉘지만 공통 분모는 역시 '극'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극이 찬밥 대접을 받았던 까닭은 시청자를 계몽하거나 과거를 재현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사극은 달라졌다.


사극 제작팀은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배합해 때로는 가공의 인물을, 때로는 가공의 사건을 내세워 '극적 재미'를 극대화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태조 왕건〉의 경우, 방영 이래 최고 시청률을 올렸던 '궁예의 최후'가 단적인 예이다. 역사에서 궁예는 왕건에 패해 쫓겨다니다가 농민의 손에 맞아 죽는 비참한 최후를 당하지만, 드라마에서 궁예는 마지막까지 '군주의 위엄'을 잃지 않는 장중한 죽음을 맞았다. 〈여인천하〉도 예외가 아니다. 길상과 능금이라는 가공 인물을 내세워 주인공 난정과 삼각 관계를 만들어 놓는가 하면, 또 다른 주인공인 문정왕후의 생애를 좀더 비극적으로 그리기 위해 복선을 깔고 있다.


역사극의 인기는 시대 분위기와도 무관치 않다. 〈용의 눈물〉 방영 이래 역사극에 '정치'가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지만, 과거의 역사극에서 정치 또는 사회 풍자는 금기 중의 금기였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전되어 금기가 깨지자 그 자체가 '정치'와 '사회'이기도 한 역사극은 현실을 풍자하거나 정치를 꼬집는 데 가장 적합한 장르로 떠올랐다. 1996년 대선 무렵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용의 눈물〉이나, 지난해 6·15 남북 정상회담과 맞물리면서 인기가 치솟기 시작한 〈태조 왕건〉, 그리고 최근 '옷 로비 사건' 등 사회 현실이 일정하게 반영된 〈여인천하〉의 예가 이를 잘 보여준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역사극은 시대 상황과 밀접한 함수 관계에 있다. 시대가 어렵거나 혼란스러울수록 역사극이나 사회극이 인기를 끌 공산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1995년 〈텔레비전 드라마의 사회학〉이라는 책을 쓴 오명환씨(여수 MBC 사장)는 "현실이 어렵고 척박해질수록 역사의 땅이라는 피신처는 넓어진다"라고 말한다. 역사극의 최근 인기가 IMF 외환 위기·정치판의 부패 등 시대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인 것이다.


"현실 어려울수록 역사극 인기"


역사극이 공익성 못지 않게 시청자들의 문화적 갈증을 효과적으로 해소시켜주고 있는 것도 역사극 붐의 주요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김성희 교수(한양여대·희곡)는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재미와 오락 외에 다양한 관심사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야 하는데, 최근 역사극은 이같은 과제에 신속하게 부응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역사극은 전성 시대를 맞았지만, 전문가들은 영향력 확대에 걸맞게 역사극이 시청자들에게 재미와 의미를 주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벽도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특히 역사극을 제작할 전문 작가·연출자가 한정되어 있고, 역사극을 제대로 평가할 전문 비평가가 거의 없다.


역사극은 '역사'와 '허구' 사이에 존재한다. 여기서 허구와 재미만 강조될 경우, 제작자측은 시청률을 올릴 수 있겠지만 높은 시청률은 오히려 시청자들에게 왜곡된 역사상을 전달하는 주범이 될 수 있다(80쪽 딸린 기사 참조). 반대로 역사극도 엄연한 드라마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덮어놓고 역사만을 강조할 경우, 또다시 무미 건조한 과거사를 나열하는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


1996년 〈용의 눈물〉에서 시작해 〈허준〉과 〈태조 왕건〉을 지나면서 '안방 천하'를 놓고 불붙기 시작한 역사극 대전은 이같은 이중의 딜레마를 '후방'의 문제로 남겨놓은 채 본격적인 군웅 할거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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