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산업 삼형제 '흔들린 우정'
  • 노순동·고재열 기자 (soon@e-sisa.co.kr)
  • 승인 2001.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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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들 방송출연 집단 거부 '파문'…
방송사·기획사·연예인 '묵은 갈등' 표면화


방송사의 절대 우위가 무너지는 징후일까? 기대는 금물. 또 하나의 문화 권력이 떴을 뿐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연예산업의 파이를 키웠다는 찬사와 컨텐츠를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비난을 동시에 받는 신진 문화 권력 매니저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장면 1. 방송에서 다음과 같은 보도가 나갔다. "한국의 연예산업은 후진적이다. 매니저와 연예인의 관계가 일방적이다." 이 말을 듣고 기획사들은 발끈했다. "우리는 노예 상인이 아니다. 사과하지 않으면 방송에 소속 연예인을 출연시키지 않겠다."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며칠이 흘렀다. 이번에는 기획사에 소속된 연예인들이 기자 회견을 자청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장면 2. 최정상급 가수가 음반 판매와 거리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고서도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놓쳤다. 그는 다른 프로그램 녹화를 펑크 냈다. 방송국은 발끈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두 사건은 따로 발생했지만, 한 데 엉기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그동안 연예산업 종사자들이 방송사에 품어온 불만을 한꺼번에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발단은 6월17일 MBC 〈시사 매거진 2580〉 '매니저 대 연예인, 한국과 일본의 연예산업' 편이 방영되면서부터. 매니저들은 음반기획자가 대부분인 한국연예제작자협회(협회)를 중심으로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25쪽 인터뷰 기사 참조).


두 번째 사건의 무대는 MBC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 〈생방송 음악 캠프〉였다. 음반 판매와 거리 투표에서 줄곧 우위를 지켜온 톱 가수 김건모씨가 전화를 통한 ARS 집계와 인터넷을 통한 iMBC 투표에서 신예 그룹 '문차일드'에게 크게 뒤져 순위가 뒤바뀐 것이다. 김씨측은 순위 선정 방식이 10대에 치우쳐 있다면서, 출연하기로 했던 프로그램 녹화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씨측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오락 프로그램에까지 열심히 출연해 왔다. 10대를 겨냥하는 문화방송의 행태에 더 장단을 맞추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MBC는 처음 맞는 사태에 당황하고 있다. 1차 협상은 실패했다. 협회는 △〈9시 뉴스〉 첫 머리에 사과 방송을 내보낼 것 △〈시사 매거진 2580〉에서 보도물을 다시 제작할 것 △보도국 책임자와 기자를 징계할 것 등을 요구했다. 옴부즈맨 프로그램을 통해 사안을 다루겠다는 MBC의 제안은 협회측의 반발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가수 김건모씨의 행동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 MBC가 불참 통보를 받은 때는, 녹화 하루 전이었다. MBC 장태연 예능국 부장은 "새벽에 촬영을 떠나야 하는데 전날 밤 12시가 되어서야 담당 프로듀서에게 연락이 왔다. 대책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결국 김건모씨가 출연하기로 했던 '게릴라 콘서트' 코너는 하이라이트 모음으로 대체되었다.


음반 기획자들이 발끈한 까닭




"들러리는 싫다" : 톱가수 김건모씨(맨 왼쪽)는 MBC 출연을 거부했다. 김씨측은 "1위를 못해서가 아니라, 10대만 좇는 방송사에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MBC의 보도에 음반 기획자들이 강력하게 대응하고 나선 까닭은 무엇일까. 〈시사 매거진 2580〉으로부터 직격탄을 맞은 이유도 있지만 여기에는 맞장을 뜰 수 있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MBC는 사면초가다. 한국방송연예인노동조합은 최근의 사태에 대해 언급을 자제했다. "내부에서 협의했지만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공채 제도를 운영하면서도 외부 기획사에 지나치게 의존해온 방송사의 자업자득이다"라고 김기복 사무국장은 말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한국연예인협회 가수 분과도 논평을 거부했다.


초점을 방송사와 기획사의 관계에 맞출 때 김건모씨 사건은 의미 심장하다. 그동안 가요계와 방송이 맺어온 관계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MBC측은 "집계 방식에 따라 순위가 매겨진 것일 뿐이다. 어떻게 하란 말이냐"라고 항변한다.


정작 업무 파트너인 매니저들의 속내는 그것이 아니다. 그들은 순위 선정 방식에 코웃음을 친다. 심지어 한 매니저는 1위를 차지한 문차일드가 소속된 회사가 가수 조성모씨가 속한 곳이라고 귀띔한다. 그의 추론은 이렇다. "조씨는 가을에 새로운 앨범을 낼 계획이다. 방송사로서는 대형 가수들이 컴백 무대를 어디로 잡느냐에 관심이 크다. 그런 정황이 작용했을 수 있다."


게다가 최근 〈생방송 음악 캠프〉를 담당했던 전임 프로듀서가 금품수수 의혹에 휩싸여 있다. 장태연 부장은 "소문은 알고 있다. 그는 개인 사업을 하겠다며 퇴사했다. 사내에서 관련 회의가 열린 적은 없다"라고 말했다.


1990년대 들어 기획자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강화되었다. 문제는 기획의 방향이 편향되어 있다는 점이다. 기획자들은 주로 텔레비전을 향해 뛰었다. 필연적으로 가창력보다는 외모나 인간적인 매력 등을 강조하게 되었다. 한 현장 매니저는 "노래는 녹음실에서 모두 짜깁기할 수 있기 때문에 가창력은 별 문제가 안 된다. 외모와 이미지를 먼저 본다"라고 말한다.


방송국의 프로듀서도 이런 점을 재확인한다. 장태연 프로듀서는 "톱 가수라고 해도 〈육아일기〉 〈드림팀〉 같은 기획이 없었다면 이런 폭발적인 인기가 가능했을까"라며 자신들이 기여한 부분이 크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필요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출연해 놓고 이제 와서 이용당했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매니저·연예인 모두 전근대적 관행의 희생자"




진통 : 많은 연예인이 기획사와 갈등을 겪는다. 얼마 전 소속사에 계약을 해지해 달라고 요구해 화제가 된 배우 하지원씨(오른쪽)와, 갈등 끝에 그룹이 해체된 H.O.T(맨 오른쪽).


그렇다면 집단 출연 거부 사태의 발단이 된 기획사와 소속 연예인의 관계는 과연 어떨까. 연예 관련 자문을 전문적으로 하고 있는 박영목 변호사는 "기획사는 방송사에 대해서는 약자이지만 연예인에 대해서는 강자이다"라고 판도를 정리한다. 김칠준 변호사에 따르면, 최근 불거진 한스 밴드(예당음향 소속) 사건은 기획사와 신인 연예인의 관계가 어떤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27쪽 기사 참조).


연예산업 종사자들은 자신들의 일을 '사람 장사'라고 부른다. 그만큼 아티스트에 대한 애정 없이는 하기 힘든 일이라는 뜻이다. 연예인과 매니저의 관계는, 그들의 호칭에서 짐작할 수 있다. 호칭은 대부분 '언니, 오빠, 삼촌'이다. 반면 한번 관계가 틀어지면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한다.


최근 소속사에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내용 증명을 보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던 연기자 ㄱ씨. 그는 내용 증명을 보낸 뒤 소속사로부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당했다. 계약 기간이 절반 이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매니저 이 아무개씨는 "ㄱ씨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친동생처럼 여기며 뒷바라지해 왔다. 만약 조건에 불만이 생겼다면 회사와 협의하면 될 일이다. 그동안 전혀 낌새를 챌 수 없었다"라며 분개했다.


최정환 변호사는, 계약서가 기획사에 유리한 데는 근거가 있다고 말한다. 모든 부담을 기획사가 떠안는 현실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통상 음반을 천 가지 낸다고 할 때 수지를 맞추는 것은 겨우 100 건. 그 가운데 10건 정도가 '대박'이라고 간주된다. 그런 점을 감안해도 문제는 남는다. 흔히 계약 기간은 보통 3∼5년, 심지어 10년짜리도 간혹 눈에 띈다.


최정환 변호사가 접한 한 여자 가수도 계약 기간이 10년이었다. 그는 또 "앨범 두 장을 내 50만 장을 팔았지만 계약금 5백만원과 티뷰론 한 대만을 받은 사례와, 2백억원 매출을 올려준 가수가 회사로부터 받은 돈이 달랑 2억원인 경우를 보았다"라고 말했다.


현장에서 계약서를 천여 건 보았다는 박영목 변호사는 매니저와 연예인 모두가 전근대적인 계약 관행의 희생자라고 진단한다. 즉 매니저는 사람을 키운다는 열정으로 열심히 일을 했지만, 그렇게 해서 큰 연예인이 훌쩍 떠나 버릴 때 배신감을 느낀다. 한두 번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더 꽉 짜인 계약을 통해 연예인을 묶어 두려고 한다.


그럴수록 연예인은 뒤편에서 불만만 키운다. 연기자 지망생 ㄴ씨는 매니저가 자꾸 MC 일을 가져오는 바람에 속이 상했지만 항변할 도리가 없다. 박변호사는 "오랫동안 연예 활동을 해온 매니저의 판단이 옳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결정권이 없는 상태에서 아티스트는 자기가 휘둘리고 있다고 느끼기 쉽다"라고 말한다.


만약 기획사가 항변하는 대로 물건이 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신인이라면 계약 기간을 짧게 잡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국에서는 신인일수록 계약 기간이 길다. ㄱ씨도 계약 기간이 5년이었다. 왜 그럴까. 기획사로서는 기간을 길게 잡는다고 해서 손해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계약 기간에 누군가 그 연예인을 챙길 경우 위약금과 이적료를 챙길 수 있다.


전문가들은 계약을 꼼꼼히 맺는 것이 대안이라고 말한다. 박변호사에 따르면, 계약서가 2∼3장에 그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10∼20장에 이른다. 한국의 경우 연예인의 의무만 빼곡할 뿐, 기획사의 의무는 턱없이 적고 추상적이다. 박변호사는 "몇몇 계약서는 결국 '키워줄게 열심히 해라'는 것 외에 구속력 있는 내용이 하나도 없어 '무늬만 계약서'인 경우도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계약서에는 매니저의 의무 조항도 빼곡하다. 이를테면 '1년에 방송 출연은 3개월 한다, 1년에 50시간 이상 연기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중요한 컨셉 변화가 있을 때는 상의해야 한다' 등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미리미리 점검한다.


연예인은 불만이 생겨도 좀체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에 갈등이 증폭된다. 셈을 밝힌다며 욕을 먹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매니저와 불화하면 불리한 스캔들이 터져 나올 우려도 있다. 한 연예 담당 기자는 "매니저가 의도적으로 흘리는 경우도 있고, 문제가 터졌을 때 관리하지 않고 방치하는 경우도 있다"라고 말한다.


왜곡된 스타 시스템, 전면 재편 시급


가수의 경우 금전 문제도 크지만,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점도 문제다. 최근 소니 뮤직과 계약금 12억원에 6집 앨범 계약을 맺어 화제가 된 로커 김경호씨. 뛰어난 가창력으로 열혈 팬을 거느리고 있는 김씨는 지난해 이색 캠페인을 벌였다. 인터넷을 통해 "내 앨범(김경호 스페셜) 사지 말라"고 호소했던 것이다.


이는 베스트 혹은 스페셜 음반 상당수가 가수의 뜻과 상관없이 판권을 소유한 음반사가 짜깁기해 만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기획사를 바꾼 아티스트라면 더더욱 이런 일을 당하기 십상이다. 가수 이은미씨도 이런 일을 겪었다. 이씨측은 "돈이 문제가 아니다. 음악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곡들이 마구 유통됨으로써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라고 털어놓았다. 가수 조동진씨는 1997년 그동안 자기가 냈던 음반을 모두 절판시키는 극약 처방을 썼다.


이처럼 편집 음반이 남발되는 근거는 판권이 전적으로 회사 소유이기 때문이다. 음반사가 사용하고 있는 '저작권 사용 승인서'(창작자와의 계약)에는 흔히 '현존하는 매체와 차세대의 모든 매체에 저작권 사용을 영구히 승인한다'는 무시무시한 문구가 박혀 있다.


해결책은 소수 가요 프로그램 연출자와 메이저 기획사 간부들의 취향대로 결정되는 스타 제조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이다. 문화 평론가 김창남씨는 "텔레비전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한 시청자도 연예인도 소외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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