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식인'에 밀린 '구지식인'의 분노
  • 안철흥 기자 (epigon@e-sisa.co.kr)
  • 승인 2001.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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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보수 학자들, 속속 DJ에 등 돌려…편향적 인재 발탁에 소외감


이호재 교수(고려대·국제정치). 그는 색깔로 보자면 온건 보수이지만, 1970년대부터 유연한 대북 정책을 주장해온 햇볕정책 지지자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현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그의 의견은 '비판' 쪽으로 돌아섰다.




범국민적이고 초당적으로 임해야 할 대북 정책을 정치적 치적으로만 활용했다는 것이 이교수가 비판하는 이유. 야당 책임도 물론 있지만, 근본적인 책임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의 비판은 "현정권은 국내 정치에서 실패했고, 남북 문제를 해결할 힘도 없어졌다"라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간다.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차기 정권에 바통을 넘기라는 암시다. 이렇게 주장하는 배경에는 한나라당이 집권하더라도 햇볕정책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을 것이라는 '전문가적 분석'이 자리 잡고 있다.


서경석 목사. 한국시민단체협의회 사무총장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대표적인 1세대 시민운동가다. 스스로 '온건 보수'를 표방하고 있는 그도 최근 들어 DJ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정부는 개혁을 명분으로 온갖 수단을 합리화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언론 개혁은 해야 하지만, 현재와 같은 방식은 언론 탄압'이라는 식이다. '시민단체들을 관변화해 견제 기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는 점도 그가 현정부를 비판하는 주요 이유다.


중도 보수 혹은 온건 보수로 통하는 지식인들이 현정부에 등을 돌리고 있다. 올해 들어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의 '시론'에 실린 교수 칼럼은 3백여 개. 그 중 현정부를 비판한 것은 1백18개이다. 이틀에 한 번꼴로 현정권과 DJ를 겨냥한 교수들의 글이 이들 신문에 실리고 있는 셈이다.


이들에게 현정부는 '법의 가면을 쓴 정치'(허 영 연세대 교수)를 하고, '황장엽씨의 방미를 불허해 한·미 공조 의지를 의심하게'(김정원 세종대 교수) 만드는, '제 정신이 없는 사람들'(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로 비친다. 좀더 보수적인 지식인들에게는 '미당(서정주 시인)을 부정하고 조선과 동아를 부정하고 서울대학을 부정하고 이승만과 박정희를 부정하고 삼성과 현대를 부정하는 악령'(유석춘 연세대 교수)이기도 하다. 〈신동아〉가 올해 초 지식인 100명에게 DJ 정책의 평가를 의뢰한 뒤 붙인 기사의 제목은 '유식한 대통령이 연출한 무능한 정치'다.


보수적인 지식인들이 현정부를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의약 분업이 국민의 저항에 부딪히고, 남북 관계가 지지부진해지는 등 현정부의 정책 실패가 표면화한 것이 계기라면 계기다. 그러나 속마음을 감추고 있었을 뿐, 이들과 현정권은 내내 불편한 관계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원인이 무엇일까.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상실감이다. DJ는 소수파이자 기성 사회의 비주류였다. 당연히 DJ 집권 이후 현정권에 참여한 지식인들도 기존 주류 사회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배제된 주류 엘리트들이 지배 질서 재편 과정에서 소외감을 느낄 법도 했다. 김석준 교수(이화여대·행정학)는 이렇게 말한다. "현정부가 기용한 학자들은 대체로 중도 좌파이거나 DJ와 지역 연고가 같은 사람들이다. 문제는 이들이 기존 학계에서 주변적인 위치에 있거나, 학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호재 교수의 지적도 비슷하다. "과거 정권은 그 분야의 최고 인재를 발탁해 썼다. 그런데 이 정권은 자기 주변 사람만 쓴다. 그러니 학자들이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겠는가."


"들러리나 소모품 된 느낌들었다"


또한 'DJ가 경제통과 남북관계 전문가를 자임하면서 지식인들의 머리를 빌리기보다 이들을 실무자 부리듯 했던 것'도 자존심을 건드린 요인이다. 정권 초반, 정부의 행정개혁위원회에 참여했다가 3개월 만에 그만둔 김석준 교수는 "마치 들러리나 소모품이 된 느낌이었다"라고 기억했다.


현정권 초기 대대적인 홍보를 곁들여 추진되었던 '신지식인 운동'도 지식인들의 상실감을 부추긴 사례. 이에 대한 반감은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현정부에 대한 지식인들의 정서적 반감을 선도하고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상품화할 수 있는 것만이 참된 지식으로 대접받는 기막힌 사태가 벌어졌다'(정과리 연세대 교수 '일류 권위 배척하는 천박', 〈조선일보〉7월20일자), '지식인 사회의 침체된 분위기는 김대중 정부와 무관하지 않다. 우선 집권 초기에 등장한 소위 신지식인론이 지식인 일반을 물먹인 바가 크다.'(전상인 한림대 교수 '분노의 침묵' 〈조선일보〉 4월17일자). '국문학자이면서 시인인 필자가 신지식인이 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 본다. 작명소나 광고문안 작성 벤처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오세영 서울대 교수 '신지식인, 구지식인' 〈조선일보〉 4월27일자).


이에 대해 김영삼 정부 때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을 지낸 서진영 교수(고려대·정치학)는, "소수파 정권인 데다, 주류 세력을 포용하지 못했던 정책적 단견이 현재의 국론 분열을 초래했다"라고 지적했다. 의료·교육·대학·노동 정책 등 모든 개혁 정책마다 대상자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이 안목 부재의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또한 현정권이 주류 사회와 손잡는 대신 선택한 것이 대중 노선인데, 이것도 지역주의의 벽에 걸려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 서교수의 진단이다.


지난해까지 관망하고 있던 중도·보수 지식인들이 '반DJ, 친이회창' 경향으로 기울고 있는 점도 이런 전세 역전을 반영하고 있다. 인터넷 지식 포털 사이트인 '이슈투데이'가 전문가 2백7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회창 총재 지지율은 28.9%로 일반 국민들의 지지율보다 훨씬 높다. '보트코리아'가 교수 3천6백44명을 조사한 결과도 이총재가 압도적 1위(17.6%)다. 한 교수는, DJ 정권은 이미 끝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련도 기대도 없다는 것이 DJ 정부에 대한 중도·보수 지식인들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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