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원 문책론'을 문책한다
  • 남문희 기자 (bulgot@e-sisa.co.kr)
  • 승인 2001.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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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 출신으로 보수적 국가관 지향,
'친북주의자' 주장은 잘못…방북 승인 과정도 결함 없어


8·15 평양 통일대축전 행사 파문으로 야당의 해임 공세를 받고 있는 임동원 통일부장관은 보수 세력의 주장대로 '친북주의자'인가. 햇볕정책 주창자이며 북한에 대해 대표적인 유화론자라고 알려진 그의 참모습은 무엇인가. '임동원 흔들기'의 이면과 평양 통일축전의 진실을 집중 조명했다.




어느 한 시기의 모습만 보고 사람을 평가할 경우 커다란 잘못을 범할 우려가 있다. 사람을 평가하려면 그가 인생에서 어떤 궤적을 그리며 살아왔는지 전과정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8·15 평양 통일축전 파문의 책임을 물어 임동원 통일부장관에 대한 해임안을 제출하려는 사유를 설명하면서 한나라당 인사들은 매우 격한 언사를 퍼부었다. 지난 8월23일 장관근 수석 부대변인은 "임장관은 통일을 빙자해 민족 분열을 시도하는 민족파괴주의자이다"라고 몰아붙였다. 권철현 대변인은 총재단 회의 내용을 브리핑하면서 "임장관이 누구를 위한 통일 정책을 쓰고 있는지 한심하다. 임장관 같은 사람이 대북 정책을 계속 주도하면 국가의 근간을 해치고 국기가 흔들리게 된다는 의견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육사 교수 때 펴낸 책, 대공 분야 필독서로 각광


보수 언론이 과장 보도한 평양에서의 돌출 행동 여파로 이처럼 격앙된 언사가 나왔겠지만 통일부 당국자들이나 임장관을 잘 아는 주변 인사들은 '해도 너무한다'고 반응한다. 그는 햇볕 정책 주창자이며 북한에 대한 대표적인 유화론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청년 장교 시절인 1960년대에 육사 교수로 있으면서 '공산주의 비판과 대공 전략론'을 강의했으며, 당시 그가 쓴 〈혁명 전쟁과 대공 전략〉이라는 저서는 육군사관학교뿐 아니라 중앙정보부와 경찰에서 대공 분야의 필독서였다. 그는 또한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과장 시절에는 한국군 현대화 사업의 출발점이 된 율곡사업 실무를 입안하기도 했다.




임장관의 국가관이나 성향을 짐작케 하는 일화는 이밖에도 많다. 그의 내면은 매우 보수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세종연구소 객원 연구위원으로 재직할 때 그는 국가 전략이라는 개념을 정립하는 데 몰두했다. 그의 이런 노력 덕분에 세종연구소가 발행한 〈국가 전략〉 시리즈는 이 분야의 권위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는 이 시리즈의 첫호에 국가 전략 개념을 전반적으로 탐구한 논문을 게재하기 전에 같이 근무하던 이종석 박사에게 한 번 읽어 주기를 부탁했다. 논문을 읽은 이종석 박사가 마음에 걸린 대목이 한 군데 있었는데, 바로 박정희 시대를 매우 높이 평가한 대목이었다. 이박사가 이의를 제기하자 그는 매우 단호한 태도로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보수라고 자처하는 한국의 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자식의 병역 문제로 망신을 당했으나 그는 자식 사랑 때문에 안보관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아들은 중·고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전부 미국에서 다녀 합법적으로 병역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는 아들이 군에 입대할 나이가 되자 두말 없이 귀국시켜 현역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게 했다.


북한에 대한 그의 인식도 다소 보수적이다 싶을 정도로 냉정하다. 그는 1990년대 고위급 회담 대표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 직접 눈으로 본 북한의 실상에 대해 측근들에게 소회를 피력하곤 했는데, 남한 사회와 비교해 북한 사회가 얼마나 낙후해 있는지, 북한 주민이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북한에 대한 그의 유연성은 북한을 남북 대화 테이블에 끌어내 더 이상 남북이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터전을 만들어 내기 위한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일부 보수 세력이 주장하듯 그가 친북주의자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 점은, 이번 평양 통일축전 행사에서 그가 취한 입장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또한 야당인 한나라당이 국회에 제출한 해임 결의안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과 직결되어 있기도 하다.


한나라당의 해임 결의안은 속속 진상이 밝혀지고 있듯이 평양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보수 언론의 확대·과장 보도에 상당히 의지하고 있다. 하지만 보수 언론이 '평양 광란극'이라고까지 표현한 사실들은 대부분 현장 기자들조차 확인하기 어려워 보도를 자제했던 '카더라' 통신에 근거한 것이었다(34쪽 딸린 기사 참조). 결국 현시점에서 임동원 장관이 주도하는 대북 정책을 냉정히 점검하려면 평양 통일축전 참가 경과를 냉정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통일부 고위 당국자에 따르면, 통일부가 이번 8·15 평양 축전에 3백여명에 이르는 남측 인사를 보내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올해 들어 몇 차례 열렸던 남북 간의 대규모 민간 교류에서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즉 △5월1일 금강산에서 열렸던 남북노동자 대회(남측에서 6백명 참석) △6·15 민족통일 대토론회(5백명 참석. 금강산) △7월18일 농민대회(7백명 참석. 금강산) 등 세 차례 행사 결과를 정부가 분석해 보았더니 대체로 우리측이 공세적이었고 북측이 수세적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6·15 공동 행사에서는 이번처럼 여성·노동·학술 등 10개 분야에서 부문별 토론회가 있었는데, 분야별 토론에 익숙하지 못한 북측을 주도한 남측 시민단체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 보수 언론이나 야당의 주장과 달리 통일부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역통일 전선'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통일부, 3대헌장 기념탑 행사 참관 끝까지 저지




8·15 행사에 대한 첫 논의는 6·15 금강산 행사 때 있었다. 당시에는 서울·평양 공동 개최에 대해 북측이 그리 부정적이지 않았다. 7월18일 금강산에서 1차 실무 접촉이 있었는데, 북측은 서울 행사에 참석하기 어렵다며 평양에서 공동 행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대해 남측 추진본부는 서울 행사 불참은 유감이지만 평양 행사를 제안한 데 대해서는 획기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드디어 금강산에 국한했던 민간 교류가 평양을 무대로 이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암초가 등장했다. 문제의 3대헌장 기념탑 앞에서 개막식과 폐막식 행사를 공동으로 치르자고 북측이 제안한 것이다. 추진본부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8월3일 평양에서 열린 2차 실무 접촉에서는, 올해는 일단 평양에서 치르고 대신 내년에는 서울에서도 행사를 개최하자고 합의했다. 이 내용은 방북단의 공동 보도문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 뒤 8월6일부터 12일 사이 여섯 차례나 팩스를 통해 협의했으나 3대헌장 기념탑 행사에 대해서는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북측이 3대헌장 기념탑 행사를 끝까지 고집하자 통일부는 8월13일 남측 추진본부의 평양행을 불허했다. 문제는 언론에 이미 보도된 대로 13일 밤 10시 북측이 수정 제안을 보내오면서 일단락되었다. 즉 3대헌장 기념탑 행사는 북측 단독으로 치르겠다, 남측은 지난해 10월10일 노동당 행사 때처럼 참관만 해도 무관하다고 한 것이다. 추진본부측은 일단 자신들이 일관되게 주장한 대로 3대헌장 기념탑 공동 행사를 북측이 철회한 것으로 보고 통일부에 방북 승인을 요구했으나 통일부는 참관도 해서는 안된다고 못박았다. 통일부는 이외에도 추진본부측에 △정치적 행위나 합의는 안된다 △법을 위반할 경우 처벌한다는 조건을 추가해 각서를 쓰라고 요구했고, 추진본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복잡한 듯 보이지만 과정은 단순하다. 사실 통일부로서는 할 수 있는 조처는 다한 셈이다. 그밖에 범민련 인사나 한총련 그리고 일부 급진 인사들을 왜 보냈느냐 하는 것은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범민련이나 한총련은 개별 단체가 아니라 통일연대라는 대표기구에 포함되어 있다. 그동안 남쪽 통일운동 단체가 '민족화해 협력 범국민 협의회'(민화협) 및 7대 종단을 중심으로 한 추진본부와 '6·15 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통일연대) 양쪽으로 갈라져 남북 양쪽 모두 골머리를 썩혀 왔다. 그런데 통일연대측이 노선을 수정해 합법 공간에서 활동하겠다면서 추진본부에 합류해온 것은 남북 모두의 근심을 덜어준 것이었다. 적어도 그 시점에서는 통일연대 사람들이 북한에 갔을 때 어떻게 행동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그리고 만약 그것을 걱정해 방북을 불허할 경우 우선 법적 문제가 발생하고, 이들의 일부가 무단 방북을 시도하거나 통일부를 상대로 시위를 벌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임동원 장관이나 통일부가 관여한 것은 바로 이 방북 승인까지의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야당이 주장한 국기 문란 행위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만약 야당이 임장관이나 통일부의 정책 결정 과정을 문책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 민간 교류 자체를 반대한다면 그것은 통일 추진의 방법론이나 철학과 관련한 또 다른 문제이다.


과거 동서독도 분단 극복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1970년대에 동방 정책의 포문을 열었던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나 그와 운명을 같이했던 에곤 바흐 장관은 형극의 길을 걸었다. 냉전 시대의 한복판에서 "동독의 울브리히트 서기장 역시 독일 역사의 한 부분이다"라고 선언했던 브란트 총리는 국내의 보수 언론과 야당 그리고 외세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고, 급기야 동독의 스파이로 몰리기도 했다. 에곤 바흐의 경우 그의 사무실 전화를 외국 정보기관이 도청하는 바람에 공중 전화를 이용해야 했고, 보수 언론의 폭로 공세에도 시달렸다.


동서독 통일을 이룩한 헬무트 콜 총리나 그의 핵심 브레인이었던 텔틱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콜 총리 집권 초기인 1983년 서독이 동독에 20억 마르크 차관을 공여한 직후 서독의 트럭 운전사가 동독 국경에서 심문을 받다가 사망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서독의 대표적 보수 언론인 〈디 벨트〉는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물고늘어지면서 호네커가 답방하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다. 동서독의 통일은 바로 이같은 보수 세력의 집요한 방해 공작에 맞서 선각자들이 '접촉을 통한 변화'라는 일관된 통일 철학을 밀고 나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6공화국 이후 우리의 사례를 들여다보아도 이 점은 분명하다. 6공화국 때 남북 관계에서 획기적인 진전이 이루어졌던 그 한복판에 바로 현재의 임동원 장관이 있었다. 임장관은 당시 외교안보연구원장·통일부 차관 신분으로 고위급 회담 대표로 참여했다. 그는 △북한 변화론에 입각한 대북 접근 △ 병행 추진 전략(핵 문제 등의 돌발 상황이 닥쳐도 접촉 중단 등으로 연계하지 않고 대화를 병행)이라는 이론적 기초를 세우고 대북 협상에 임해 기본합의서 채택과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합의라는 괄목할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들어 대북 인식이 변화론에서 붕괴론으로 바뀌고 대북 전략이 병행에서 연계로 바뀌면서 남북 관계는 파탄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임장관처럼 일관된 정책 펼 인물 꼭 필요하다"




김대중 정부 들어 6·15 정상회담이 성사된 것은 바로 6공화국 말기의 변화론과 병행추진론이 다시 부활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8·15 평양 축전에 성향이 제각각인 민간 인사 3백여명을 보내기로 정부가 최종 결정한 배경에는 변화론과 병행 추진 전략이라는 임장관의 통일 철학이 깔려 있다. 평양 축전 파문 이후 정부측이 발표한 '입장'의 첫 구절은 '보다 많은 접촉, 보다 많은 대화, 보다 많은 협력을 통해 북의 변화와 남북간 동질성을 추구하기 위해 민간 차원의 교류와 협력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번 방북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했던 서동만 상지대 교수는 "정치적인 어려움이 충분히 예상되는데도 흔들리지 않고 일관된 정책을 펼 인물이 반드시 필요하다"라며 임장관 편을 들었다. 과거 김영삼 정부 시절 외국의 학자 중에는 남과 북의 관계를 '종교 전쟁'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같은 민족인데도 하는 짓을 보면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근본주의자들처럼 한치도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북 관계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 구도로 설명하는 이론도 등장했었다.


8·15 방북 파동과 임동원 장관 해임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요즘 한국 사회는 '종교 전쟁'과 '마녀 재판'이 횡행하던 과거로 되돌아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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