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大望論, 大亡論 되는가
  • 이숙이 기자 (sookyi@e-sisa.co.kr)
  • 승인 2001.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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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 후보 꿈·임동원 사퇴론에 여론 '싸늘'…
"정치 9단답지 않은 수 읽기"


"JP식 정치가 아니다."

여권의 한 고위 인사가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의 최근 행보를 두고 한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JP가 '임동원 사태'를 풀어 간 방식은 예전의 JP 스타일과 사뭇 달랐다. 선문답 대신 직설법을 택했고, 협상할 여지를 남기는 대신 벼랑끝 작전을 폈다. 그 결과는 결국 DJP 공조 균열과 JP의 위기로 나타났다.


"초조감·노욕이 위기 자초"




정가에서는 JP의 초조감과 노욕(老慾)을 이번 사태의 발단으로 꼽는다. 내년 대선에서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겠다'는 야심을 키워온 JP는 그동안 두 가지 변수 때문에 속앓이를 했다. 하나는 갈수록 충청권 민심 장악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차기 대선에서 보수 세력의 영향력이 강해지리라는 점이다.


지난해 4·13 총선을 기점으로 JP로부터 멀어져간 충청권 민심은 민주당 이인제 최고위원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충청권 훑기에 돌입하면서 완전히 돌아서기 시작했다. 충청권을 기반으로 '장사'를 해온 JP로서는 어떻게든 충청권 영향력을 복원해야 할 절박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 세력의 입김이 점차 거세지고 있다는 점도 JP를 초조하게 만든 대목이다. JP 처지에서 보면 '보수'는 JP의 트레이드 마크다. 하지만 보·혁 갈등 전선이 DJP 대 한나라당의 대결 구도로 짜이면서 JP는 보수 대표성조차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 빼앗기는 것 아니냐는 위기 의식에 빠졌다.


자민련 주변에서 'JP 대망론'이 나온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JP를 확실한 차기 대통령감으로 띄워 충청권 붕괴를 막고, 보수 대표성을 발판 삼아 차기 대권까지 노린다는 복안이었다.


자민련의 JP 대망론 띄우기는 전례 없이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다. JP가 8월8일 미국 뉴욕에서 "차기 지도자는 경륜이 있어야 한다"라고 운을 뗀 이틀 후 김종호 총재권한대행은 'JP 여권 단일 후보론'을 들고 나왔다. 곧이어 JP 대망론을 담은 출처 불명 문건이 몇 차례 나돌더니, 8월29일에는 자민련이 직접 나서 'JP 대망론, 국민의 바람이며 역사의 순리입니다'라는 제목의 공식 문건을 발표했다.


자민련 관계자들에 따르면, JP는 여권의 차기 주자가 정해지기 전까지 대망론을 차근차근 확산할 계획이었다. JP가 민주당·한나라당과 '선택적 협력'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바로 새로운 줄타기의 서곡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임동원 사퇴론'이 불거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JP가 지나치게 앞질러 가면서 DJP 공조까지 흔들어댄 것이다. 지난 8월30일 자민련 연찬회에서 한 JP의 발언 수위는 자민련 의원들조차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JP는 "지난 3년간 공조한다는 차원에서 못 참을 것을 참으며 별일 다 해 왔으나 이제 정비할 때가 왔다" "우리가 챙길 것은 챙기고 적당히 질질 끌려 다니지는 않을 것"이라며 작심한 듯 민주당을 공격했다. JP가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정치를 한다는 얘기가 나온 때가 이즈음이다.


정가에서는 JP가 대망론 확산을 위해 임동원 사태를 과도하게 활용하려다 무리수를 두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실제로 JP측은 이번 기회에 자민련의 보수성을 확실히 보여주겠다며 계속해서 날을 세웠다. 이완구 총무는 "단순히 8·15 평양축전의 돌출 행동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있으므로 이 기회에 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고, JP는 "6·25 때 죽은 육사 동기생이 43명이다"라고 강조하기까지 했다.


이런 JP의 '선명성' 드라이브에 채찍을 가한 세력이 당내 강경파와 보수 언론이다. 강경파 선봉장 격인 이완구 총무는 "JP가 해임안 처리에 미온적이면 총무 직에 연연하지 않겠다"라며 배수의 진을 치기도 했다. 보수 언론들의 '마녀 사냥식' 보도도 여기에 가세했다.


국민 91%가 "JP 대망론 지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시사저널〉 여론조사 결과는 JP가 얼마나 여론을 잘못 읽었는지 보여준다. '임동원 장관 사퇴'에 반대하는 여론이 52.5%로 찬성 41.5%보다 11%나 많았다.


JP가 잘못 읽은 것은 여론뿐만이 아니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정책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9월3일 중국 장쩌민 주석의 방북, 10월 초 미국 부시 대통령의 방한 같은 일련의 한반도 일정이 이런 DJ의 대북 정책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를 읽는 데 소홀했다. 이 때문에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국 DJ가 양보하리라던 자민련의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일각에서는 JP가 일찌감치 이번 파동을 DJP 결별의 계기로 삼으려 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차기 대선에서 몸값을 제대로 올리려면 DJP 공조에서 벗어나 새롭게 협상에 임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공식에만 대입하기에는 JP가 당장 잃는 것이 너무 많다.


JP 대망론은 약발이 떨어진 내각제 카드를 대신할 만한 JP의 새 카드였다. 하지만 대망론에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그는 제 꾀에 넘어가는 곤경에 처했다. 게다가 이번 여론조사는 JP 대망론이 얼마나 헛된 꿈이었는지 보여준다. JP 대망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91.2%로 '지지한다' 7.9%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JP가 여권 단일 후보로 나선다고 해도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여권 단일 후보 JP 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가상 대결 결과는 14.3% 대 56.4%다. JP 대망론(大望論)이 JP 대망론(大亡論)이 될 조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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