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팡질팡' 외교, '주먹구구' 영사과
  • 정희상 기자 (hschung@e-sisa.co.kr)
  • 승인 2001.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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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 담당관 겨우 5명…
중국내 한국인 사형 파문은 "예고된 결과"
경찰청 마약 수사관인 조 아무개 형사는 한국인이 중국에서 처형된 사건을 접하고 한마디로 '국가의 수준 차이'라고 개탄했다. 국내에서 외국인 마약 범죄자를 적지 않게 기소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번 사건 처리 과정에서 주중대사관이 보여준 행태는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1997년 8월15일, 일본 야쿠자 스미요시파 소속 이노우에 씨가 서울 롯데호텔에 투숙한 사실을 통보받은 조형사는 휴가지에서 급히 귀경했다. 일본 오사카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폭력단원 이노우에는 한국에 필로폰을 구입하러 들어온 참이었다. 오랫동안 내사를 벌여 그가 마약을 밀거래한 사실을 파악한 조형사는 호텔 방을 덮쳐 마침 투약 중이던 이노우에를 체포하고, 소지한 필로폰 100g을 압수했다. 경찰은 즉각 일본대사관에 이노우에 체포 사실을 통보한 뒤 그를 구속했다.


한국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은 일본대사관은 득달같이 영사를 경찰서로 보내 조사 과정에서 언어가 통하지 않아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도록 조처했다. 조서를 꾸미는 경찰로서는 해당국 영사관이 직접 지켜 보고 있는 만큼 내국인보다 더 조심스럽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형사는 최근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국적을 갖고 있는 국내 외국인 마약 사범도 체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국가 대사관에서는 자국민 체포 사실을 통보해도 '알았다'고만 할 뿐 끝내 조사 현장에 나타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결국 언어 소통이 잘 안되는 데다 철저히 증거 위주로 기소하다 보니 그로서는 이들 마약사범에 대해 정상을 참작할 요소를 집어넣을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조형사는 이번에 중국에서 처형된 마약사범 신 아무개씨와 감옥에서 병사했다는 정 아무개씨의 사례는 바로 한국의 영사 업무가 얼마나 후진국형인가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자국민 지원은 뒷전, 본국 귀빈 접대에만 열중"


이번 사건을 계기로 외교부 내에는 해외에 나간 자국민 보호를 담당하는 영사과의 기능을 근본적으로 쇄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해외 각국을 오가는 한국인들이 사건이나 사고를 당할 때 이를 총괄 처리하는 기구는 외교부 재외국민영사국 영사과이다. 그러나 이곳 업무를 맡은 외무관은 겨우 5명이다. 해외 대사관과 영사관으로 나가면 사정은 더 열악하다. 특히 중국·러시아·베트남 등 과거 사회주의권에 파견된 영사관의 기능은 더욱 떨어진다.


이와 관련해 중국과 러시아 주재 영사관에 파견 근무를 해본 한 국정원 직원은 "자국민을 보호하려는 자세를 갖추지 못한 영사들이 많다. 대부분 주재국 정부가 보내오는 한국인 관련 사건·사고 통보를 앉아서 받아볼 뿐 통역해 주러 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중국과 러시아 국경 지역에서 빈발하는 한국인 관련 사고나 범죄에 기민하게 대응하기에는 선양 영사 사무소 영사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중국을 오가는 한국인은 한 해 1백80만명이나 되는데 주중 한국대사관에 파견된 영사는 고작 4명이다. 그나마 이들도 본국에서 수시로 방문하는 여야 정치인과 고위 관료, 권력 실세 들을 공항 도착에서부터 귀국할 때까지 접대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런 상황에서 올 초에는 지린성 훈춘 시에서 한국인 개인 사업자 나 아무개씨가 피살되었지만 사건 해결차 현지에 파견된 영사는 가족조차 만나지 않은 채 중국 뜻대로 사건을 마무리해 주고 돌아가 버린 일도 있었다. 자국민 보호라는 영사의 본래 직무는 유기된 지 오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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