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문화 잠깨운 ‘준비된 함성’
  • 대구·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2.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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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악마, 소규모 통신 모임으로 출발…시행착오 거치며 수준 높은 응원 일궈



월드컵을 계기로 이제 붉은악마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만큼 세도 불어서 2002년 6월 현재 붉은악마의 회원 수는 12만 명을 넘어섰다. 요즘도 한 달에 ‘만여 명씩 회원이 늘고 있다’고 붉은악마 사무국(www. reddevil.or.kr)은 밝혔다. 그러나 불과 5년 전만 해도 붉은악마는 5백여 축구광들의 PC통신 모임에 지나지 않았다. 이름도 달랐다. 그래서 붉은악마의 역사를 들추어보면 1990년대 한국의 응원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한국에 서포터스 문화가 처음 생겨난 것은 1995년이었다. 서포터스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프로팀이 경기하는 경기장을 찾아다니며 열렬히 응원했다. 그 해 12월, 뿔뿔이 흩어져 있던 서포터스들은 PC통신을 통해 하나가 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국가 대표팀을 응원하는 ‘그레이트 한국 서포터스 클럽’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조직력과 활동은 엉성했다. 20∼30명씩 ‘단관’(단체 관람)을 가는 수준에 불과했다.


응원 방식도 구태의연했다. 야구장처럼 치어 리더를 따라해야 했다. 이 방식은 축구 응원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야구에서는 공수가 바뀔 때, 타자가 바뀔 때 치어 리더를 따라 응원을 할 수 있었지만 축구는 그렇지 못했다. 90분 내내 선수들의 움직임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치어 리더에게 눈길을 줄 새가 없었다. 복장도 대부분 평상복 차림이었다. 선수들과 동질감을 나타내고 싶었지만 유니폼이 없어 비슷한 색깔의 옷을 입어야 했다.


PC 통신을 통해 그같은 문제점을 거론하던 서포터스들은 경기장 문화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경기장에 나가 구호 중심으로 응원을 펼쳤다. 반응이 썩 괜찮았다. 덕분에 모임이 활기를 띠게 되고 회원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 와중에 축구장에서 치어리더와 <아파트> 같은 판에 박힌 응원가가 사라졌다.


1997년 8월, 월드컵 예선전을 계기로 모임의 이름을 공모했다. 레드 일레븐·붉은 악마·도깨비·동방불패·고추장 패거리 같은 이름이 접수되었다. 그 가운데 선택된 것은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4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청소년 선수들의 별명인 붉은악마였다. 이후 국가대표팀이 뛰는 경기장에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10∼20대 젊은이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이후 붉은악마는 순탄하게 활동해 왔지만, 이번 월드컵이 기회이자 위기가 될 수도 있다. 월드컵 이후 행로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은 자생적이고, 자발적이고, 조직적이고, 민주적인 붉은악마가 월드컵 이후에도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기를 바란다. 축구 문화 발전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최근 신인철 회장(34)은 “발전적 해체를 하거나, 비정부기구로 탈바꿈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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