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군부 ‘불순 세력’ 있나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2.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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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하필이면 월드컵 기간에 그들에게 아무런 득도 없는 서해교전을 도발했을까. 북한 전문가들은군부내 강경파의 독자 행동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월드컵 4강 진출 쾌거를 이룩한 6월22일 직후 며칠간. 대북 사업에 깊이 관여하는 재계 고위 인사는 북측으로부터 기분 좋은 소식이 오기를 내심 기다렸다. 하지만 며칠을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소식은커녕 6월29일 난데없이 서해교전이 터졌다. 그런데 곧바로 또 기다렸던 것이 왔다. 한국의 월드컵 성과를 축하한다는 북한측의 축하 메시지였다. 소식을 기다릴 때는 안 오더니 잔치 끝난 뒤에 뒤늦게 온 것도 그렇고, 북측의 태도가 평소와 많이 달랐다. 뭔가 다급하고 서두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지난 7월4일 조선중앙통신이 발표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7·4 남북공동성명 30주년 기념 성명 내용 또한 그렇다. 조평통은 이 날 성명에서 “지금 북남 관계는 외세와 반통일 세력의 방해 책동으로 말미암아 일시 곡절을 겪고 있지만 온 민족은 북남 사이의 관계가 7·4 공동성명과 6·15 북남 공동선언의 정신에 맞게 전진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 구절에서는 “…이미 북남 쌍방이 합의한 대로 대화와 협력을 순조롭게 추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까지 했다.



바로 며칠 전인 6월29일 연평도 앞바다에서 남북 해군이 사상 유례 없는 포격전을 벌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물론 ‘미제의 비호를 받은 남조선군의 선제 공격’이 사건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보도가 줄을 잇기는 했다. 그러나 그 강도나 빈도에서 1999년의 서해교전 당시와는 비교가 안된다. 오히려 이런 ‘뜻밖의’사건에도 불구하고 남북 대화나 교류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짐하는 듯한 자세이다. 사건 직후 북측 핵안전요원 25명이 남한을 방문했고, 북한 당국은 방북 예정 인사에 대한 초청장도 평소와 다름없이 발급했다.



한쪽에서는 뺨 때리고 한쪽에서는 어르는 듯한 북측의 이같은 상반된 행동의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북측은 우발적이었든 계획적이었든 서해교전의 파장이 더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서해교전이 우발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북측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는지부터 짚어보자. 교전이 일어났던 6월29일에 우리 어선들이 어업통제선을 벗어나 북상해 조업했고, 해군 경비정들이 이를 단속하기 위해 서둘러 뒤쫓아갔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남하한 북측 경비정과 ‘우발적’ 충돌이 벌어졌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지난 6월7일 합동참모본부가 밝힌 대로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북한의 의도적 공격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합참은 그 근거로 북측 경비정이 올해 북방한계선(NLL)을 열네 차례 넘어왔고, 특히 6월에만도 11·13·27·28·29일 등 다섯 차례나 침범했다는 점, 그 중에는 특별한 사유 없이 마치 현장 답사용 또는 우리 해군의 대응을 떠보기 위한 것으로 의심되는 월선 사례도 있었다는 점, 또한 6월29일 북한 경비정 388·684 호가 7분 간격으로 동시 침범해 우리 해군 함정을 격리한 뒤 선제 공격했다는 점 등을 들었다.



이번에 우리 경비정 참수리 357호를 격침시킨 북한 경비정 등산곶 638호의 주무기는 85mm 단연장포이다. 북한군 출신 탈북 인사에 따르면, 85mm 포는 원래 북한 육군의 T64 탱크용이었는데 1985년께부터 해군 경비정에도 장착했다. 이 포는 한번 조준점을 맞추면 지면의 굴곡이나 파도에 상관없이 계속 목표에 고정되는 팽이장치라는 것을 장착하고 있다.



그런데 수동으로 조작되는 85mm 포에 한번 포탄을 장착하려면 포장 1명, 조준수 2명, 장탄수 2명, 계측수 1명 등 5∼6명이 달라붙어, 40초에서 1분 정도 작업해야 한다. 또한 이번 경우 북측 경비정은 초전에 우리 경비정의 지휘부인 조타실과 가장 취약부인 홀수선(선체와 해수면의 접촉 지점)을 정확히 강타했다. 반대로 우리 해군은 고속정 6척이 탄환을 수천 발 쏘았어도 북측 경비정 하나를 격침시키지 못했다. 다시 말해 북한 경비정이 사전에 치밀하게 조준한 상태에서 접근해 공격을 가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다. 북한 경비정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해서 행동한 것이 분명한데, 그 이후의 북측 대응은 ‘장화 신고 긁는 격’이다. 복수는 복수이고 확전은 막아 보자는 철저한 계산 때문일까.



교전 이후 태도 앞뒤 안 맞아





이런 판단은 김정일 위원장을 비롯해 북한의 대남 담당자, 대외사업자들이 이미 사전에 계획을 미리 짰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이는 김정일 위원장의 평소 스타일이 아니다. 한마디로 북한답지 않다는 것이다. 주로 북측과 접촉한 경험이 많은 전문가들이 고개를 갸웃한다. 미리 상황을 숙지한 상태에서 ‘일을 저질렀다면’ 더 당당한 태도를 취했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김위원장이 충분히 숙지하고 이를 허용했다면 뭔가 의도가 있었을 것이고, 그 의도를 실천에 옮기는 후속 조처가 나왔을 것이다. 대외 관계부터 살펴보자. 우선 검토 대상은 미국 특사의 북한 방문을 앞두고 이를 파탄시킬 명분용이었다는 설. 특히 이번 북·미 대화는 북한의 재래식 핵 미사일을 이슈로 하기 때문에 북측으로서는 껄끄러웠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3월 북한이 전격적으로 미국측의 대화 제의를 수용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일부에서는 미국이 특사의 격을 제임스 켈리 차관보로 올리려고 북측에 의사 타진을 했으나 북에서 답변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것만 가지고 북측이 대화할 의사가 없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답변 시간이 촉박했거나 외교 전략적 측면도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남한의 월드컵 성공을 시샘해 찬물을 끼얹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북한은 월드컵 기간에 남한측이 선전한 경기를 방영하고, 또 이에 따라 평양 시민들도 같이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또 축하 메시지까지 보내온 것 등을 보아서도 앞뒤가 안 맞는다.



마지막으로 북한 내부 통제용이었다는 분석이다. 1999년 1차 서해교전 때는 북측 보도 매체들이 격앙한 논조로 주민들의 대남 적개심을 고양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실 김위원장이나 북의 대남·대외 파트너 입장에서는 이번 사태로 인해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훨씬 많다. 6·15 남북 정상회담이 있기 전인 1999년과 지금은 남북 관계의 차원이 질적으로 달라졌다. 특히 6·15를 전후해 중국·러시아 방문 등 국제적인 행보를 거듭해온 김위원장이 전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월드컵 기간에 그런 무모한 짓을 해서 무슨 득을 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은 벌어졌다. 그럼 누가 했을까. 재계의 북한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군부내 불순 강경 세력이다. 그들이 작심하고 사고를 치자 김위원장이 돌발 사태에 당황해 대남 파트에 서둘러 진화책을 내놓으라고 지시해, 대남 파트들이 허둥지둥 이것저것 내놓는 모양새였다는 것이다.



‘김정일 따로 군부 따로’ 권력 이상설도 나와





그런데 여기서 북한 체제의 성격과 관련한 중대한 쟁점이 등장한다. 김위원장의 유일 지배 체제가 확립된 북한에서 군부 일부의 준동이 가능한가. 국내 보수 언론과 보수 세력은 차치하고라도 북한에서 군 생활을 경험한 탈북 인사들이 특히 회의적이다. 한 탈북 인사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군부의 경우 군대 이동뿐 아니라 훈련시의 실탄 휴대까지도 일일이 상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군 지휘관들의 재량권이 남쪽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크지 않다. 또한 북한에서 김위원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바로 죽음을 뜻한다고 한다.



반면 경협을 통해 북측과 접촉한 경험이 많은 인사들은 생각이 다르다. 그들은 경협 현장에서 군의 반대로 번번이 사업이 좌절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군부는 남북 경협, 대외 개방, 북·미 협상 등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가진 강경파로 각인되어 있다. 일부 대북 사업자들은 북한 군부 내에 김위원장도 통제할 수 없는 세력이 이미 구축되어 있다는 ‘권력이상설’까지 내놓기도 한다. 독자적인 명령 체계에 따라 군부가 따로 논다는 것이다.



그런 극단적 주장이 아니라도, 북한 군부가 매우 기술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해 왔다는 점은 쉽게 확인된다. 예를 들어 김위원장의 총론적인 결론이나 지침은 수용하되 각론에서 군의 입장을 관철하는 식이다. 인민군 고위급 출신인 한 탈북 인사는 과거 김일성 주석 생존시에도 그런 사례가 많았다고 주장한다. 1990년 일본 자민당 가네마루 신 부총재의 방북으로 북·일 관계에 돌파구가 열린 적이 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이 앞으로 일본 관광객이 많이 올 것에 대비해 금강산 개방과 동해안 철책선 일부 철거, 그리고 원산 갈마의 군 비행장을 민간 비행장으로 바꾸라고 군에 지시했다. 그런데 군이 동해에 비행장이 하나밖에 없어 어렵다는 식으로 보고하자 이를 철회했다.



서해는 군부가 ‘깽판’ 치기에 안성맞춤 지대





김일성 주석 때도 그랬던 것처럼 김정일 위원장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김위원장이 군을 비롯한 북한 전체를 확고하게 장악했다고 하지만, 북한 군부가 합심해 건의하면 거의 대부분은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의 탈북 인사가 북한군에 근무할 당시 경험으로 보면, 군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올린 보고서가 1년에 100건 정도 되는데 거의 100% 사인이 나왔다고 한다.



김위원장과 북한 군부의 이같은 관계를 전제해놓고 이번 사건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은 김위원장의 원론적 지시를 북한 군부가 충성 경쟁 차원에서 과도하게 집행했을 경우. 즉 1999년 서해 1차 교전에서 북측이 패하자 김위원장이 앞으로 그런 일이 있으면 당당하게 맞서라는 식의 ‘원론적’지시를 했을 수 있다. 이에 따라 지난 4월 대장으로 승진한 김윤심 현 해군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북한 해군이 충성 경쟁 차원에서 저질렀을 수 있다.



그러나 북한 군부 내에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 발전을 두려워하는 냉전 기생 세력이 김 위원장의 원론적 지시를 악용했을 수도 있다. 시기상으로 너무나 절묘하기 때문이다. 월드컵이 끝나기 전, 그리고 미국의 대북 특사 파견을 앞둔 미묘한 시기를 선택한 점을 볼 때 단순한 충성 경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대남 파트나 대외 파트 처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시기가 불순 강경 세력에게는 절호의 시기였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서해는 이들 세력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깽판’을 치기에는 너무나 안성맞춤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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