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나고파, 지 긋지긋한 굴레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2.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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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주자 콤플렉스 분석/이회창 ‘귀족’ 노무현 ‘비주류’ 정몽준 ‘아버지’ 권영길 ‘선구자 의식’ 부담
사람은 누구나 콤플렉스를 품고 산다. 콤플렉스는 양면성이 있다. 사람을 좌절하게 만들고 사회 부적응 상태로 몰아넣기도 하지만, 극복하면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기도 한다. 오는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은 과연 어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을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게는 늘 ‘귀족’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그런 출신 배경과 학력·경력이 대중 정치인에게는 약점이 되기도 한다.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당내 경선 때 귀족 대 서민의 대립 각을 내세웠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보 또한 ‘귀족 콤플렉스’를 의식하고 있다. 이는 서민 행보를 유독 강조하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이후보는 지난 당내 경선 때 지방을 다니면서 장급 여관에서 잤다. 1997년 선거 때는 지방 유세를 다니다가도 밤에는 서울로 돌아오던 그였다. 청결 콤플렉스보다 귀족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이 더 우선이었던 셈이다. 기자들을 대동한 채 설렁탕집에 자주 가는 것도 같은 이치다. 작위적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그의 이런 행보는 계속되고 있다. 측근은 반복 효과를 통해 득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체질화되어 있지 않다 보니, 현장에서 부딪치기보다는 사전에 짠 일정이나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과정에서 부작용도 간간이 노출된다. 지난 7월 서민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는 결혼정보회사 직원을 신혼부부로 가장시켜 동원했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전교생 4백20명 중 305등을 했다는 성적표를 공개한 것도 평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귀족 콤플렉스의 소산이었다.



잘 극복하면 정치 에너지 될 수도



이후보는 ‘완벽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일종의 결벽증이다. 이후보는 국민 70%가 이후보 아들에게 병역 비리가 있었을 것이라고 응답한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김대업씨를 맞고소한 것도 그의 결벽증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당내에서는 맞고소할 경우 검찰에 칼자루를 넘겨줘 전면 수사의 빌미를 줄 수 있다고 만류했지만, 그는 강경한 뜻을 꺾지 않았다. 결국 측근들은 다른 대응책을 찾지 못한 채 고소했고, 상황은 커져 버렸다.



그의 결벽증은 연설 원고를 작성할 때도 발동한다. 보좌진이 원고를 올리면 그는 빨간 펜을 들고 일일이 교열을 본다. 연설 직전까지 원고가 완성되지 않아 실무진이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사소한 결재 사안까지 일일이 챙기는 것도 일종의 결벽증이다. 사무총장을 지낸 한 인사는 아주 작은 사안까지 일일이 챙기는 바람에 일이 지연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후보는 자신과 가족에 대한 언론 보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공보특보에게 문제 삼으라고 지시하고, 해당 기자를 만나 처리한 바를 반드시 보고받는다. 감히 누가 나를 의심하느냐는 투의 감정 표현은 내가 가장 옳다는 식의 독선에서 말미암는다.



이런 성격 때문에 ‘차갑다’는 이미지가 형성되기도 했다. 물론 이런 면이 있었기에 지난 총선 때 김윤환 전 의원 등 구 정치인들을 과감히 쳐낼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요즘 차가운 이미지를 고치려고 노력 중이다. 옥인동 집으로 이사한 직후 가진 집들이에서 부인 한인옥씨는 “요즘은 바지 줄도 세우지 않는다”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이후보가 테 없는 안경을 연갈색 테 안경으로 바꾼 것도 부드러운 이미지 조성을 노린 것이다.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변변치 않은 집안에 상고 출신이다. 정치권에서도 주로 변방에 있었다. 이런 탓에 그에게는 ‘비주류 콤플렉스’가 있다. 낯을 잘 가리고,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린다. 그것이 몸에 배어 후보가 된 후에도 의원총회 같은 곳에 참석할 때면 의원들이 앞으로 가라고 권할 때까지 중간에 처져 있는 경우가 많다. 지난 8월24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중 수교 10주년 기념 행사장에서는 금방 퇴장하려는 그를 김상현 의원이 잡아끌어 정몽준 의원과 어울리게 만드는 광경이 보이기도 했다. 본인 스스로도 이런 점을 극복하고 싶어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만약 사회적 주류에 속했다면 민주당 의원들이 이토록 흔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말실수도 비주류 콤플렉스에서 말미암은 점이 크다. 경선 때까지 그의 말투는 인기를 높이는 요소였지만, 후보가 된 다음부터는 지지율 하락의 주범 취급을 받았다. 그는 점차 당혹해 했고, 말 또한 탄력을 잃어갔다. 그러면서 언론에 대한 피해 의식은 커져 갔다. 많이 나아졌지만, 최근까지 그의 설화(舌禍)는 이어지고 있다. 8월30일 한화갑 대표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그는 “한화갑 대표가 (나를) 대통령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라고 말했다가 구설에 올랐다. 이 말만 안 했다면 민주당 사태는 훨씬 빨리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최근 대구를 방문해서도 그는 “반미주의면 또 어떠냐”라고 말했다가 정정하기도 했다.



‘외모 콤플렉스’도 빠질 수 없다. 특히 이마의 일자 주름에 콤플렉스가 있다. 경선 때 주름을 없애는 보톡스 수술을 받았을 정도. 그러나 이제는 자타 모두 개성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얼마 전 강원도 수해지역에 갔을 때의 일이다. 강원도청 직원이 “실제로 보니 이마 주름이 깊지 않네요”라고 인사말을 건네자 그는 “네, 아침에 다리미로 좀 다리고 나왔습니다”라고 받아 좌중을 웃기기도 했다. 건들거리는 듯한 걸음걸이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최근에는 이를 고치려 노력 중이다.



정몽준 ‘생모’ 문제는 동정 여론 불러 일으키기도



노후보는 ‘선명성 콤플렉스’가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자주 듣는다. 한마디로 융통성이 없고, 모든 것을 적 아니면 동지로 바라본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를테면 이인제 의원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변의 건의가 있었지만, 그는 만날 시도도 하지 않았다. 최근 이주일씨가 타계했을 때는 주위에서 문상을 권유하자 “개인적으로 모르는 사람인데”라며 가지 않았다. 후보가 된 직후에는 종교계 행사에 가는 일정이 잡히자 “내가 그 종교를 안 믿는데 괜히 가서 믿는 척하는 게 우습다”라며 가지 않겠다고 버틴 일도 있다. 가식적인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통합적 리더십이 없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반면 아는 사람의 일은 아무리 바빠도 꼭 챙긴다. 그러다 보니 노무현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아주 싫어하는 양극 현상이 생겼다.





정몽준 의원은 아버지 콤플렉스가 강하다. 지난 8월16일 지리산행 중에 <시사저널>과 인터뷰했을 때의 일. ‘아버지가 생존해 있다면 정의원의 대통령 출마에 어떤 반응을 보였으리라 보느냐’고 묻자 그는 정색을 하며 “생각해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아버지의 어깨를 주무르곤 했던 일화에 대해 물었을 때도 그는 “공부하기 위해 안 잤을 뿐이다”라며 정색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아버지를 그만큼 의식한다는 말이다. 그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아버지도 실패했는데’라는 말이다.



정신과 전문의인 정혜신 박사는, 특별한 아버지를 둔 아들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늘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동시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버지와 끝없이 비교당하는 것에 분노의 감정을 품는다면서, 이를 ‘거인 아버지 콤플렉스’라고 지칭한 바 있다. 정의원의 심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주변 인사들의 말이다.



정의원은 남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거나 말끝을 흐린다는 지적을 자주 받는다. 민주당의 한 인사는 정몽준 의원의 말만 들어서는 신당에 대한 그의 진의를 좀처럼 파악하지 못하겠다면서 아버지와 형들의 눈치를 보며 자라 입조심이 체질화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거인 아버지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특히 자신감 부족은 여러 군데서 노출되는 대목이다. 최근 남북축구대회를 기념하는 모임에서 연설하면서 그는 연신 한쪽 손으로 다른 팔을 감싸는 자세를 취했다. 대중 연설에 약하다는 심리 상태가 이런 어설픈 행동을 이끌어냈다는 것이 주변의 분석이다. 그의 연설 스트레스는 의외로 심한데, 그가 짧은 연설을 위해 머리를 숙이고 문장을 외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특히 발성에 문제가 많다는 점은 본인도 인정한다. 1988년 처음 선거를 치를 때 그는 학교 때 국어 선생님을 초빙해서 연설 노하우를 배우기도 했다. 지금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듯한 말투를 그냥 고수하고 있지만 내심 고민이 많다고 한다.



‘생모 콤플렉스’도 그가 넘어서야 할 고비다. 그는 거인 아버지와 이복 형제들 사이에서 불우한 귀공자로 자랐다. 내성적이면서도 기분파에 속하는 그의 양면적인 성격도 이런 성장 배경 때문이라는 평이다. 그는 특히 주위 사람에게 불 같은 성격을 내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최근 불거진 ‘생모’ 문제는 상당한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의 아버지는 6·25 때 빨치산이었다. 그러나 ‘좌익 아버지’를 둔 이문열씨가 우익이 된 것과 달리 그는 아버지의 처지를 이해하는 편을 택했다. 민주노동당을 취재하면서 그에 대한 평을 모았더니 공통된 답이 있었다.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것과 ‘회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진지하고,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본인에게 직접 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지도자가 결단력만 내세우면 당이 깨진다. 민노당에는 무엇보다 통합과 조정력이 필요하다.” 이런 성품이야말로 권영길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잣대인데, 한마디로 그는 ‘선구자 콤플렉스’를 가진 인물이다.



그의 삶 자체가 그랬다. 그는 경남중·고교를 거쳐 서울대 농대에 입학했는데, 그 이유가 농민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농민운동 대신 신문기자를 택했지만, 그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부인 강지연씨는 “결혼 직후 전태일씨 분신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서울신문> 기자로서 이 사건을 취재했던 남편이 집에 와서 엉엉 울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라고 말했다. 그런 그가 파리 특파원을 마치고 돌아와 막 출범한 노조에 자발적으로 가입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순서였을지도 모른다.



이후 그는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97년 초 그는 수배되었고, 큰딸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 시간에 그는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계속했다. 1997년 대선 참패 직후 동지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그는 20여명만을 이끌고 끝까지 당을 지켰다. 현정부로부터 노동부장관 입각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거절했다. 자신이 빠지면 민노당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 내내 진지했고, 농담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이런 ‘다소 과한 진지함’은 약간의 스타성을 필요로 하는 대중 정치인에게는 강점보다는 약점으로 통한다. 물론 그가 자신을 대중 정치인이 아닌 ‘투사’로 여기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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