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 광고만 봐도 치가 떨려요”
  • 노순동·차형석 기자 ()
  • 승인 2003.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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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에 속고 빚에 우는’ 10대 신용불량자가 수천명에 이른다. 연체 대금을 받으려는 카드사와 카드사의 부도덕성을 따지며 돈을 내지 못하겠다고 맞선 미성년 신용불량자들이 법정 대결
"무슨 뜻이죠? 갚으라는 건가요, 말라는 건가요?” 지난 12월27일 서울지방법원(제23민사부·재판장 김문석)의 판결과 관련한 언론 보도를 보고 10대 신용불량자인 조 아무개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성년자와의 카드 계약 무효, 카드사는 수수료와 이자를 돌려줘야 한다’라고 되어 있지만 아울러 ‘미성년자라도 부당 이득은 반환해야 한다’고 토가 달렸기 때문이다.
당혹스러운 것은 조양뿐 아니다. 소송에 참여한 김 아무개양은 판결이 난 이튿날부터 빚 독촉을 받기 시작했다. “어젯밤 뉴스 보았느냐면서 아침부터 전화가 왔다. 빚진 건 잘못이지만 갚을 도리가 없다. 판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라며 김양은 말끝을 흐렸다.





이번 소송에 참여한 인원은 총 44명. 지난해 4월27일 삼성카드·LG카드 등 총 7개 금융회사를 대상으로 처음 소송이 제기되었다. 사건을 맡은 윤성철 변호사는, 이와 비슷한 소송을 5건 더 진행하고 있다. 전체 원고는 2백13명이며, 피고는 은행과 카드회사 등 총 18개 금융업체를 망라하고 있다.
지난 12월27일 판결은 이 가운데 1차 소송의 1심 판결이다. 윤변호사는 “미성년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민법의 취지를 재확인해 무분별한 카드 발급에 쐐기를 박으면서도, 카드사의 현실적인 손해는 막은 타협적인 판결이다. 법리가 일관되지 않다”라며 항소할 뜻을 밝혔다(38쪽 상자 기사 참조).



지방에서도 유사한 소송이 제기되었다. 대구 참여연대의 의뢰로 미성년자 2명의 공익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설창환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사회 문제가 된 후 나온 첫 판결이어서 선례가 될 가능성이 크다”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1차 소송단에서 카드 이용 금액이 가장 많은 미성년자는 3천2백여 만원인 조 아무개양. 이미 2천3백여 만원을 갚아 미납금은 9백여 만원이다. 전체 소송인 가운데는 1억5천만원까지 카드를 쓴 10대가 끼어 있고, 천만원 이상을 쓴 이도 적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 돈을 갚으려고 애쓰다가 도움을 요청한 것이어서 미납액은 그리 크지 않았다.



갖가지 방법으로 회원 가입 유혹



미성년자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과 반대로 카드사는 ‘우리가 이겼다’는 분위기다. ㄷ카드사도 “미성년자라고 해서 성인과 다르게 관리할 이유가 없다. 돈의 성격이 채무이든 부당이득이든 카드사가 받아야 할 돈임은 명백하다”라고 밝혔다. ㅅ카드사는 “미성년자 미납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액수도 많지 않고”라고 말했다.


카드업계는 그동안 미성년자에게 부모 동의 없이 카드를 발급한 것에 대해 문제가 없다고 항변해 왔다. 여신전문금융법(여전법)이 그 근거다. 여전법은 ‘18세 이상 소득이 있는 자’에게 신용카드를 발급할 수 있도록 해왔다. 하지만 큰소리 치는 것과 달리 업계는 지난해 2월 여전법을 손질해 부모나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받도록 못박았다.


이에 따라 10대 신규 발급은 여름 이후 줄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이미 카드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된 10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2002년11월 현재 미성년자 신용불량자는 6천9백81명. 여자가 4천2백46명, 남자가 2천7백35명이다. 대부분 신용카드 이용자다.





지난해 1월 금감원 자료에 따르면, 신용불량자 수는 국민·LG·외환 카드 순이었지만, 신용불량자 중에서 미성년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삼성·국민·외환 카드 순이었다. 이번 소송에서도 삼성과 LG 등 대기업 계열의 전업 카드사 관련자가 가장 많았다. 이에 대해 삼성카드 관계자는 “시장 점유율이 높은 탓일 뿐, 우리 회사가 특별히 10대 마케팅에 주력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액수가 미미하다며 10대 신용불량자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카드사와 달리 당사자인 10대의 경우 고통은 본인뿐 아니라 가족에게 두루 미친다. 지난 12월 말 소비자보호원의 문을 두드린 배 아무개씨. 배씨는 1982년 8월생인 딸이 2001년 카드 빚 100만원이 있는 것을 보고 대신 갚아주었다. 당시 배씨는 담당자에게 ‘딸이 미성년자이니까 다시는 카드를 발급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1년 후 또 3백만원이 연체된 것을 발견했다. 19세인 딸에게 같은 카드를 재발급한 것이다. 배씨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번에는 갚을 수 없다”라고 버텼고, 카드사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하지만 8월이 지나 딸이 성년이 되자 다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카드사의 항변은, 교복 입은 고등학생이 아니라 ‘소득이 있는’ 직장인을 상대로 카드를 발급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이와는 한참 달랐다. 전라북도 군산에 거주하는 1983년생인 고진영군은 고등학교 때 길거리에서 카드를 받았다. 학생이라고 밝혔더니 낯선 회사 이름을 하나 알려주면서, 확인 전화가 오면 그 이름을 대라고 했다. 고군은 “웃겼다. 첫 달에 한도를 꽉 채워 썼다. 솔직히 어떻게 갚을지는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현금 서비스로 돌려막기를 했더니 1년 후 5백만원으로 늘었다. 일단 연체되자 하루에 독촉 전화가 스무 통이 넘게 왔다. 고군은 “일곱 명이 돌아가며 전화를 하는데 미치겠더라”고 말했다.


강원도 정선에 사는 이필선군. 고등학생이라고 하자 역시 묘수를 일러주었다. ‘통장에 30만원을 넣어놓고, 카드 회사에서 전화를 걸어오면 세 번에 걸쳐 10만원씩 적금식으로 넣는다고 말하라.’ 결국 신용불량자가 된 이군은 “곧 군대에 가야 하는데 신용 불량이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10대 신용 불량이 심각한 이유는 이제 막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3 때 취업을 나가 계약직 사원으로 일한 최현정양은 오로지 카드 연체 때문에 정규직 발령을 받지 못했다.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최양은 “원금은 갚을 생각이다. 번듯한 직장에 갈 수 없는 상황이 힘들다”라고 말했다.


이미 신용불량자로 낙인이 찍힌 미성년자들은 하나같이 대책이 없어 보였다. “갚고 싶지만 방법이 없네요.” “모르겠어요.” 그 중에는 카드사를 성토하는 이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채무자 관련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서현우씨(가명)는 “불량 회원이 우수 고객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그는 “어찌되었건 빚은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돌려막기를 하다가 뒤늦게 손을 털고 보니 빚이 4천만원이었다. 한도를 높여주니 계속 빚을 쓰고, 그렇게 금융기관의 배만 불려준 셈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빚을 못 갚으면 감옥에 가는 줄 알았다. 카드깡이나 사채 시장에 손을 벌린 건 그 때문이었다”라며 사뭇 억울한 기색이었다.





“감옥 가는 줄 알고 사채 빌려 갚으려 했다”


문제는 지난해부터 속속 밝혀지는 은행과 카드사의 수익 구조가 이들의 항변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드사는 현금 서비스나 카드론 이자가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은행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40쪽 딸린 기사 참조). 이른바 채무자들의 도덕적 해이는 금융기관의 이런 부도덕성과 쌍을 이룬다.


그러다 보니 일선에서는 숨바꼭질이 심심치 않다. 채무자들이 ‘갚을 능력이 없다’고 버티는 경우가 많고, 여간해서는 보증인도 세우려 들지 않는 것이다. 미성년자들도 마찬가지다. 삼성카드 관계자는 “연체가 되면 다 똑같다. 두 달쯤 지나면 일단 연락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돌려막기’ 어려워져 신용불량자 사태 날 듯


소송에 참여하고 있는 미성년자들은 모두 ‘동작 그만’ 자세로 참여하고 있다. 돈도 전혀 갚지 않고, 대환 대출로 돌리지도 않는다. ㄱ카드사 관계자는 판결이 나온 뒤 “돈을 쓰고 갚지 않겠다고 소송까지 벌이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혀를 끌끌 찼다.


그나마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원치 않는 경우 뒤로 협상을 제안해 오기도 한다. 대구에서 미성년자 소송을 진행하는 설변호사는 카드 회사 한 곳으부터 미납대금을 받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도, “카드사들이 소송을 통해 빚을 받아내겠다고 하지만 본인 소득이 없는데 어쩔 것인가. 차차 정리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가장 일선에서 이른바 ‘문제 고객’을 접하는 이들의 말은 아이러니컬하다. 다중채무자의 회생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신용회복지원위원회에서 일하는 상담자 김 아무개씨는 “상담을 하다보면 개인보다는 구조가 더 문제라는 것을 절감한다. 쪼들리는 사람에게 마음껏 쓰라고 풀어놓았으니 지금 사태는 당연하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돌려막기가 어려워졌으니 올해 상반기에 신용 불량자 수가 정점을 이룰 것이다. 미성년자는 압박을 크게 느껴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대책 없는 젊은층의 소비 행태에 놀라 금융 교육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36쪽 상자 기사 참조). 여신금융협회 황명희 부장은 협회 차원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금융 교육을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미 미성년자는 비싼 수업료를 톡톡히 치렀다. 교육의 결과는? “카드 광고만 봐도 치가 떨린다. 아무리 카드가 편리해도, 절대 카드는 쓰지 않겠다”라고 이 아무개양은 말했다.
올해부터는 카드사가 치러야 할 수업료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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