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의 과거 청산 사례
  • 신호철 기자 (esisapress.com.kr)
  • 승인 2004.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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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 규명’보다는 ‘진상 공인’에 주력
1990년대 이후 아프리카·남미 등 제3세계 국가들이 민주화하면서 이른바 ‘진실위원회 설치’가 세계적 유행으로 번졌다. 최소 15개국 이상에서 진실위원회를 만들어 국가 차원의 과거사 청산에 나섰고 그 중 몇몇 위원회는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진실위원회는 남아프리카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다. TRC는 과거사 청산 기구의 교과서로 꼽히며 한국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할 때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1994년 오랜 백인 정권 시대를 마감하고 흑인 정권을 탄생시킨 남아프리카는 1995년 7월 ‘국가 통합과 화해 증진법’에 따라 TRC를 설치했다. 조사 기간은 1960년 3월 샤프빌 사건 발생부터 1994년 5월 넬슨 만델라 대통령 취임 때까지 34년 간이었다. 위원회 의장은 노벨상 수상자인 데스몬드 투투 주교였다. TRC의 특징은 처벌보다는 진실 규명에 주력한 것이다. 자발적으로 범죄 고백을 유도하고 공개적인 청문회를 통해 사면했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활동한 엘살바도르의 진실위원회는 1980년대 엘살바도르 내전 중 일어난 인권 침해와 국제법 위반 사례를 조사했다. 비록 조사 기간은 짧았지만 희생자와 목격자 증언을 듣고, 수만 건의 자료에 대한 통계 조사를 벌였다. 보고서는 당시 독재 정부와 군대의 만행·학살을 주로 기록했으나, 저항 세력이 저지른 학대 행위도 빠뜨리지 않고 같이 적었다. 보고서 제목은 <광란에서 희망으로>였다.

아르헨티나의 ‘실종자들에 관한 국가위원회’도 성공 사례로 꼽힌다. 1983년 들어 문민 정부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7년 동안 군부 정권이 저지른 만행을 조사했다. 위원회는 라울 알폰신 대통령이 임명한 명망가 10명으로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9천여 명의 실종 사건을 기록했고 보고서(<눈까마스>)는 전국적 베스트 셀러가 될 만큼 화제를 모았다.

그밖에 우간다(1974)·우루과이(1985)·볼리비아(1982)·필리핀(1986)·짐바브웨(1985)·차드(1991)·칠레(1990)·에티오피아(1993)·르완다(1993)에서 진실위원회를 설치했다. 우간다와 남아프리카의 경우 진실위원회가 2개 이상 존재했다.

이들 위원회의 특징은, 첫째, 정치적인 과도기나 그 직후에 설치되었고, 둘째, 진실을 규명하는 것과 처벌은 별개였다는 점이다. 셋째로 진상 규명이라기보다 ‘진상 인정’의 성격이 강했다. 세계 각국의 진실위원회 사례를 연구한 프리실라 B.헤이너는 논문에서 ‘과거 정부의 만행은 국민들이 이미 다 알고 있던 이야기였다. 몰랐던 사실을 새로 밝힌다는 의미보다 국가가 공식으로 과거의 어두운 면을 인정한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라고 썼다.

저항 과정의 인권 침해 사례 먼저 고백

각국의 진실위원회가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볼리비아의 경우 ‘실종조사 국가위원회’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3년간 조사를 벌였으나 보고서를 외부에 발표하지 않았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외국의 진실위원회는 주로 특정 시기에 일어난 인권 침해 행위를 조사하는 것이다. 지금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한 것처럼 100년에 가까운 시기를 광범위하게 다루는 기구는 유례가 없다”라고 지적했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진실위원회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지도력과 정치력이 필요하다. 남아공에서 만델라와 투투 주교의 도덕성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진실위원회 설치를 둘러싸고 당시 정치적 의도라는 비판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만델라가 속했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백인 정권의 학대 사례를 밝히기 전에, ANC가 해방투쟁을 하면서 벌인 인권 침해 사례를 먼저 고백했다고 한다. 한홍구 교수는 “한국에서도 어떤 경우에라도 진실위원회가 정치 공세의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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